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 이럴 때 나서는 건
“자, 잠시만 진정해 보세요 에리식톤. 저희 지금 대화가 통하는 것 같으니까 좀 더 수월하게 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심호흡부터 하고….”
아인의 말에 에리식톤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깊게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지나치게 강한 힘으로 인해 성벽 일부가 무너져 에리식톤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적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다가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뱃속으로 삼켜졌다.
“맛있다.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이게 심호흡이라는 거구나.”
“그런 거 아냐! 공기만 들이마시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걸 죄다 먹으라는 게 아니었다고요!!”
우라노스가 조종하던 이후로 내내 멍하던 에리식톤의 눈에 조금씩 이채가 돌고 있었다. 먹을 거라는 단어 하나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우라노스의 명령을 어기고 그것의 발걸음이 천천히 아인 일행 쪽으로 향했다.
아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중,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발을 멈췄다. 에리식톤의 상태가 이상했다. 별다른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걷다가 갑자기 저 멀리까지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고, 몸의 일부가 일그러져 보이기도 했다.
아인에게는 환각 마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닉과 영웅에게는 다소 익숙한 모습이었다. 닉은 혀를 차면서, 영웅은 의미 모를 쓴웃음을 흘리며 동시에 중얼거렸다.
“렉 걸렸네. 게다가 저 녀석, 그래픽이 깨지고 있어.”
“그, 그래픽이요…?”
“데이터가 원상복구 된 게 아닌 모양이야. 정확하게는 데이터가 원래 상태대로 돌아오다가 다시 깨지길 반복하는 중인 것 같은데… 저 상태로는 형태 유지도 힘들 거야.”
영웅의 말대로 에리식톤의 몸은 일그러졌다가 다시 돌아오고, 다리의 그래픽이 깨지며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눈은 아인 일행이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상태로는 제대로 도달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상태가 정상이 아니야. 전투가 문제가 아니라, 닿으면 우리 데이터까지 망가질지 몰라. 일단 뒤로 물러나야 해 아인. 지금이 아니라도 기회는 있으니까….”
“싫어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하다못해 에리식톤한테서 엘퀴네스의 눈물이라도 꺼내야 해요. 페리스 님도 시간이 넉넉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일주일이라는 유예 기간 후에는 페리스가 카오스에게서 완전히 데이터 삭제를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엘퀴네스의 눈물을 이용해 가트를 치료하고 페리스의 정신을 되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영웅은 혀를 차면서 아인의 말을 듣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엘퀴네스의 눈물… 에리식톤이 삼키고 있다고 했었지? 아마 저 녀석이 명령을 무시하고 갑자기 제멋대로 구는 것도, 데이터가 깨졌다가 고쳐지길 반복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
“네…? 하, 하지만 엘퀴네스의 눈물이 그런 것까지 치료할 수 있다고 들은 적은….”
“엘퀴네스의 눈물은 모든 것을 치료하고 원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몸이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는 걸 생각하면, 결국 그 치료 방식도 데이터 복구 같은 거겠지.”
즉 에리식톤의 몸 안에 있는, 우라노스가 집어넣은 오류 데이터와 데이터를 복구시키는 엘퀴네스의 눈물이 서로 충돌해버렸다는 것. 저 상태를 지속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에리식톤의 몸이 충돌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해버리거나, 엘퀴네스의 눈물이 이겨서 완전한 상태의 에리식톤으로 각성하거나, 오류 데이터가 이겨서 엘퀴네스의 눈물이 소멸하거나.
어느 쪽이든 최악이며, 엘퀴네스의 눈물이 온전할 경우의 수는 한 가지도 없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아인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제피로스를 한 개체 소환해 자신의 몸 주위에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화를 준비하려는 준비 단계.
“그러면 에리식톤을 바로 제압해서 토해내게 만들면 되죠?”
“지금 저 상태에서 닿으면 위험하다니까…!”
아인은 영웅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곧바로 바람의 정령화를 시전한 뒤 에리식톤에게 달려들었다. 무른 돌 정도는 깔끔하게 벨 수 있는 날카로운 바람이 그 자리에 퍼부어졌지만, 에리식톤의 머리카락 몇 개만 잘라내는 것으로 끝날 뿐이었다.
예상대로 에리식톤에게까지는 시스템 보정이 적용되질 않았다. 아인은 곤란한 듯 목울림 소리를 내며 근처에 안착했다.
아인이 있는 곳은 에리식톤의 사정거리 안쪽. 그의 눈동자가 뒤룩 구르며 아인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입을 크게 벌려 아인이 있는 공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미친놈아 말은 좀 하고 들어가!!”
뒤늦게 나선 닉이 에리식톤의 뒤통수를 검집으로 강하게 내려쳤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큰 피해는 없었지만 공격 방향이 살짝 뒤틀리며 아인은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아인의 옆으로는 허공을 베어 문 듯한 잇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그 사이로 새까만 심연의 공간이 내비쳐지고 있었다. ‘포식하는 자’이자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이명답게 공간 그 자체를 뜯어먹은 것이다.
방어를 해 봤자 방어구째로 삼켜질 것이다. 아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침을 한번 삼킨 후, 닉에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내 에리식톤이 정면으로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으나, 아인은 공중의 바람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식으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속도만큼은 가장 빠른 바람의 정령인 만큼 회피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했다. 하지만 에리식톤에게 결정타를 먹일 정도의 공격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에르. 너는 내가 타 속성의 정령화를 할 수 있게만 도와줘. 너는 페리스 님을 지켜줘야 해.”
그 말에 에르는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가, 결국 공주님을 안듯 품에 안고 있는 페리스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가 아인에게 있어 어떤 무게감을 가지는지 알기에.
