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22)
22화 : PC와 NPC
사방에 거대한 마력이 퍼져나갔다.
일대가 눈도 뜨기 힘든 거대한 빛에 휩싸이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순식간에 공간이 암전됐다.
분명 눈을 떴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어딘가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이건 아인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당황한 기색의 목소리가 역력했다.
“이게 뭐지?”
“아무것도 안 보여.”
“뭐야, 렉인가?”
“환경설정은 뜨는데. 잠깐. 상태이상이야!”
카오스의 조각들이 사용하던 단어가 아인의 귓가에 들어왔다.
엘프 레인저중에는 PC가 없었으니 확실히 헤르도아의 사제 중에 그들이 섞여있다고 볼 수 있었다.
“에, 에르. 지금 뭘 한 거예요?”
“쾅.”
“그건 알겠는데. 어두워진 건 안 돌아와요? 이대로라면 저희도 위험….”
“곧 돌아와. 이건 숨긴 것뿐이야.”
뭘 안 보이게요?
아인이 그것을 물어보려는 순간, 빛과 어둠이 폭사했던 곳에서 재차 마나가 일렁였다.
직후 무언가가 사방으로 쏘아지고 수 십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계속 이어졌고, 비명은 줄어들지 않으며 급하게 방어하려는 듯한 목소리도 울렸다.
“뼈방패를 세워! 당하기만 하진, 으악!”
“아 이 미친… 이런 마법은 아직 못 들어봤는데. 얼음인가? 화살?”
“지금 이게 무슨 공격인지도 모르겠어. 맞서려 해도 아무것도 안 보여…!”
“무서워… 이게 뭐야. 게임에서 이렇게까지 당하기는 싫, 아악!!”
실제 시간은 5분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아인에게조차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멈추지 않는 일방적인 폭력을 맞이하며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아인은 저를 따라다니는 존재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새삼스레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양날의 검 수준이 아니었다. 언제 발동될지 모르는 봉인된 시한마법진이 그나마 엇비슷한 비유였다.
시간이 지나고, 완전히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공간에 차차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실라를 포함한 엘프 레인저들은 완전히 질려버린 얼굴이었고, 닉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기서 다 끝나는 거 아니냐’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본래 규모 파악만 하고 시간을 끌다가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본대를 거의 다 처리해버린 것 같았다.
“진심 밸붕인데.”
“좋은 말이에요?”
“그게 우리한테 있으면 좋아.”
헤르도아의 사제들은 대부분이 강한 열로 인해 화상을 입거나, 썩어가는 몸을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크아악. 아… 아파. 아파… 민감도 설정 너무 높게 해 놨어 제기랄!”
“이런 엘프 마법이나 정령술은 들어보지도 못했어! 홈페이지에도 인벤에도 이런 정보는 없었는데?”
개중엔 날카로운 철창이나 얼음송곳으로 몸이 꿰뚫린 이들도 상당수였는데, 꿈틀대지도 않는 것을 보면 즉사한 것으로 보였다.
아인도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감이 잡히지 않는 와중,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일으킨 장본인인 에르와, 어찌저찌 공격을 막은 헤르도아의 사제 몇 명 정도.
그들은 이중에서도 지휘관급 역할을 하고 있는지, 마나와 불온함의 밀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듣던 대로군요. 혼돈의 정령이라 불릴 만한 이 강함… 그리고 정령술의 종류.”
“…어째 목소리가 익숙한데.”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니, 저번에 에스텔로 진입하기 전 용사님과 조우했던 헤르도아의 사제가 이곳에 있었다.
그는 쓰러진 사제들엔 일절 관심조차 없다는 듯 무감한 얼굴로 주위를 훑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이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탁하고 죽어가는 눈빛이 뒤룩거리며 닉을 향했다.
“다시 만나네요. 카오스의 조각. 아니… 용사.”
“으!”
싫어하는 것을 너무 노골적으로 티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이유가 있다고 아인은 인정했다.
“이번에도 당신이 이 사태를 계획한 건가요?”
