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 인정
정령왕들의 말에 GM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 정령도 아니고 정령왕이 한 말이라면 실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GM의 시선이 우라노스 쪽을 향하자,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표정에는 이럴 리가 없다는 듯한 불신과 절망이 그득했다.
“나는. 나는 이 게임 플레이어고. 돈을 쏟아부었고. 랭킹 1위라고. 꼴아박은 돈이 얼마인지 알아? 너희, 너희가. GM이 이러는게 말이 돼? 데이터 쪼가리들 말보다 날 우선해야 하잖아!”
“일개 직원인 저는 매뉴얼대로 진행합니다. 카오스 내에서는 언제나 시스템이 우선입니다.”
우라노스는 말은 이제 처절한 절규에 가까웠다. 하지만 GM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다. 그는 우라노스에게도 위치 고정을 시킨 채, 허공을 휘저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저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신용하고 거기에 맞춥니다. 거짓 간파 시스템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오류가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추구 계정 제재에 대한 안내를….”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을 것 같아? 정식으로 항의하고 고소하겠다. 운영진은 물론이고 사측까지 한 번에. 일개 직원인 네가 그걸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사장의 귀에 들어갈 텐데!”
그 말에 GM은 손가락을 멈추고 우라노스를 가만 쳐다보았다. 이것이 효력이 있다 생각한 것인지 우라노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후 관련하여 더 협박을 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지만, 음성 시스템을 뮤트한 GM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사장입니다.”
그리고 일개 직원이기도 하죠. 멍한 얼굴의 우라노스가 무언가 소리쳤으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이내 그 몸도 점차 움직이지 않는지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졌다. 계정 제재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GM은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튕기기 직전 우라노스를 보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는 너도 데이터 쪼가리라는 걸 명심해야지. 내 입장에선 네가 악성코드야.”
그와 동시에 딱 하는 소리가 울리고 우라노스는 강제 로그아웃되었다. 그 모습을 보던 마라는 주먹을 쥐고 몸을 바르르 떨더니, 팔을 위로 치켜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싸!! 드디어 조졌다 이 늉늉늉늉! 언제 정지 처먹나 했네! 너도 살다 보니 쓸 데가 있구나!”
“쪽지 같은 걸 남기지 말고 귓속말로 하면 안 되는 거냐?”
“나 너 친구 차단해서 못해. 그리고 쪽지가 낭만도 있고, 뭣보다 딱 좋은 타이밍이었잖아?”
더 말을 해 봤자다. 그렇게 판단한 GM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닉 모하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라노스는 불법 프로그램 사용 및 무단 데이터 조작으로 영구정지 및 법적으로도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그로 인해 생긴 피해가 있다면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저야 이렇다 할 피해는 본 적이 없지만, 이 마을이 문제인데요.”
닉은 그 말을 하며 주변을 훑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널브러진 마을은 제 기능조차 힘들 것이다. 닉의 시선에 따라 마을을 한번 둘러본 GM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우라노스가 입혔다고 생각되는 피해는 롤백해 놓겠습니다.”
“걔 혼자 마을을 이 늉늉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아 욕 죄송. 아무튼 그 정도라면야.”
사실 마을 말고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닉은 눈동자만 옮겨 아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쟤도 문제이므로 같이 영구정지 시키겠습니다.’라는 말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오류 데이터 하나를 더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닉은 불안한 촉이 정확하게 들어맞자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인은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임을 깨닫고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일순간 들었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고민을 하는 사이에 GM은 이미 아인의 지척에 선 뒤였다.
“상태창. 데이터 확인.”
그 말과 함께 GM은 아인의 데이터를 구석구석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끝까지 데이터를 확인한 GM은 한쪽 눈썹을 올리고는 눈을 끔뻑였다.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아인이 그저 공포에 떨고 있자, 닉이 아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잠시만요. 얘는 지금까지 별다른 사고를 치지도 않았고 세계에 큰 영향을 주… 긴 했지만 그게 부정적인 영향은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영향이면 좋은 영향이지.”
그 말에 GM은 아인의 앞을 막고 있는 닉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증거.”
닉은 다시 욕이 나올 만한 것을 참고 숨을 한 번 삼켰다. 곁에 있던 마라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툴툴거렸다.
“진짜야. 우리 길드에 파시에라고 있는데, 헤르도아였다가 지금은 멀쩡하게….”
“지금 데려와. 나 시간 없으니까.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내놓으면 믿겠다.”
마라는 앞에서 욕설을 퍼부었고 GM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 상태로 가면 아인이 좋지 못한 꼴을 보일 것 같아 모두 긴장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던 찰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혹시 모험가분들이시면, 저희 좀 도와주세요. 다들 위험한 상태인 것 같아서….”
모두의 시선이 그쪽에 쏠렸다. 그곳엔 어린 하이엘프 한 명이, 강한 기운을 풍기는 일행들을 두려운 얼굴로 마주하면서도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미 죽은 분들도 계시고… 치료하지 않으면 곧 돌아가실 분들도 많아요. 크게 다쳤어요. 제발요. 저, 저 혼자만 다들 지켜주셔서 멀쩡한데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이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말하던 중, 아인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 옛날에 도와주신 분 아니세요? 불치병 때문에 엄마도 포기했을 때….”
