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23)
23화 : 가장 오래된 지팡이
마을로 돌아가는 길. 이실라는 바쁘게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을 마을에 ‘우리 선에서 격퇴했다’라는 사실을 수긍시키기 위해 온갖 힘을 쓰고 있었다.
다른 레인저들은 티는 나지 않아도 각기 다른 반응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지금의 사태를 얼떨떨해하고, 누군가는 에르를 동경하고, 누군가는 에르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인은 헤르도아 측에 있던 PC의 말과, 닉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데리고 다니는 그거. 핵이나 버그로 보이거든요.’
‘지엠 와서 확인한 다음 삭제되겠지.’
아인의 표정이 어지간히 나빴는지, 닉이 살며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거나. 답도 없다거나. 그렇게 느껴지진 않으니까.”
“저는 좀 그렇게 느꼈는데요.”
“사실 나도.”
“거기서 수긍하시면 어떡해요!”
“미안. 그런데 그냥 걔들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그런 걸 수도 있어. 유저들이 얼마나 속이 좁은데.”
“맞아요. 용사님만 봐도….”
“나를 보고 수긍하면 어떡해.”
실없는 소리나 심드렁한 말로 분위기를 깨기도 했지만, 닉이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아인에게는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아인도 가능한 웃어보려 했지만, 자꾸만 생각이 그 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용사님, 저나 에르가 뭐 크게 잘못한건 없죠?”
“크게 잘못한 건… 없지?”
“그런데 왜 삭제되느니 마니. 있어선 되니 안 되니 하는 말을 들어야 해요?”
아인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에르나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으면 모르겠다.
이 세상에는 당장 전 대륙을 수라장으로 만들려는 헤르도아의 사제들부터, 차원의 틈에서 중간계의 전복을 노리는 악마들. 그 외에도 차마 입에 담기에도 께름칙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넘쳐나는데 왜 하필 자신들이.
‘지금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다’
제대로 생각도 나지 않는 과거. 누군가에게 들었던 단호한 목소리.
아인을 서풍의 숲 밖으로 내쳤던 결정이 불현듯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건데요.”
아인의 말에 닉은 난감한 기색을 보이다가 입을 다물고 마을로 가는 걸음을 빠르게 했다.
아인도 마냥 기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닉도 모르는 것이 있고 상위 존재가 있다는 것도 안다.
단순한 화풀이이고 고집이라는 것도 알지만, 때론 의지하고 싶은 존재가 필요했다.
용병 길드에 있을 때는 부길드장과 길드장이 그 역할을 해주었지만 지금은 없다.
‘용사님은. 용사잖아요. 그러니까.’
이후 닉도 아인도 그 이상으로는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
“이실라. 보고는 잘 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 보내줘 고맙다.”
“네.”
“하지만 ‘쾅 하니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헤르도아의 대부분이 썩거나 꿰뚫린 채 궤멸 상태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해.”
“역시 쾅에 느낌표가 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문제였니?”
엘프 마을에 도착하고, 높은 인물로 보이는 한 엘프가 이실라의 보고를 들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실라의 보고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어떻게 묘사해야할지 난감한 것도 사실이었다.
심지어 사용된 것들이 마법이 아닌 정령술인데, 빛이나 어둠. 질병에 관련된 정령은 알고 있는 이들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이실라와 상사가 보고서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던 사이, 라칼과 이후프, 어느새 잘 자라난 사하바티가 아인과 닉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너희들이 모조리 해치워버렸다고 들었다. 정말 너무하는군. 전투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아하하… 죄송해요. 에르가 생각보다도 더 강해서요.”
“이번에야말로 내 활약을 보여 이름을 알려줄 기회가 있나 했는데.”
“….”
“무사히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조금 쉬고 있어요. 보고를 받은 이후로 여기도 꽤 시끄러워진 것 같으니까.”
라칼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고민하던 중 가장 상식적인 인사를 건넨 이후프에게 마음의 안정을 느끼며, 아인은 근처의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 사이에 닉은 남은 퀘스트 목록을 확인하겠다며 허공을 훑던 중, 종이 하나를 북 뜯더니 그곳에 무언가를 슥슥 적기 시작했다.
“뭐하세요…?”
“퀘스트 정리. 너도 한번 확인해봐. 파티원이니까 숙지해놓으면 좋잖아. 너하고 관련된 것도 좀 있고.”