“아니.”
“대단해요. 비록 정예 사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쓸 만한 이들… 게다가 PC까지 상당수 섞어서 이곳에 보냈는데. 다음엔 더 준비해서 와야겠네요.”
“진짜 너는 남의 말 좀 듣는 습관 좀 길러라… 그리고 걔들을 여기에 채용한 게 잘못이지. 사람 죽는 거에 면역이 있는 플레이어도 드물 텐데.”
아인은 처음 만나고 쥐를 없애는 퀘스트를 받았을 때, 몽둥이로 몇 마리를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구역질을 하던 닉을 떠올렸다.
의외로 PC들은 그 쪽으로는 민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모르는 헤르도아의 사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다음으로 아인의 뒤에 있는 에르를 바라보았다.
“혼돈의 정령이시여.”
“나는 혼돈의 정령이 아니라 에르야.”
“그새 이름이 붙여졌나요? 귀엽긴 하지만 당신같이 위대한 존재에겐 어울리지 않네요.”
사제는 옅게 웃음을 흘리며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분명히 전력의 대부분이 당한 상태임에도, 그렇게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불길함이 느껴졌다.
사제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탁한 마나가 거대한 웅덩이처럼 바닥을 매우고, 그 안에 들어찬 사제들이 회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던 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이는 점점 본래의 팔을 되찾고
쇠송곳에 몸 곳곳이 관통당했던 이가 한번 몸을 흠칫하더니 몸을 일으켜 제 몸에 박힌 송곳을 빼냈다.
“마, 말도 안 돼.”
헤르도아같은 흑마법사들이 치료 마법을 배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치료는 물의 정령술과 신성마법이 유명한데, 흑마법과 상극인 헤르도아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불안한 예감이 아인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려 할 즈음, 이만한 마력을 사용하고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은 헤르도아의 사제가 두 팔을 옆으로 펼쳤다.
“당신은 그곳에 있을 그릇이 아니에요! 어서 이곳으로. 당신이 진정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는 장소로.”
“….”
“정의되지 못하는 존재. 언제나 혼돈을 몸 안에 품고 다니는 당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곳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할 일을 알려주겠습니다.”
그의 말에 에르는 혼란스러워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다양한 정령의 속성과 성격을 하나의 몸에 두고 다니는 에르에겐, 자신의 정체성과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은 아인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얽매일 필요가 없다’라고 설득하고 이름을 붙여줘 진정을 시키긴 했지만,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닐뿐더러, 티만 내지 않을 뿐 아직도 생각이 복잡할 것은 자명했다.
“어서 이곳으로! 모두가 좋아할 겁니다. 나약한 인간들은 거대한 힘이 자신에게 들이닥치지 않을까 무서워하지만 저희는 아니기 때문에. 강인하고 영원한 혼돈의 아이들은 두 손을 벌려 당신을 환영하고 숭배….”
“아닌 것 같은데.”
사제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던 중, 닉의 목소리가 맥을 끊듯 툭 뱉어졌다. 닉은 인상을 찌푸리는 헤르도아의 사제를 마주보다가, 그 뒤를 가리켰다.
“말했지. PC들 채용한게 잘못이라고.”
닉이 가리킨 곳에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며 에르를 겁에 질린 눈으로 보는 사제들이 있었다.
“설정도 적당히 중2틱하고 멋져 보이겠다. 그쪽으로 몸담은 플레이어들이 꽤 있긴 할 텐데… 그것도 잠깐이야. 손해볼 것 같으면 우르르 빠져나가고, 좀 무서워진다 싶으면 또 다른 곳으로 가버릴걸. 라이트 게이머는 물론이고 효율충인 게이머들은 더하지.”
“지금 무슨 알 수 없는 소리를…!”
헤르도아의 사제가 언성을 높이는 순간, 카오스의 조각으로 보이는 헤르도아의 사제 한 명이 뒤로 슬슬 물러났다.
“대륙의 주류가 된다고 해서 왔더니만, 지금 보니까 패널티도 장난 아니게 크고… 괜히 들어왔어. 캐삭하거나 초기화하든가 해야지.”
