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24)
24화 : 살아있는 이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나? 내가 그걸 알면 안 된다는 것 마냥.”
실리본의 말에, 닉은 얼굴을 구기고 아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눈길을 준 것으로 판단하자면, 실리본이 말하는 카오스의 조각이란 닉을. 이레귤러는 에르를. 오류 데이터는 아인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카오스의 조각들이 쓰는 것 같은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 실리본에게도 많은 카오스의 조각들이 오고갔다는 걸까…?’
아인도 닉과 함께 지내다보니 ‘환경설정’이라든지 ‘퀘스트’같은 말의 쓰임새는 알게 되었다.
때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닉의 반응은 아인의 그것보다도 훨씬 극적이었다.
“미친 거 아냐…? 당신이 그런 단어를 왜 사용해?”
“왜. 라고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사용하기엔 역시 껄끄러운 것이었나 보군.”
“그야 당연하지. NPC가 왜… 아니 이것도 이스터에그나 이벤트인가? 너 메타캐야?”
“이스터에그. 메타캐. 그건 또 처음 들어보는 단어군. 참고하겠네.”
“나 같은 애들… 그러니까 PC들 만난 적 있어?”
“없네.”
“없다고?”
닉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단순히 강자를 앞에 두었을 때 나타나는 두려움보다는, 기괴함이나 께름칙한 것을 마주했을 때 보이는 표정에 가까웠다.
리치를 마주했을 때, 헤르도아에게 공격당할 때, 에르를 보았을 때. 그 어떤 때보다도 닉의 진짜 감정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었다.
실리본은 그런 닉을 보며 의미모를 미소를 옅게 흘리다가, 이번엔 아인과 에르 쪽을 보았다.
“오류 데이터의 의미를 아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정도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닉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에 의존하여 띄엄띄엄 대답하니, 실리본은 턱을 매만지며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 만족스럽진 않군. 오 할… 아니, 삼 할 정도만 맞았다.”
“그러면 실리본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현자’라고도 일컬어지는 실리본은, 진리의 탐구와 실험에 대한 열정으로도 이름난 학자이자 연구자이기도 했다.
이실라에게서 들었듯, 전승으로만 일컬어지는 정령들을 직접 소환해보려고 온갖 시도를 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학구열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
말이 쉬워서 이론을 실제로 구현한다는 것이지, 중간계에 나온 적이 없는 정령을 소환한다는 것은 일반인에겐 상상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실리본이라면, 정령들의 이상행동 이전에도 카오스의 조각 출연부터 많은 관심을 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카오스의 조각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틀에서 벗어난 이들. 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난 존재. 세상의 빈틈에서 태어난 아이들.”
“네… 네?”
어려웠다.
아인은 이래서 학자들을 대하기가 무서웠다. 자기만 아는 단어들을 술술 불어놓고는 나중에 알아채보라고 말하곤 했다.
“이해하지 못했나? 간단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알아듣지 못한 것은 카오스의 조각인 닉도 마찬가지였는지, 실리본은 머리를 싸맨 끝에 최대한 쉽게 풀어 다시 설명해 주었다.
“PC들이 ‘우리가 아는 규칙’에서 벗어났다면, 오류 데이터인 너희는 ‘세계에 통용되는 불변의 법칙’에서 벗어났다는 거다.”
죽어도 계속해서 살아나는 불멸의 육체. 알수 없는 신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등, 이 세상의 우리가 보기에는 카오스의 조각들이 이해할 수 없고 모든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어떠한 이유로 세상에게는 에르와 아인이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것.
“그 이유가 뭔지는 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확인한 것은… 이 세계의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를 살피려 하거나 소환하려 한다면 ‘시스템 에러’라든지 ‘오류 데이터’라는 신탁 같은 목소리가 울린다는 것.”
“…그런데 실리본님은 그걸 어떻게 아신 건가요?”
카오스의 조각인 닉이 로그아웃을 할 때만 제외하고 항상 붙어 다니고 있는 아인도 몇 가지 용어만을 간신히 알아챘을 뿐이었다.