닉은 그 말을 하고는 목록을 다 적은 종이를 아인에게 주었다.
그곳에는 ‘퀘스트’가 있었고, 말마따나 아인과 관련되어 보이는 항목도 상당수가 보였다.
첫 번째. 이렇다 할 목적은 적혀있지 않은 ‘용사의 길’ 퀘스트.
두 번째. 부길드장님과 길드장님에게 받은, 아인을 굳세게 키워야 한다는 육성 퀘스트.
세 번째. 에스텔 앞에서 헤르도아에게 찍혔을 때 받았던 ‘헤르도아’ 퀘스트.
네 번째. 데이드완에게 받은, 타락한 정령과 정체불명의 정령에 대해 알아내는 ‘서풍의 숲’퀘스트.
다섯 번째. 제 부모와 관련된 ‘하프엘프’ 퀘스트.
그리고 여섯 번째 항목이 숫자만 있고 비워져 있었다.
“이건 뭐예요?”
“나도 잘 모르겠어. 예전에 네가 궁상떨고 있을 때 받은 연계 퀘스트야. 너하고 관련된 것 같은데, 내용 확인이 안 되고 있거든.”
“…?”
닉도 모르면 아인이 알 도리가 없다. 서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용을 고민하고 있던 사이, 이실라가 보고를 간신히 끝마쳤는지 닉과 아인 쪽으로 다가오더니 뒤쪽을 엄지로 가리켰다.
“둘. ‘푸른 지팡이’께서 보자고 하신다. 조용히 따라오도록.”
“…그분이 직접요?”
이실라가 말하는 ‘푸른 지팡이’란, 서풍의 숲의 수장이자 위대한 하이엘프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는 존재.
하이엘프치고는 매우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헤르도아와의 전쟁을 포함하여 역사에 굵직한 흔적으로 남은 자. 최근에 일어난 모든 중요 사건에 최소 한 문장 이상의 역할을 뽐낸 존재였다.
다만 일전에 헤르도아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헤르도아의 교주와 벌였던 마지막 전투에서 커다란 부상을 당해 지금은 일선에선 물러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물러났다 한들 지금까지 한 활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지간한 마법사나 정령사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의 실력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용사님도 이 분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응. 유명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거든. 실리본이었나. 성이 없는데 이 엘프도 평민이야?”
“귀족은 아니긴 한데… 자신의 출생에 의의를 두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이라고 보시면 된답니다. 장생종들의 지도자들 중에선 이런 사람들이 꽤 많아요.”
“자기 이름이 곧 상징이라는 건가.”
“맞아요. 그리고 ‘푸른 지팡이’말고도 수많은 호칭이 그 앞에 붙어있을 테니까요.”
아인이 아는 실리본의 이명만 해도 아주 많았다. ‘고귀한 거목’, ‘숲의 현자’, ‘삼중마법영창자’, ‘가장 맑은 물의 친구’ 그 외 등등…
이명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해선 안 되지만, 하나의 이명은 그 사람의 상징이 될 정도로 뛰어난 실적을 쌓아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인은 살아있는 전설과 다름없는 실리본을 만난다는 것에 긴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라든지, 괴짜 성향이라는 소문도 한 몫을 했지만…
‘저를 버린 것도 결국 실리본의 결정이었을 테니까요.’
폐쇄성이 짙은 만큼 서로에 대한 유대감도 확실한 엘프의 사회. 적어도 서풍의 숲 내에선 남몰래 아이를 유기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호기심 많고 순수한 존재를 좋아하는 정령들은 아이를 금방 눈치채고, 아이의 울음이든 입이 가벼운 바람의 정령이든 그들의 행방을 소문처럼 퍼트릴 테니까 말이다.
“이실라 님. 혹시 실리본님이 저희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있나요?”
“내가 그분의 속을 어떻게 알겠나. 아마도 너희가 데리고 다니는 정령이 헤르도아를 단숨에 물리쳤다는 정보에 대한 거겠지. 불 물 바람 땅의 정령을 제외한 다른 속성의 정령은 우리뿐만 아니라 실리본님도 다루지 못하는 것이니까. 단순한 학문적인 호기심일 이유도 배제할 순 없겠지. 하지만 역시 추측일 뿐이니 묻지 마라.”
“…굉장히 많이 알려주셨는데요?”