“아 님 저랑 같이 할래요?”
“뭐, 뭐하는거야! 자랑스러운 혼돈의 아이들아. 겨우 이까짓 전투 한 번에 꼬리를 말고…!”
그들을 시작으로 헤르도아의 사제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미동 없이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자들은 본래 사제였지만, 2~3할 정도의 PC들이 자신들끼리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목소리 깔고 말하는 것도 좀 어려워가지고.”
“광신도 흉내 내는 것도 일이라서. 가끔 부끄러워. 사실 항상 부끄러워.”
“캐시샵에 평판이랑 사명 초기화 세트 할인중이에요.”
“와 장사하는 것 좀 봐. 이런 거 예상하고 만든 건가봐.”
닉은 ‘과대평가하지 말랬지?’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아인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실라와 레인저들은 눈을 깜빡이다가, 헤르도아 측에서 혼란이 일기 시작하자 정령술을 입힌 활을 당겨 앞에 나선 사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만 집중적으로 공격해!”
바람을 입혀 회전력과 관통력을 극단적으로 높인 화살, 새빨갛게 달구어진 채 주변에 작은 불씨를 흘리는 화살, 방패를 의식하여 활촉에 단단한 돌을 입혀 둔기처럼 만들어낸 화살.
이실라의 신호와 함께 수많은 속성 화살들이 헤르도아의 사제에게 쏟아졌고, 그는 뼈방패로 급하게 자신을 보호했으나 상당수의 공격을 허용해버렸다.
그의 어깨가 꿰뚫리고, 치이익거리며 살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둔기 같은 화살에 직격한 뼈 방패는 얼마 가지 않아 부서져 내렸다.
“… 아무래도, 그쪽은 나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아.”
에르의 덤덤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쐐기가 박혔다.
내부분열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지휘관마저 심각한 부상을 입자, 남아 있는 헤르도아의 사제들은 스크롤 하나를 꺼내들어 북 찢었다.
그와 동시에 사제들의 밑으로 대규모 이동 술식 마법이 생겼다.
레인저들이 마법이나 화살을 이용하여 이동을 끊어보려 했지만, 방어막에 막히기도 하고 이실라가 차라리 더 방해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만일 그들이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면, 이중 몇몇은 사망하거나 심한 부상을 입을 가능성을 염두한 모양이었다.
아까까지 여유로운 태도로 용사님을 대하고, 에르를 설득하려던 헤르도아의 사제가 마법진을 통해 사라지기 전 이를 뿌득뿌득 가는 모습이 보였다.
“좀… 무서운데요. 다음엔 곧바로 공격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떻게 이 선에서 바로 막을 수 있었네.”
“그러게요. 에르하고 용사님 덕분이에요.”
“아니 나는 딱히 한 게 없긴 한데….”
닉이 멋쩍은 얼굴로 뒷목을 긁적이던 차에, 헤르도아의 사제 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불렀다.
“거기. 님. 용사인가? 님이요.”
PC로 보이는 그 사제는 닉과 에르를 한번 번갈아 보았다.
“직접 데리고 다니는 것 같진 않아서 유저신고는 안했는데, 그거. 핵이나 버그로 보이거든요. 매너플레이 해주세요. 문의로 버그리포트는 보낼 거예요.”
남은 사제는 그 말만 한 뒤 마법진을 통해 사라졌고, 그 말을 들은 용사님은 애매한 얼굴로 에르를 보았다.
“오해할 만하지.”
“저번에 용사님이 문의했을 때 매크로 답변이 왔다고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요?”
“뭐랄까. 사실 괜찮은 건 아니야. 일처리를 안 하니까 어영부영 넘어간 거지.”
“…그러면 일처리가 되고, 그 핵이나 오류라는게 진짜면요?”
“뭐겠어.”
그 물음에 닉은 아인을 힐끔 보았고,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전에 말한 것처럼. 지엠 와서 확인한 다음 삭제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