그들을 만나본 적도 없다는 실리본이 그런 말은 어디서 알았고, 알았다 한들 저렇게 확신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인의 질문에 실리본은 짧게 웃는 듯 하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뚝 그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쪽으로 향했다.
“성공했다.”
“네?”
“나는 성공했단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정령의 소환의식을.”
“네? 하지만 이실라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실리본은 책상을 한 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인 뒤 한숨 같은 웃음을 뚝뚝 끊으며 뱉어냈다.
그것은 탄식처럼 들리기도 하고, 한탄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마 이실라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했겠지.”
“네… 정말 여러 가지를.”
실리본은 예상했다는 듯 픽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일부러 정보를 주게끔 이실라를 붙여놓은 것이다. 그 녀석은 겉보기로는 딱딱해 보여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퍼주는 성향이라. 그래. 나에 대해 뭘 말하더냐.”
“매운 거 잘 못 드셔서 매운 거 나오면 건강 때문에 싱겁게 먹는다는 핑계로 물 타서 먹는다는….”
“아니 그거 말고. 잠깐, 그런 것까지 말했다고?”
정말로 아주 많은 것들을 들었다. 아인이 이실라와의 대화를 상기하던 사이, 닉이 아인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나왔다.
“분위기에 맞게 행동하자 아인.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잖아.”
“역시 카오스의 조각이라 뭘 아는군.”
실리본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닉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리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령 소환의식에 좌절해서 애처럼 엉엉 울었다고 들었습니다.”
“애처럼 울지 않았다.”
“어른처럼 울었습니까?”
“안 울었다! 어쨌든… 나는 계약에 필요한 수식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론도 매개체도 완벽했으며, 마나만 주입하면 되는 상황이었지.”
실리본은 작은 병 하나를 손에 쥐었다. 투명한 용기 안에는, ‘검다’라는 단어 정도로는 미적지근한. 새까만 그림자가 들어있었다. 바로 어둠의 정령을 소환하는데 필요한 재료.
4원소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들은 적당히 가공된 정령석을 이용해 손쉽게 소환이 가능하지만, 본래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선 저런 자연상태의 매개체가 필요했다.
“하지만 소환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고 끈적한 우울감이 배어있었다. 세기의 천재이자 불세출의 영웅, 모든 진리를 깨우쳤다고 추앙받던 자신이 경험한 넘을 수 없는 벽.
“가장 순수한 빛과 심연의 그림자를 이용한 빛의 정령도 어둠의 정령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을 거행하면 ‘오류 데이터입니다.’ 라든지 ‘현재 구현 불가한 데이터입니다.’같은 말만 되풀이됐지.”
그것은 실리본에게 있어 절망이었지만, 동시에 더욱 타오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다른 방식으로라도, 어떻게든 넘어보리라 이를 악물었다.
“그때 알게 된 거다. 이 세상에는 어길 수 없는 규칙이 있고. 나는 그때 그 벽을 넘어서는데 실패한 것임을.”
실리본은 용기를 쥐고 손에 힘을 주다가, 이내 책상 위의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아인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면… 저는요? 제가 오류 데이터라면서요? 제가 정령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아인에게 유년기의 시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프엘프라는 이유로 서풍의 숲에서 버려진 뒤 수도를 전전하며 온갖 고난을 겪고, 길드장 페리스와 부길드장 가트를 만난 정도가 과거의 기억에서 건질만 한 정도.
실리본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인을 보며 숨을 짧게 뱉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고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런가. 역시 종족 패치가 이루어졌어도 여전하군.”
“…?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실리본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듯 제 턱을 문질렀다.
“아인. 세상은 넓다.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은 전 대륙적으로도 심심찮게 보이는 일이야. 엘프와 인간 사이에 연심이 생기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도 없을 정도로.”
“…하프엘프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는 건가요?”
“나에겐 오히려 호기심의 대상이다. 둘의 특질이 어떻게 합쳐질지는 정말 흥미롭거든.”
