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9)
19화 : 이름은 에르랍니다!
횡설수설 두서없는 말을 뱉었지만, ‘그것’은 다행스럽게도 아인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자신을 해치진 않을 거라고. 아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묘한 동질감마저 들었다. 과거 때문에 괜히 이입을 해서 그런 걸까. 혼란스러운 생각을 부여잡고 아인은 하던 말을 이었다.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는 뜻이었어요. 엘프도 인간도 아닌 하프엘프임에도 아직 살고 있는 저처럼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발을 붙들고 있던 얼음이 녹았다. 발은 자유로워졌지만, 아인은 뒤로 물러나진 않고 계속해서 눈을 마주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그것’이 눈을 몇번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나와 비슷해.”
“어….”
동질감을 저만 느낀 게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지금 이 존재와 아인의 공통점을 억지로 찾아내봤자, 인간형이라는 것과 자연친화력이 높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데에 있어 혼란을 겪는다. 정도였다.
“네 이름… 뭐야?”
“아인이에요.”
“아인. 내 이름은?”
“음….”
“음… 이야? 내 이름?”
“아뇨! 아니에요! 보통 자기 이름을 물어보진 않아서 생각이 끊겼어요! 시간을 주세요!”
“10년 정도면 돼?”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고요!”
“아무튼 나도 이름을 가지고 싶어. 너처럼….”
아인은 유달리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동질감 때문일까. 아인이 그것에 물어보려는 찰나, 멀리서 라칼의 고함이 들렸다.
“이봐!! 도망쳐!”
뒤늦게 몽환의 정령에게서 깨어난 라칼과 사하바티, 이후프가 급하게 아인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잠깐만요.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아요.”
이후프의 만류에 라칼은 간신히 손톱을 거두었다.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은 당연하게도 여전했지만.
하지만 아인은 더 이상 전투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혼란스러워하다가 지금에서야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용사님은요?”
“어, 나 여기 있어.”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보이질 않으셔서…!”
“응. 별다른 공격을 직접 받은 것도 아니고. 잠깐 숨었다가 일대일 문의 넣은 다음 이런 경우가 있는지 확인하고 왔어.”
“네? 문의요? 이런 경우라 하심은…?”
“처음에 저거 보고 말한 적 있지?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돼. 시스템 에러. 파일 깨진 것 같다고.”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상태. 닉은 ‘저것’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아인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것은 이제야 진정하고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는데,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인의 눈에는, 온갖 사명을 가지고 불멸의 혼을 가진 PC들이 더 이 세상에서 이질적으로 보였다.
온갖 말들이 아인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차마 그것을 뱉진 못하고 꾹꾹 씹어 되삼키고 있는데, 닉의 마지막 말이 결국 아인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문의가 끝나고 잘못됐다고 여겨지면, GM이 없애줄….”
“안 돼요!!”
***
‘그것’이 아인의 고함에 다시 철갑주를 두르는 둥 짧은 소란이 일어났지만, 다시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저기. 당신에게 줄 이름을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잠시 저기서 놀고 있을래요?”
“응….”
‘그것’은 아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쪼그려 앉아 오른손으로 타닥타닥 작은 번개를 만들어 놀기 시작했다.
“아 이거 왠지 아닌 것 같아요. 기분이 이상해요. 아이 가진 적도 없는데 잘못된 부모가 된 기분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인은 숨을 고르고 닉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잘못됐다는 기준이 대체 뭐예요?”
“프로그램… 있어 그런 게. 너희는 말해도 몰라.”
“그냥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저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어요. 퀘스트나 정기점검, 똥겜, 망겜, 망캐, 과몰입충, 겜창, 컨셉충, 시1발….”
“…부정적인 것만 쏙쏙 골라 배웠구나. 내가 반성한다.”
“아무튼요! 이해 못하겠다고요!”
“이건 정말 안 돼. 나도 설명하기 힘든걸. 그냥 어떤 기준이 있고, 그건 우리를 포함해서 누구도 어길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둬.”
