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 로그인
“나는 장식품 같은 건 별 상관 안 하겠다만, 그렇게 커다란 걸 이 안에 어떻게 넣으려는 건가. 네가 말하는 정도의 크기라면 현관문도 통과 못 할 거라고! 부숴서 가져와 조립하려는 거냐?!”
“그러니까 현관문 크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니까.”
닉은 곧바로 하우징 관리 모드로 변경한 뒤, 이번에 업데이트된 신규 장식품 하나를 거실에 떨구었다. 별안간 공중에서 툭 떨어진 장식품을 멍하니 보던 라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질 않는군. 마법이라고 하면 차라리 이해라도 하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래도. 사하바티랑 이후프는 어디 갔어?”
“사하바티는 목재 의자를 보러 가고, 이후프는 울타리에 쓰일 돌들을 보러 갔다.”
“뭐라 할 건 아닌데 각각 그 소재 보러 가니까 되게 기분이 묘해지는 거 알지.”
이전에 기반만 마련해두었던 집은 점점 기틀을 다져가고 있었다. 여섯 명 정도는 충분히 같이 살아도 될 정도의 크기였고, 온갖 퀘스트 보상으로 재화도 넉넉했다. 게다가 황궁을 재건한 뒤 따로 닉을 부른 황제 역시 그녀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네가 카오스의 조각이긴 하지만 예외적인 사항도 있는 법이니, 제국과 더 나아가 이 대륙을 지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지. 물론 카오스의 조각이긴 하지만, 신뢰할 수 있어. 카오스의 조각이라도 모두가 배신하는 법은 아니겠지.”
‘쿨한 척만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카오스의 조각한테 불신감이 졸라게 쌓였나 본데….’
우라노스에게 그렇게나 배신을 당한 이상 이해는 하지만. 닉은 PC 얘기가 나올 때마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황제를 회상하며 애매하게 웃었다.
그래도 황제의 지원 덕분에 재료 문제로 잡퀘 노가다를 할 일은 없었다. 물론 여러 무구를 만드는 데 쓰라고 준 철을 집안 장식품이나 식기 만드는 데 사용하고는 있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장식품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라칼이 진중한 얼굴로 닉을 보았다.
“그나저나, 최근 헤르도아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나?”
“걔들이 정상적인 행보를 보인 적도 없지만. 이번엔 또 왜?”
닉은 그 말에 벌써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지대한 타격을 받긴 했어도 여전히 악의 축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헤르도아는 최근 새로운 재앙을 깨우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자주 마주쳤던 헤르도아의 고위 사제는, 최근 아인을 칭송하며 그를 헤르도아의 사도로서 추앙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라칼은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 말대로다. ‘정상적인’ 행보를 보여서 문제라는 것이지.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어. 평소에 입던 검붉은 로브에서 흰 로브로 바꾸는가 하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선행을 저지르고 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길이 없어. 조만간 큰일이 하나 벌어질 것 같다.”
닉은 처음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오늘의 날짜를 계산하던 그녀는 짧은 침음을 흘리며 볼을 긁적였다.
“만우절 이벤트 준비하는 것 같은데.”
“만우절이라니. 그게 뭐냐? 헤르도아에게만 있는 의식? 아니면 헤르도아 교주의 기념일?”
“틀렸어. 카오스의 조각들만 아는 건데… 뭐라고 해야 하나 거짓말을 해도 허용되는 날?”
“세계가 거짓으로 뒤덮여 가짜가 판치는 날이라니. 주변에 있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겠군.”
“틀린 말은 아니다만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무법지대처럼 되잖아. 그 정돈 아니야. 며칠 지나면 헤르도아도 평소처럼 악의 축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 젠장 이것도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근래 들어 카오스는 다양한 업데이트와 스토리 진행을 통해 유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었다.
특히 잘 드러나지 않았던 다양한 종족들을 비추어주며 그들이 가진 이야기를 퀘스트로 내놓았고, NPC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도도 서서히 바뀌어 가는 추세였다.
퀘스트를 수행하며 NPC들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들 중에서는 이 세상 안에서만큼은 NPC들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대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도 조금씩 나오는 중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오글거린다느니 과몰입 그만하라느니 하는 의견이 강세였지만, 그런 생각이 나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앞으로의 인식을 천천히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닉은 그렇게 믿었다.
그때 가구를 사러 나갔던 사하바티와 이후프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의자를 산다고 했던 사하바티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모양의 의자가 보이질 않았단다. 그래서 직접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알아서 만들겠다면야 상관은 없는데. 의자로 만들 원목은 사 오지 그랬어?”
“아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원목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리고 사하바티는 자신의 팔을 뚝 부러뜨렸다.
“이러면 재료비 절감도 되고 좋을 것 같지 않니.”
“미치겠네 진짜. 돈 줄 테니까 원목 사와. 팔 부러뜨려 만든 의자를 찝찝해서 어떻게 앉냐고!”
“그것도 걱정하지 말렴. 팔만 아니라 다리랑 얼굴도 부러뜨릴 거라서.”
“그 부분이 문제가 아니야! 더 심각해졌잖아! 만들지 마! 목 슬슬 건드리지 마!!”
핸드메이드 의자(feat.사하바티의 사지)를 간신히 말린 닉은 진이 다 빠진 얼굴로 바닥에 드러누웠고, 이후프는 시원스레 웃는 소리를 내더니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울타리 쪽은 다 골랐어요. 제 몸을 부수진 않을 테니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젠장, 너무도 당연한 말을 들어서 감동을 받다니. 뭔가 잘못됐어… 무슨 재료 쓰려고?”
