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 어쩔 수 없이
이후로 시간이 지나 카오스가 말했던 일주일이 다가오는 중이었고, 아인에게는 또 한 가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이기도 한 영웅의 안위에 대한 것.
이대로라면 영웅은 반드시 데이터 삭제를 당한다. 세상에 이름은 남게 되겠지만 데이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심지어 이것은 영웅이 원하던 수순이기도 했다.
때문에 영웅은 아인이 분주하게 노력하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도움을 주지 않았다. 간간이 원망과 짜증을 담아 말을 걸 때도 약간의 답조차 거부했다.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라는 양.
“미리 익숙해져. 불치병 걸려서 시한부 둔 사람 같은 거야. 소용없어.”
“저 얼마 전에 불치병 걸린 사람 치료하고 왔거든요? 힘 떨어지게 할 거면 조용히 하세요.”
영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닉도 무언가 얻어올 것이 있다면서 로그인을 하는 시간이 꽤 적어진 상태였다. 가끔은 하루 종일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인이 닉의 방 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자, 마라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역시 네가 아들을 안 낳아서 버려진 거라니까?”
“한 번만 헛소리 더 하시면 이 숙소에서 그냥 나갈래요.”
“알았어. 진정해! 바람의 정령화 하지 마! 닉도 이제 얼마 안 지나서 올 거야. 내가 알아.”
“용사님이 요즘에 자료 구하신다고 자꾸 나가시던데. 그것도 뭔지 알고 계세요…?”
아인의 말에 마라는 움찔하더니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아인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어지간하면 시원시원하게 답하거나 장난을 치는 마라였기에 그런 반응은 의외였다. 아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용사님이 나쁜 짓 하는 중인 건 아니죠?”
“아냐! 그건 아냐. 불법적인 그런 건… 아닐걸? 큰오빠가 허락하면 되는 거고. 응.”
카오스의 조각들이 하는 일이었기에 아인으로서는 짐작도 되질 않았다. 좀 더 꼬치꼬치 캐물어볼까 하던 중, 뒤편에서 닉 모하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둘 다 내 방 앞에서 뭐하냐? 작당 모의하는 것도 아니고.”
“오셨어요? 그냥… 용사님이 요즘에 잘 안 들르셔서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 하고….”
“카오스 측이랑 우라노스 측이랑 법적 공방을 시작한 것 같아서 거기 증인으로 나서는 것 때문에… 젠장 벌써 피곤해지네. 그리고 조르고 졸라서 너랑 하이엘프 NPC 복사본 얻어냈어.”
“제 데이터… 복사본이요?”
닉의 말에 아인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데이터 복사본을 그대로 얻어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인가.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는 아인에게 닉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걔랑 너는 엄마랑 자식이니까 너랑 데이터 구조는 거의 똑같을 거야. 그러면 영웅의 데이터를 네 데이터랑 비슷하게 만들어버려. 넌 이제 오류 데이터가 아니니 오류 데이터이자 영웅이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 아냐? 카오스가 말했었던 조건에도 안 벗어나.”
“그…그러면 괜찮을까요? 제거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밑져야 본전… 밑지면 안 되지 제기랄. 아무튼 될 거라고 믿어.”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에 아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점점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마라는 그 옆에서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 말없이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
약속했던 때가 되었다. 숙소 뒤쪽에 있는 넓은 공터에서, 에르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페리스를 내려 놓았다. 그 뒤로 영웅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왔다. 무거운 갑옷도 모두 벗어던진 그녀는 투구도 쓰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영웅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 모두와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이 삶과 세상에 조금의 미련도 남기기 싫다는 것처럼. 아인은 그런 영웅을 복잡한 눈으로 계속 노려보다가 결국 시선을 돌렸다.
“임시 점검! 임시 점검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모든 카오스의 조각들은 안전한 곳에서 로그아웃을 하고, NPC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임시 점검이 진행될 예정….”
점검을 알리는 NPC가 부리나케 돌아다니며 외치고 있었다. 공지에서는 오류를 고치기 위한 일시적인 점검이라 알렸다. 물론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영웅이라는 오류 데이터를 삭제하는 것도 오류를 고치는 것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점검이 시작되었다. 모든 PC가 사라지고, 모든 NPC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오류 데이터만을 제외하고. 운영진에게서 일시적으로 GM 권한을 부여받은 마라와 닉 모하지는 로그아웃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아인과 영웅 옆에 긴장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데 너는 왜 임시 GM을 받은 거야? 나는 따로 부탁했다곤 하지만.”
“큰오빠한테 부탁해서 잠깐 권력 남용 좀 부려봤어. 나는 트레일러 영상 스킵도 안 하고 다 꼼꼼하게 보는데, 이런 하이라이트 장면을 놓칠 리가 없잖아. 옆에서 구경만 할게.”
“이거 진짜 적폐 아니야? 우라노스보다 네가 더 심각한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냐?”
닉은 마라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아인과 영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웅은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자리에 주저앉아선 고개를 푹 숙인 채였고, 아인은 설정 프로그램 개입을 통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건드리고 있었다.
사소한 투닥거림이 일 즈음-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거대한 압박감이 일기 시작했다.