아인은 저번 ‘정기점검’중, 혼자 움직이다가 GM들의 시선에 들어 삭제되어버린 누군가를 떠올렸다.
머리가 길었는지 짧았는지, 옷은 무엇을 입었는지, 목소리는 어땠는지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 존재.
그저 점검 중에 행동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이 세상에서 통째로 말소시킨 그들에겐 도저히 좋은 감정이 떠오르질 않았다.
“용사님이 어떻게 못해주세요…?”
“말했잖아. 나도 못 이겨… 어, 문의 답변 왔다. 빠르네. 기다려봐. 읽어줄게.”
일말의 망설임이나 감정도 없이 한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는 자들.
그들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꾸만 나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닉에게서 나오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안녕하세요, 카오스의 조각님. GM 알터하룬입니다. 말씀해주신 문의사항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원활한 진행에 방해가 된 점을 사과드리며, 캡슐의 전원을 껐다 켜보거나 FAQ3번 사항을…….”
닉은 이후로도 알 수 없는 문장을 죽 읊다가, 갑자기 이를 뿌득 갈고 낮게 중얼거렸다.
“이 늉늉 망겜처럼 매크로 답변이나 하고 개늉늉들! 하여간 유저가 늉늉 지 늉늉이여, 늉늉늉들.”
아인은 닉이 ‘망겜’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점. 표정이나 말투를 보아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눈치챌 수 있었다.
물어보니, ‘매크로 답변’이라는 것은 GM측에서 성실하게 답변하지 않았다는 뜻.
“그렇다면 이것도 GM측에서 의도한,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될 평범한 현상이라고 이해해도 되는 걸까요?”
아인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닉에게 물어보니, 다소 애매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만든 기업이 항상 말하는 게, ‘모든 가능성이 존재한다.’이긴 하거든?”
“그러면 우선은 그냥 두는 거죠?”
“두고 말고는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냐? 제압시킨 게 아니라 저게 알아서 멈춘 건데.”
“제 말은 어느 정도 듣는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퀘스트 완료 안됐거든. 아직 폭주 상태 안 풀렸다는 거야.”
“아… 뭔가를… 막아라. 라는 퀘스트였던가요. 이름조차 제대로 인지되지 않는다는.”
아인은 그 순간 ‘저것’의 부탁이 상기되었다.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었지.
“용사님, 혹시 ‘저것’에게 이름을 붙이고 싶다면 어떤게 좋을까요? 계속 그거 저거라고만 부르기도 뭣하잖아요.”
“…에러?”
“앗, 괜찮아 보여요.”
“정말로?”
“둥글둥글 귀여움 발음인걸요? 제가 있던 용병 길드에서 에리라는 애칭을 가진 친구가 있었어요.”
“그게 그렇게 되나? 양심이 좀… 아니다. 그래 마음대로 해.”
아인은 고개를 갸웃였다가, 이내 손가락 칼날로 얼음 조각상을 깎고 있는 ‘그것’에게 다가갔다.
“있죠. 당신 이름을 정했어요.”
“…!”
‘그것’의 눈이 약간 커지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의 정령이 일으키는 듯한 청명한 바람. 은은한 치유의 기운이 들어갔는지 몸에 활력도 샘솟았다.
“에러… 아니, 이게 더 귀엽겠다. 에르. 어때요?”
“에르?”
표정의 변화가 없어 정말로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파악이 힘들었다. 하지만 싫어한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 이름을 받아준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즈음, 닉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게 되네.”
“잘 됐어요?”
제 물음에 닉은 저와 ‘그것’. 아니, 에르를 한 번씩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 갱신됐어. 에르의 폭주를 멈춰라. 퀘스트 완료.”
***
아인과 닉의 설명을 들은 라칼은 아직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얌전한 얼굴로 뒤에서 서 있기만 하는 에르를 보곤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팩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난리를 치던 녀석이 갑자기 이러니 투쟁심이 확 가라앉는군. 위험하지 않다는 건 확실한가?”
“네. 카오스의 조각만이 아는 거라 자세하게 설명하진 못해도요.”