“골렘의 파편이요. 아아 잠깐. 너도 사하바티랑 똑같다는 눈으로 보진 마세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사망한 골렘의 몸은 좋은 재료로 쓰이곤 하니까요.”
굉장히 오묘한 눈으로 이후프를 보던 닉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 얼마 전까지 그 재료 싫어하던 입장이었잖아.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거야?”
“생각해 봤는데, 나만 알고 있는데 남들더러 왜 내 심정을 모르냐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서요.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고요. 만나는 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로 만족 중이에요.”
종족이 모두 말살당한 라칼, 고향이 오염됐던 사하바티, 잊혀진 골렘들의 명예를 좇던 이후프는 사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끊임없이 분노하고, 상처를 끌어안은 채 과거에 얽매이고, 남아있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생각하며 제대로 된 목적지도 없이 대륙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것에 매몰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새로운 것들을 찾기로 마음을 바꾸었고, 그 결과가 머물 수 있고 돌아올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것.
‘설정이 바뀐 건가?’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닉 모하지는 상대의 설정 스크립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딱 한 명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위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급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긴급소식! 에르가 드디어 내 말에 대답이란 걸 해 줬다!!”
이전에 영웅이라 불렸던 이. 지금은 ‘이안’이라는 새 이름을 가진 하이엘프는, 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진 굴러 떨어지다시피 1층에 도착한 후 눈을 반짝였다.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말만 하라고 하니까 꺼지라고 했어! 사이 좋아진 거 맞겠지?!”
글쎄다. 닉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아인이 영웅 대신 로그아웃을 하고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에르는 한동안 방황하고 영웅과 마주치면 곧바로 살기를 흩뿌리곤 했었다.
살아갈 의미도 잃은 양 멍하니 있던 에르는 그나마 최근에 ‘아인을 찾는다.’라는 목표를 새로 가질 수 있었다. 왠지 아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 물론 아인의 기척이 느껴진다고 할 때마다 주변에 있던 것이 영웅이라서 착각으로 끝나는 경우가 부기지수.
다만 이따금 제멋대로 놀러 오곤 하는 아네모이는, 장난을 치는 건지 진심인지 모를 투로 정말로 아인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진다면서 닉에게 말하곤 했다.
“네가 눈치채면 정말로 가까이에 있는 거야. 그땐 꼭 아인 찾아줘야 해?”
그러니까 그 눈치를 어떻게 채냐고. 닉은 입을 삐죽 내민 채 다시 장식품의 위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후보지로 남은 두 장소 중 한 곳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장식품을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던 중, 바깥에서 별안간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30분 후 업데이트가 진행 예정입니다! 모든 카오스의 조각들은 패치 전에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 로그아웃을 하고, NPC들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30분 후면… 그냥 여기서 하우징 다 끝나고 나서 직전에 나가야지.’
그 안에는 결정하겠지. 닉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금 하우징 관리 모드로 인테리어 배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커스터마이징을 하는 데도 하루 종일 걸리는 마당에, 하우징 디자인은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다. 특히 이렇게 눈에 띄는 장식품을 전시할 때라면.
30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30분이 모두 흘렀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이번에는 장식품의 각도 때문에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걸로 고민할 때는 저 부르셨어야죠.”
“마라 너 진짜 여기 멋대로 들락날락하지 말라고 했…어?”
플레이어적 고민에 참견하는 것은 마라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그녀라고 생각하던 닉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주위의 풍경에 입을 다물고 의문스러운 소리를 냈다.
모든 NPC들이 멈춰 있었다. 창밖으로도 돌아다니는 플레이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즉 업데이트가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은 여기 그대로 있는 것인가. 지난번에 카오스가 그랬던 것처럼 임시 권한이라도 주지 않으면 강제로 로그아웃이 될 텐데. 오류라도 생긴 것인가 고민하던 닉은, 품 안에서 미미한 바람이 일렁이는 것을 느끼고는 안에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이건….”
아주 오래전, 아네모이에게 받았던 한 쌍의 귀걸이. 아인이 하나를 몸에 흡수했으나 자신은 영구적 페널티를 받기가 꺼려져 착용하지 않은 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네가 눈치채면 그땐 정말로 가까이에 있는 거야.-
불현듯 이전에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아네모이의 숨결은 무언가에 반응하듯 더욱 상쾌한 바람을 주변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카오스가요, 플레이어 캐릭터랑 운영진 캐릭터는 또 성격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세상에 있어도 문제없을 거래요.”
연녹빛의 날개를 살랑이면서,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한 명이 있었다. 단정한 금발에 순박한 미소. 짧고 뾰족한 귀. 꽤 멋들어진 아바타를 착용한 하프엘프.
“대신 같이 이벤트니 뭐니 이것저것 잡일 떠맡게 되는 바람에 비 로그인 상태에서 가끔 지켜만 봤는데….”
아인은 뒷짐을 지고는 헤실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시간 나서 로그인 허락 받았거든요.”
닉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천진하기 짝이 없는 녹색 눈동자를 보다가, 픽 웃어버렸다. 큰 감정의 폭은 없다. 뒤늦은 원망이나 걱정을 하기엔 사실 감정도 꽤 추슬렀고. 아인도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늦게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 것처럼. 아인이 가장 좋아하던 태도로, 닉은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옅게 웃기만 했다.
“다녀왔냐.”
“다녀왔어요.”
@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