이제는 반갑기까지 할 정도로 익숙해진 감각. 개중 누구도 미동 없이 한 명의 존재가 나타나길 기다렸고, 이에 응하듯 하늘에서 검은 포탈 하나가 생기더니 그곳에서 카오스가 나타났다.
“약속했던 때가 되었다 아인. 다행히 잊어버린 채 지낸 건 아닌 모양이군.”
“그걸 어떻게 잊어요. 뻔뻔한 건지 둔감한 건지.”
아인은 시선을 힐긋 돌리며 작게 투덜거렸고, 카오스는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는 페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NPC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완전히 멈춰 있을 것이지만, 데이터가 일그러져 일종의 오류 데이터가 된 그였기에 천천히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페리스는 어떻게 하기로 했지? 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나?”
“…데이터 리셋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당신이 만족할 만한 방법을 찾지도 못할 것 같고.”
“옳은 판단이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인사는 했나?”
“할 예정이에요. 작별 인사 말고, 첫 인사요.”
카오스는 말없이 아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페리스에게 다가갔다. 아인은 불안해지는 호흡을 고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니 당장이라도 카오스를 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아인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카오스는 어떤 방해도 없이 페리스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짧게 중얼거렸다.
“설정 프로그램 개입.”
이후 카오스는 페리스의 데이터를 마지막으로 훑었다. 변화가 있을까 싶었지만 예상대로 이리저리 뒤틀리고 제멋대로 변경된 스크립트가 알 수 없는 글자로 도배된 채였다.
아주 약간의 공백. 얼굴을 다 덮은 카오스의 새까만 투구에서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한 박자 늦게 짧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리셋.”
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페리스의 몸이 조금씩 움찔거리는 듯하더니, 오래지 않아 잠잠해졌다. 외관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내면은 이제 아인이 알던 것과 딴판일 것이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처음 만났던 페리스의 모습 그대로일 터였다.
페리스의 데이터는 이제 정상화되었을 것이다. 아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만 기억하고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정상’이 된 것이다.
결국 끝까지 참고 있던 아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삼스레 자신의 상태에 대해 짜증이 났지만 이제 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숨을 고르고 눈가를 훔친 뒤 아인은 간신히 호흡을 진정시켰다. 열 오른 숨이 길게 쏟아졌다.
이후 몇 번 더 몸을 움찔거리던 페리스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눈동자에는 의문과 당황스러움이 그득하게 묻어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기본 설정은 시골구석에서 용병 길드장을 하고 있다는 설정이고, 그것이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지척에 서 있는 새까만 갑옷의 존재는 물론, 닉이나 아인까지 모두가 낯설고 새로운 사람들일 것이다. 페리스의 눈썹이 좁혀지며 경계심이 어렸다.
“당신들은 누구야? 헤르도아의 끄나풀… 은 아닌 것 같은데. 난 왜 이런 곳에 자빠진 거지.”
그래야만 했을 텐데. 페리스는 익숙하게 자신의 검을 찾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다가, 아인에게서 시선이 딱 멈추었다. 아인은 몸을 흠칫하다가 애매하게 웃음을 지었다.
“처음 보는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특히 그 바보 같은 웃음 말이야. 너. 이름이 뭐야?”
“네? 저… 저는 아인이라고 하는데요.”
페리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무언가를 곱씹듯 아인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입에서 굴리더니, 허리춤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천천히 떼어내었다.
“아인이었지. 맞아. 내 정신이 왜 이러냐. 미안해. 잊어버릴 걸 잊어버려야지. 가트는 어디 있어? 여기 에스텔인 것 같은데. 너는 왜 질질 짜고 있고… 나 혹시 술 마시고 사고 쳤니?”
분명히 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을 아는 것처럼 굴고 있다. 아인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분명히 카오스가 리셋이라고 하는 걸 똑똑히 들었는데.
페리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릴 무렵, 옆에 있던 카오스가 짧게 한숨 소리를 내더니 페리스를 툭 건드리고 다시금 짧은 단어를 중얼거렸다.
“강제 중지.”
그와 동시에 페리스의 몸이 완전히 멈춰버렸다. 아인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카오스와 페리스를 번갈아 보자, 카오스는 오해하지 말라는 양 아인을 힐긋 보았다.
“리셋은 이루어졌다. 그건 틀림없어.”
“그러면 왜…? 분명히 저를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요. 초기 설정이 그렇진 않을 것 아니에요.”
“여전히 오류 데이터인 상태인 모양이다. 애초에 이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정상은 아닐 테니.”
한 번 깨진 데이터는 기존으로 되돌리려 해 봤자 쉽사리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그 잔여물이 남는다. 그리고 이 경우 그 잔여물은 아인이었을 것이다.
아인은 밝은 얼굴을 지으려다가, 고쳐지지 않는 오류 데이터라고 페리스에게 삭제 조치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인이 불안한 눈을 굴리자, 카오스는 페리스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사소한 오류일 뿐이고, 영향력을 생각해서 굳이 삭제하진 않겠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 덧붙이듯 중얼거리는 말에 아인은 다시금 그렁거리기 시작하는 눈가를 훔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스는 돌린 발걸음을 영웅 쪽으로 향하며 변함없이 덤덤하고 싸늘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페리스는 이걸로 정리된 건가. 남은 건 영웅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