사하바티는 어쨌든 그도 정령이니 더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고, 이후프는 애초부터 싸움을 꺼려했으니 싸우자는 의견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남은 것은 한 명뿐. 하지만 이실라는 아까부터 에르의 광역공격 이후 보이질 않았다.
아인이 덜컥 걱정이 되어 이실라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새 나무에서 내려왔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잠깐! 설명할 게 많긴 하지만! 제 말을 들어보세요! 지금은 싸우지 않아도 돼요!”
“구태여 길게 말할 필요는 없다. 듣고 있었어. 전투에 빠져있던 내가 할 말은 없지.”
이실라는 에르를 힐끔 보았으나 경계 차원에서라도 활을 들지 않았고, 소환해 두었던 제피로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기절해있던 게 아니라면 아까 에르와 한 대화도 들었던 건가…? 하프엘프란 것도 말해버렸는데.’
아인은 이실라가 당장 이곳을 나가라고 소리치는 것까지 각오를 했지만, 에르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한번 시선을 두고 말 뿐이었다.
“전투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겠어. 하지만 그것에게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에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리고 아직 불안한 상태라 함부로 자극하진 말아주세요.”
“내가 알아서 하겠다. 허튼짓은 하지 않겠다 약속하지.”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사무적인 분위기.
감정 때문에 상황을 그르칠 것 같지도 않아, 아인은 몸을 조금 비켜 에르와 마주할 수 있게 섰다.
에르는 이실라를 보더니 흠칫하고 다시 아인의 뒤로 숨으려는 양 몸을 움츠렸다. 이 중에서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준 유일한 상대라 껄끄럽다는 양.
이실라는 자신을 꺼려한다는 것을 눈치챈 뒤, 그 이상 앞으로 다가오진 않고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정령들을 타락시킨 원인이 너인가?”
“다른 정령들이 나와 접촉해서 변한 기억은 없어.”
“이쪽에서 정령들의 변질이 확실하게 확인됐다. 지금으로서는 이레귤러인 너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
“오히려 나는 막는 쪽이었어….”
“막는 쪽?”
“불안한 기운의 상대들. 싸우고 이기긴 했어. 두고 보자느니 동료들을 데리고 올 거라느니 말하긴 했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이겼어.”
전형적인 악당 대사네. 닉의 중얼거림에 아인은 불안감이 커졌다.
일행 하나하나가 상당한 실력자임에도 합세하여 에르를 상대하는데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한번 격퇴당한 만큼 실력이 낮다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헤르도아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
아인과 라칼이 에르와 싸운 상대의 정체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닉이 아인의 어깨를 톡톡 치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상의하는 건 좋은데 잠깐 얘 좀 봐.”
“네?”
닉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곳엔 에르가 더 이상 말을 않고 허리를 굽힌 채 아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의도를 파악하느라 잠시 끙끙 앓고 있자니, 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에 반려동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말하는데, 저건 칭찬해달라는 뜻이야.”
“함부로 동물취급해도 되는 거 맞나요?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긴 하지만.”
일단 아인은 그 말대로 에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며 ‘이겨서 잘했다’라고 몇번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자 에르는 손길을 조금 받고 있다가, 별 말 없이 허리를 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아인이 닉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확인 차 눈짓을 하자,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걔랑 너랑 둘 다 귀여움 받는 컨셉이라도, 설정 겹침이라 느껴지진 않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다는 건 알겠네요.”
그나저나 정령의 타락을 에르가 벌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렇다고 누명을 벗을 확실한 근거도 없어 고민이 되었다. 이대로 마을에 간다면 계속해서 경계를 받을 것이다.
“하다못해 에르가 같이 오기라도 하면 모를 텐데….”
“…응?”
“왜 그러세요 용사님? 또 퀘스트가 왔나요?”
“아니. 지금 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
말이 이해되질 않아 아인이 옆을 돌아봤더니, 무감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에르와 눈을 마주쳤다.
“…?”
“….”
“따라올… 거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