그 말에 아인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아!’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분명 그런 적이 있었다. 설정 프로그램 개입이라는 능력 자체도 얻은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만났던 아이.
불치병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죽을 ‘설정’을 가졌던 하이엘프, 에일리 하프리안.
그때는 설정 스크립트 변경을 통해 ‘불치병’을 ‘난치병’으로 바꾸고 최소한 죽지 않을 정도로만 설정해 놓았다. 새로운 마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목숨만 부지할 거라는 투로.
“그, 그 이후로 카오스의 조각들 덕분에 마법이 조금 발전하기도 해서 몸이 회복됐어요. 그래서 이제 혼자 열매도 따고 숲도 나가고 그랬어요….”
그리고 에일리는 굳이 따지면 일종의 오류 데이터나 다름없었다.
아무렇게나 설정이 바뀌고, 기존에 있었던 퀘스트가 변경되고,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가는. 분명 지금 에일리의 상태창을 확인하면, 데이터 일부가 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에일리는 포악해 보인다거나, 세상에 위협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단지 위험에 빠진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며 도와줄 모험가들을 찾는 용감하고 착한 아이로 살아갈 뿐이었다.
아인은 입을 벙긋하더니 콧잔등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 무언가는 제자리지만 무언가는 변한다. 당연하게도.
그때 옆에 있었던 닉도, 찡그리듯 웃으며 에일리와 아인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마지막으로 GM 쪽을 바라보며 턱을 까딱였다. 네가 원하는 증거가 저기에 있다는 양.
GM은 여전히 차분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허공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읊조리더니, 에일리를 바라보며 아까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체 롤백… 아니, 치료를 마쳤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대부분 돌아올 거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듯 마을 곳곳에서 의문의 소리나 신음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 몇몇 이들은 우라노스가 아닌 다른 프로토게노이의 길드원에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부상이 남아 있을 터였다.
마라가 의외라는 얼굴로 GM을 바라보고, 그는 비키라는 양 닉을 보며 손짓했다. 닉은 잠시 고민하다가 상황이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슬쩍 자리를 옮겼다.
“용사님 저 지켜주세요!! 저 죽어요!!! 데이터 삭제 당해요!!!! 으엄마야아아아!!!!!”
“너 얘에 대한 신뢰감이 어지간히도 바닥을 쳤구나.”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GM은 아인의 데이터를 삭제하지도 제재를 가하지도 않았다.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해야 하는지, 완전히 뒤틀렸다고 해야 할지.”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정상이면 정상이고 뒤틀리면 뒤틀린 거지….”
“네 데이터는 지금 플레이어와 거의 다를 바 없이 설정되어 있어. 부분부분 이상한 점이 있긴 한데 트집 잡기도 애매한 정도로. 보면서도 내가 잘못 보고 있나 싶었다.”
그 말에 아인은 입을 벌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확인하기 위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자, GM이 덤덤하게 말을 덧붙였다.
“최소한 이 세상은, 너를 어떤 방향으로든 인정했다는 거다.”
아인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으로 무언가 끓어올랐다. 말하고 싶은 게 많았으나 한꺼번에 응축된 그것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퀘스트는 완료되지 않았다. 그것은 닉 모하지만큼은 아직 아인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절반은 응어리가 풀린 기분이라, 아인은 깊게 숨을 뱉었다. 그 모습을 가만 쳐다보던 GM은 몸을 돌렸다.
“난 이 세상의 시스템을 신용하고, 시스템이 인정한 데이터에 더 손을 댈 이유는 없지. 여기서의 용건도 다 끝난 것 같으니까 이만 가 보겠다.”
그는 발을 옮기다가 에일리와 마주치고,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GM은 한 번 눈을 깜빡이더니 그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첫인상과는 확실히 다르다. 닉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마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스템이니 뭐니 딱딱한 말만 하길래 개꼰대일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 도와달라고 순순히 도와줄 줄은 몰랐다. NPC 무시하고 지 할 말만 계속할 줄.”
“쟤 졸라 오타쿠 새끼야. 카오스 개 좋아하고 재밌어 보이는 건 다 건들거든. 그리고~ NPC도 이 세상이 만든 것이자 시스템의 일부라는 핑계로 한껏 과몰입 할 핑계가 되거든.”
그런 거냐고. 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애매하게 웃었다. 아인 역시 한 시름을 놓은 얼굴로 한숨을 푹 쉬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 실리본 님을 잊고 있었어요!”
“일찍도 기억하는군.”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울렸다. 그곳에는 실리본이 이실라를 옆에 대동하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우라노스가 아닌 이에게 당했다면 이미 부상으로 죽었을 시간이다. 어찌 됐든 너희들이 해결할 줄은 알고 있었다만.”
여전히 틱틱대고 신경질적인 목소리. 이실라는 아인을 보며 작게 눈인사를 한 후,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죽기 직전에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조금 울기도 하시고 약 스무 명의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시긴 했지만 마지막에는 분명 아인과 닉 당신이 무언가를 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긴 했습니다.”
“입 좀 제발 다물어.”
“네.”
“지금 다물어봤자 아무 소용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