에르는 이후로 화염을 아인의 주변에 두르거나 물보라를 쏘아대는 등, 손쉽게 정령화를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아인은 바닥에 깔린 물을 순식간에 얼려 에리식톤의 몸을 고정시켰다가, 정면으로 새빨간 불꽃을 쏘아대는 등 무지막지한 화력을 쏟아부었다.
보통 사람은커녕 상당한 실력자라도 버텨내지 못했을 공격. 그만큼 아인의 성장 정도가 수직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문제는 상대방이 대륙을 혼란에 몰아넣는 재앙이라는 점이었다.
내뿜는 화염마저 삼켜버린 에리식톤은 입맛을 다시며 가볍게 트림을 했다. 아인은 그 모습을 질린 듯 바라보았다. 무슨 속성의 공격이든 삼켜버리고 어지간한 피해는 통하지도 않거나 곧바로 회복한다. 이 상태로는 어떻게 쓰러트려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무적은 아닐 거야. 반드시 퇴치되어야 하는 재앙인 만큼 공략법은 반드시 존재해.’
하지만 그것을 느긋하게 찾을 시간도 없었다. 닉의 공격은 에리식톤의 공격 방향을 바꾸는 것조차 간신히 하고 있었고, 에리식톤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한번 허공을 깨물 때마다 균열이 일어난 허공에서 불투명한 파편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안쪽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일 것이다.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고 허공의 균열을 바라보던 아인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빡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즉 에리식톤이 무언가를 먹을 것조차 없는 곳.
‘서, 설마 저 안쪽으로 에리식톤하고 같이 들어가서 동귀어진을 해야 하는 건가?’
아인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리자, 닉은 곧바로 아인의 표정을 알아채고 소리를 질렀다.
“뭐 알아냈어? 필요하면 나나 에르한테 빨리 말해!”
“그, 찾기는 했는데… 너무 위험부담이 높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난 죽는 게 문제 안 된다고!! 몰라?! 위험부담이고 뭐고 잘못하면 나도 당하겠다고!!”
그야말로 죽음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카오스의 조각만 할 수 있는 방법. 아인은 안절부절못하며 닉 쪽으로 공격을 변경한 에리식톤을 보며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허공에 난 균열 안쪽으로 에리식톤을 데려가야 해요. 아무것도 먹을 것 없는 곳으로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에리식톤은 폭주한다. 그 폭주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에리식톤을 붙들고 버틸 수만 있다면, 에리식톤은 스스로의 몸을 먹으며 자멸할 것이다.
닉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에리식톤의 손을 잡아챈 뒤 가장 큰 균열 안쪽으로 같이 들어가려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손을 잡아챈 것까진 좋았지만, 에리식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눈을 끔뻑거리며 닉을 가만 쳐다볼 뿐이었다.
“…젠장.”
생각해보니 순순히 에리식톤이 안쪽으로 가 줄 리도 없었나. 닉은 눈을 굴리며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이후 도구라도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신음을 흘렸다.
“언제 이렇게 몰려든 거야?”
사방에는 헤르도아의 언데드들을 모두 제압한 수도의 NPC와 플레이어들이 한데 모여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힘내세요!! 꼭 에리식톤을 물리치고 수도를 구원해주세요!!”
“염치없다는 것은 알지만 한 번만 더 저희를 구해주세요. 남은 것이 당신밖에 없습니다!”
“우라노스가 뿌린 똥 치우시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파이팅!”
“저기 있는 건 영웅 아냐? 미쳤다 둘이 파티 짜고 같이 싸우는 사이였나 봐. 관계케미 오져.”
큰일났다. 닉은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꿈틀거렸지만, 그것이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라고 생각했는지 환호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만큼 닉의 표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관심을 받는 것은 둘째치고, 에리식톤이 균열 쪽으로는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아 ‘도저히 안 되겠다.’라고 포기할 즈음이었다. 이렇게 기대감을 잔뜩 받는 상태에서 물러나기도 뭣했다. 아니, 물러나는 순간 에리식톤의 표적이 저쪽을 향하면 그 순간 학살극의 시작이다.
‘남의 싸움판 구경하지 말고 멀리서 응원이나 하란 말이야. 전부 다 꺼져…!’
하지만 휘몰아치는 에리식톤의 공격에 그렇게 긴 문장을 읊을 시간도 없었다. 방어구 일부가 그대로 씹어 먹히는 순간 닉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에리식톤의 턱을 걷어차며 물러났다.
‘미친 척하고 뜯어먹히면서 균열 안쪽으로 끌고 가야 하나…?’
진지하게 그 생각을 하면서 닉이 에리식톤을 노려보고 있을 무렵-
“어, 어라? 잠깐 멈춰요! 어디 가는 거예요!”
당황스러운 듯 놀란 소리를 내는 아인의 목소리가 짧게 들리나 싶더니
“아주 좋은 타이밍인걸. 이제 여긴 나한테 맡겨.”
지금은 이리저리 흠집이 나고 먼지로 뒤덮인 순백의 갑옷을 입은 영웅이, 에리식톤의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균열 안쪽으로 들어갔다.
“와 미친 희생 플레이 개 멋있네.”
“어차피 사망 페널티 받고 다시 돌아올 거 아냐.”
영웅의 활약에 대해 사방에서 환호성과 함께 찬물을 끼얹는 말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홈페이지에도 이따금 등장하여 게시물이나 덧글을 쓰는 영웅은,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유저에게 플레이어로 인식되고 있었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
“아인? 아인 괜찮아?”
영웅은 PC 아닌 NPC.
한 번 죽는 순간 더 이상 살아나지 못하는 이 세상의 주민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