그렇다면 자신은 왜 내쫓은 거지? 의문으로 가득 찬 눈을 한 아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실리본은 몸을 휙 돌리고 말을 이었다.
“네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엘프와 인간이 사랑이니 뭐시기니 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는 거다. 다른 장로들은 몰라도 난 긍정적으로 봤어. 그런데 그동안 하프엘프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질 않았다. 이론적으로 보면 둘의 형질을 고려할 때 아이가 생기지 못할 건 없었는데도.”
“….”
그때 네가 태어났다. 실리본은 다시 몸을 빙글 돌리며 아인을 가리켰다. 그늘을 진 그의 표정은 미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네가 태어났을 때 정말로 기뻤다.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는 어떤 특징을 가졌을까. 갓난아이에게 할 짓은 되지 못하지만, 너에게 탐지 마법을 사용하고 본 것은….”
갑자기 그가 말을 멈추자 아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감정의 변화를 느낀 에르가 실리본에게 적대적인 태세를 취했고, 아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에르의 손을 끌고 꾹 잡기만 했다.
에르는 아인의 부탁을 헤아려준 듯 조금 얌전해졌다.
이후, 실리본의 다음 말은 아인의 심경은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정령을 소환할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이 생성되는 ‘오류 데이터’ 전언들이었다.”
아인은 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녀석은 아주 희귀품이야.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하프엘프라고.’
이전에 노예시장에서 들었던 말들이 아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상기되었다. 그 밖에 자신을 보던 시선에 대해서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거부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
아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까지 태생이 잘못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고생과 서러움을 겪었는데. 이제 조금 극복해보려는 결실을 겪고 있는데. 아예 ‘존재하면 안 된다.’라고 쐐기가 박혔다.
실리본은 그런 아인을 보면서 별다른 따뜻한 위로도 없이 말을 이었다.
“뭐, 다행이라고 할까. 오픈베타가 이루어지기도 전. ‘종족 패치’가 되면서 대륙 곳곳에 하프엘프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네 존재가 적당히 묻히긴 했지만.”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전 왜 버린 거예요?”
“오류 데이터와 관련되면 존재가 삭제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거든. 그땐 서풍의 숲 엘프 전체가 삭제되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겁을 먹었지. 실책이다.”
“…사과 하나도 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아인이 이를 뿌득이며 살기를 흩뿌렸다. 그 마음을 알아챈 에르도 한쪽 팔에 새빨간 화염을 둘렀다. 아인과 에르가 각자 땅을 박차며 실리본에게 달려드는 순간-
아인과 에르가 딛고 있던 바닥에서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둘을 방 바깥으로 전이시켜 버렸다.
***
“쫓아가지 않아도 되나?”
“내가 간다고 해도 달라질건 없을 것 같아서.”
“너를 꽤 의지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래?”
실리본은 아인과 에르가 사라진 곳을 얼빠진 얼굴로 보는 ‘용사’를 천천히 훑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찝찝하다는 감상을 남기고 있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악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하다고 말할 정도의 인격을 갖춘 것도 아니군.’
타인을 비롯하여 자신까지 가볍게만 보는 카오스의 조각들은, 실리본에게 있어 오류 데이터만큼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세계를 대체 무어라 보는 것인가. 우리를 보는 심경은 어떠한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소감이라도 있나?”
“숙제로 독후감 쓰는 걸 제일 싫어했던 사람한테 그런 부탁을.”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학자의 궁금증이라고만 봐 주게. 짧게 말해도 좋아.”
“짧게라….”
실리본과 아인이 사라진 자리를 다시 한 번 번갈아보는 얼굴은 차마 하나의 묘사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굳이 말해보자면,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가볍게 듣던 수업에서 어려운 질문을 받은 것처럼.
아니면,
“아까부터 무슨 치정극 찍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솔직히 좀 별로거든.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구니까.”
게임 속의 NPC들이 자의식을 가진 생명체처럼 구는 것을 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