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문을 읊는 순간 아인의 몸 전체가 깨끗한 물로 변화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하급 정령 몇 개만 간신히 쓸 수 있던 아인이 정령화를 사용하는 모습에 가트는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 반응을 다했다.
“불의 하급 정령 소환했다가 마구간 다 태워 먹고 손들고 있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엄청 오래거든요! 되게 오래됐거든요!”
아인은 숨을 고른 뒤 자신이 들고 있는 엘퀴네스의 눈물을 품에 안고 그대로 흡수를 시작했다. 보석이 가지고 있는 힘이 몸 안에 완전히 스며들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치료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인은 살아 움직이는 엘퀴네스의 눈물 그 자체였다. 힘과 마나가 허락하는 한, 정령화가 지속되는 시간만큼은 대륙 최고의 치료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인은 조심스레 가트의 환부에 손을 대기 위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물의 정령 상태인 아인의 손이 닿자 붕대는 풀리는 게 아니라 축축해지기만 했다.
“…….”
“……”
아인은 잔잔해진 얼굴로 자신의 손과 가트의 붕대를 번갈아 보더니,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닉을 쳐다보았다.
“용사님 진짜 죄송한데 가트 님 붕대만 풀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꼴값을 떨어라 진짜. 폼을 잡으려면 준비 미리 해 놓고 시작하란 말이야.”
“폼 잡으려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어찌됐든 도움을 받아 붕대를 풀어내는 것에 성공한 아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가트의 팔에 손을 대었다. 저주의 여파로 팔은 처음 보았던 것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로 오염되어 있었다.
[저주를 치료하시겠습니까?]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에 아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가트의 팔에 있는 거무죽죽한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아인의 팔에 물들어 옮겨가기 시작했다.
저주를 다 치료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참기 힘든 격통이 느껴졌다. 당장 손을 떼어낸 뒤 비명을 지르고 싶으면서도, 오랜 시간 동안 이 통증을 묵묵하게 버텨온 가트를 생각하면 엄살을 부리기 싫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비명을 삼킨다.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트의 팔에 있던 거뭇한 흔적들은 모두 깔끔하게 치료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인의 두 팔도 연못에 물감을 쏟은 것처럼 탁하고 검은빛을 띄었다.
[가트의 몸에 있던 저주가 완전히 치료됩니다. 새로이 옮겨진 저주가 활성화를 준비합니다.]아인은 격통에 초점이 흐려지고 머리가 몽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저주는 다시 자신에게 옮겨져 새로이 몸을 오염시킬 것이다.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차린 후 바닥을 크게 굴렀다. 이전에 트로웰에게서 들었던 방법을 사용할 차례였다.
-땅의 정령은 헤르도아의 저주에 어떤 효과도 받지 않아. 참고해두면 좋을 거야.-
대륙전쟁 당시 골렘들은 헤르도아의 저주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선봉장에 섰고, 상당수의 저주를 아무런 해악 없이 받아내면서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후프 역시 이전 헤르도아의 거점을 습격할 당시 저주를 끼얹었음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정령화.”
돌로 이루어진 바닥부터 시작해 아인의 몸 전체가 액체에서 고체로 변하고 있었다. 새까맣게 물들어 있던 두 팔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에는 마치 장갑이라도 낀 듯한 모습이었다.
오염물들은 자신이 있는 몸의 성질이 바뀌어버리자, 당황한 듯 단단한 바위 팔 위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팔 전체를 감싸기도 하고, 한 군데를 파고들려는 듯 작은 점으로 변화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이것도 멀쩡한 게 아니라 아프긴 엄청 아프잖아…!!’
오히려 격통 자체는 물의 정령일 때보다도 심한 것 같았다. 눈이 핑핑 돌던 아인이 결국 참다못해 신음을 흘리려는 찰나, 결국 몸에 파고들 방법을 찾지 못한 새까만 오염물들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팔 아래로 빠져나와 바닥에 작은 웅덩이처럼 고여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아인은, 불의 하급 정령을 소환하고는 작은 새의 형상을 띄고 있는 정령을 품 안에 쥐었다. 그리고 정리를 하기 위해 눈을 감고 읊조렸다.
“정령화.”
이번엔 아인의 몸 전체가 불꽃으로 변했다. 가트가 ‘여기서 불을 내면 마구간 정도로 끝나질 않는데.’라고 중얼거리자, 아인은 금방 끝날 거라고 웃으며 검은 웅덩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불꽃이 느리고 넓게 피어올랐다. 바닥 전체를 감싸기 시작한 불꽃은 웅덩이처럼 깔려 있는 오염물질을 태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독한 물질을 머금고 있었는지, 고통스러운 듯 꿈틀대며 타오르는 그것은 매캐하고 진득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우 냄새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냄새날 줄은 몰랐어요!”
마지막으로 바람의 정령화를 한 아인은 방 안에 있는 연기와 냄새를 뺀 후에야 한숨을 쉬며 본래 상태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가트는 멀쩡한 자신의 몸이 어색한지 몇 번 팔을 돌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티가 나진 않지만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에 미미하게나마 어려 있었다.
“이제 하루 200번밖에 하지 못하던 팔굽혀펴기를 1000번씩 할 수 있겠군.”
“제발 안정을 취하시란 말이에요!! 당신 환자였다고!!”
“그 정도는 숨쉬기 운동 같은 게 아니냐. 완전한 안정을 취하고 있었으니 걱정 마라.”