조금 멍한 기분이 되어, 아인은 시험 삼아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그분도 4원소 이외의 정령은 다루지 못하셨나 봐요. 실리본님이면 다를 줄 알았는데.”
“너희가 알 필요 없다. 그분이 헤르도아와의 혈전 이후 전투력 증강을 위해 고서에서 발췌한 흔적을 가지고 몇몇 정령의 소환의식을 거듭했다, 이해하기 힘든 신계의 언어를 듣고 좌절하여 이후로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다.”
“이거 기밀 아니에요?”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피어날 지경이었다.
이후로도 아인은 실리본이 있는 나무 앞까지 향하면서 비슷한 대화로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자질구레한 정보도 꽤 많았지만…
봉인된 숲에 있던 수상한 정령의 정체는 에르지만, 분명히 변질된 정령이 몇몇 있으며 그것이 헤르도아의 짓이라 추측된다는 점.
이곳에 오기 위해선 첫 번째로 중급정령 이상의 존재가 흑심을 가지고 있진 않은지 판별해야 하는데, 헤르도아같은 존재가 어떻게 그것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그 두 가지가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했다. 후자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번과 같은 침공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에르와 같은 변칙적인 존재가 이쪽을 도와줄 가능성도 없다.
모든 질문이 끝나고 가장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저번에 아인을 경계하고 들여보내주지 않았던 경비병이 이번에는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서풍의 숲을 도와줘서 고맙다.”
딱 한 마디만을 들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아인은 만족했다.
자존심 강한 하이엘프가 인간으로 여겨지는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부터 많은 것을 굽혔다고 볼 수 있으니까.
내부는 에스텔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무로 된 가구들이 곳곳에 있고. 수많은 하급 정령들이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아인과 에르를 힐긋힐긋 바라보았는데,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에르가 손가락을 아래위로 까딱이곤 아인과 엘프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보는 거 싫어? 치울까?”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전에 말했던 것처럼 최대한 제 옆에만 있어주시면 감사드려요.”
“응.”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해줄래요?’ 라고 말하는 순간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적재적소에서 힘을 쓰는 방법도 알아야 할 텐데. 그것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고민을 하던 사이에, 이실라는 어느 문 앞에 서고는 아인 일행을 바라보았다.
“도착했다. 조금 기다려.”
수수한 나무문은 조금 작았는데, 이실라는 문 앞에 서고는 손끝에 마나를 집중시킨 뒤 일정한 간격으로 문을 툭툭 두드렸다.
노크이자, 일종의 암호. 암호를 입력하는 시간은 꽤 길었는데, 이실라가 마지막으로 문을 손바닥으로 누르자 안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작은 나무문이 약한 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열렸다.
그 안은 문만 봐서는 예상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방이 펼쳐져 있었는데, 다양한 연구를 위한 재료와 자재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깨끗한 물과 오염된 물, 끝없이 불타고 있는 돌, 작은 모래산, 실시간으로 자라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꽃들.
어느 병 안에는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든 강렬한 발광체가 있었고, 반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짙은 그림자가 든 것도 있었다.
실리본으로 추정되는 젊은 엘프는, 증기가 담긴 병을 흔들다가 아인과 에르를 보았다.
“왔나.”
짙은 파란색 머리는 한번 묶었음에도 종아리까지 내려오고, 상대방을 꿰뚫을 것만 같은 보라색 눈과 날카로운 눈매는 그에게 농담으로라도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걸 보면 일부러 겁을 주려는 것도 아닌데, 단지 그의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마나의 농도만으로 아인의 몸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낼 정도였다.
이실라는 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더 이상 대화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듯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 남은 것은 넷. 실리본과 닉, 에르, 아인.
“자질구레한 절차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데.”
그는 보라색 연기가 든 병을 한번 흔들고 내려놓더니, 아인과 에르를 한번 쳐다보았다.
“우선, 헤르도아의 침공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막아준 것에 대해선 감사를 표하마. 이건 후일 따로 보상을 줄 것이고. 내가 너희를 부른 공식적인 이유가 될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공식적인 이유라 하심은?”
“내가 너희를 부른 진짜 이유는 비공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
실리본은 쿠션을 깔아놓은 커다란 의자에 눕듯이 앉았다. 그러고는 낮게 목소리를 깔며 차근차근. 느릿하게 자신의 앞에 선 이들을 훑고 입을 열었다.
“반갑다. 카오스의 조각. 이레귤러. 그리고… 오류 데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