안정을 일반인 기준에 맞추란 말이에요. 아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트를 노려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쉬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깔끔하게 치료된 팔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 대륙을 돌아다니며 방법을 찾고, 재앙을 쓰러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고난들을 이겨내며 얻어낸 결과물. 당연하지만 폭죽 세례라든지 환호성 같은 것은 없었다. 치료되고, 몸이 회복되고, 소중한 사람이 돌아오고. 그것으로 끝. 물론 마지막 하나면 충분했지만.
“뭔가 허무해요. 물론 엘퀴네스의 눈물을 얻으려고 엄청나게 고생을 하긴 했지만.”
“뭐든지 결과 자체보다는 결과를 이룩하기 위한 과정과, 후속 대처가 더 중요한 법이다. 그러면 이제 페리스를 찾는 일만 남았군. 도통 수소문을 해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가트의 말에 아인은 크게 어깨를 흠칫했다. 페리스는 지금 에르의 정령술에 의해 의식을 잃은 채, 영웅과 같이 헌터 길드의 숙소에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오스에게서 데이터 리셋이라는 운명에 놓여 있는 반 시한부적 존재이기도 했다.
페리스의 데이터 리셋은 또 어떻게 막아야 하지. 아인이 다소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가트는 커다란 손으로 아인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그 녀석 실력에 어디서 눈먼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진 않았을 테니.”
“그렇긴 하죠. 워낙에 강한 분이었고… 그만큼 제멋대로인 경향도 있으셨지만….”
아인은 입꼬리를 애매하게 올린 채 적당히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와 오랜 시간을 지냈던 가트는 아인이 무언가를 숨기고 싶다는 표정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인에게 직접 물어서는 수상한 티를 잔뜩 내면서도 잘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가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타깃을 바꿔 근처 의자에 앉아 있던 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알고 있나? 이제 페리스만 찾을 수 있으면 다 끝나는데 말이지.”
“페리스요? 그 사람….”
닉은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방을 얘기하려다가, 입을 다물라는 아인의 필사적인 제스처에 입을 벙긋했다. 하지만 가트의 표정을 보면 대강은 눈치를 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히 숨겨봤자 귀찮아질 것이라 판단한 닉은 서슴없이 말을 이었다.
“헤르도아에 완전히 귀의했어요. 지금은 행방불명된 상태. 몇 번 싸우기도 했고.”
“으아아악!! 으아악!!”
생각보다도 너무 많은 것을 뱉어버린 닉을 보며 아인이 고함을 질렀지만, 가트는 딱히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닉 역시 의자 등받이에 턱을 올려놓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내가 대륙 퀘스트로 페리스 잡아 오라고 했었잖아. 이 사람이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고.”
대륙 퀘스트는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자격을 갖춘 NPC에게도 공통적으로 주어진다. 가트는 허무한 표정으로 멍때리고 있는 아인에게 가볍게 꿀밤을 먹이며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켰다.
“근데 아인 기절했는데요.”
“아차. 몸이 나아버려서 힘 조절에 실패했군.”
뇌진탕 직전까지 갔던 아인은 닉이 뺨을 쳐 준 덕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가트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가트는 딱히 아인에게 무어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페리스를 걱정할까 봐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거냐?”
“…아무래도요. 몸도 안 좋은데 나쁜 소식까지 들으면 상태가 더 바닥을 칠 거 아니에요.”
“분명 좋은 소식은 아니지. 하지만 몸 상태를 악화시킬 정도로 최악은 아니야.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다. 오히려 생각보다도 덜 날뛰어줘서 안심이라고 해야 할까.”
예상보다도 덤덤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차갑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둘의 사이가 무엇보다도 각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인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헤르도아에 귀의했는데도요? 원망하거나… 그러지 않으세요?”
“아인, 우리는 용병이다. 선악에 구애받지 않아. 원하는 길과 신념을 관철하다 보니 우연히 이 길이었던 거지. 특히나 페리스는 그런 틀 안에 갇히는 것을 더욱 싫어하는 놈이었으니까.”
베어야 하는 이가 헤르도아였기에 영웅이 되었을 뿐이다. 가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대상이 바뀐다면, 그는 언제라도 구국의 영웅에서 최악의 재앙으로도 변절할 수 있었다. 그의 검은 사회적인 정의가 아닌 오로지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만 휘둘러진다.
“무슨 이유로든 헤르도아에 귀의한 것은 그의 의지이기에 마땅히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의 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어떠한 변호도 해 주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요. 그래도 동료였는데도.”
완전한 신뢰, 혹은 완전한 방임. 하지만 붙잡아놓으려 한들 페리스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성격적으로나 실력적으로나. 가트는 일찍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만나면 누구보다 반겨줄 것이다. 그럼에도 헤르도아로서 무고한 이들을 해치는 등 죄악을 저질렀다면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만 할 터. 그 둘은 별개로 봐야 해.”
가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페리스에게 있어 둘도 없는 동료였으나, 정반대인 성향으로 인해 유일한 억제자로도 이름 높은 가트였다. 아인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향했다.
“…페리스 님이 만일 기억을 잃어서, 헤르도아는 물론 최근에 있던 일을 아무것도 모르면요? 그, 그냥 단순한 가정이에요. 혹시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요. 막아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아인의 말에 가트는 잠시 얼굴을 마주하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땐, 그것을 페리스가 감내해야 할 벌이라고 생각해야겠지. 나로서는 페리스가 멀쩡하게 돌아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그리고 그건 페리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 자존심 강한 녀석이 헤르도아에 들어갔다는 건, 마지막에 공멸을 염두에 두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