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26)
26화 : 용사의 길
“이게… 뭐지?”
아인은 눈앞에 생겨난 것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내용이 기입된 채로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검은 양피지는, 우측 상단에 엑스자 표시가. 좌측 하단에 ‘퀘스트 포기’, ‘퀘스트 수락’이 있었다.
아인은 이러한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다. 애초에 자신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은 더욱 커졌다.
거기다 에르에게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지, 갑자기 어리둥절해하는 아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에르. 이거 안 보여요?”
“아인… 힘들어도 스스로에게 환시를 걸면 안 돼.”
“안 해요!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지… 내용은 또 뭐고.”
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참이나 헤매느라 검은 양피지에 있는 글씨들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틀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인정받으라니… 방금까지 내가 엄청 고민하고 마음 쓰던 주제잖아? 다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아인이 기억하기로 ‘퀘스트’라는 단어는 분명히 닉이 종종 사용하던 단어였다.
유추하자면 상황에 맞게 발생되는 ‘세계의 의뢰’ 같은 것.
분명히 카오스의 조각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왜 자신에게 온 것인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이미 자신의 앞에 떡하니 보이고, 에르는 보이지 않는데 제한 조건에 ‘오류 데이터일 것’이 있는 걸로 봐선 확실하게 아인을 가리키는 것이 뻔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 데다, 퀘스트 실패 시의 ‘데이터 삭제’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인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받아들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퀘스트 포기.”
[해당 퀘스트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그럼 포기라는 단어는 왜 달아놓은 건데!’
덥석 수락할 용기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두자니 신경 쓰이는 데다가 시야까지 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아인은 기억을 더듬거리며 이 검은 양피지가 사라지게 할 만한 단어를 궁리했다.
“저리가!”
“응….”
“아니, 에르한테 말한 게 아냐!”
에르가 멀리 갔다.
“사라져!”
“응….”
“아니, 아니!! 이곳더러 사라지라고 한 게 아니었어!!”
에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 규모의 정령술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를 모으는 것이 느껴져, 아인은 급하게 손을 휘저어 말렸다.
그때, 아인의 움직이는 손에 따라 퀘스트창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움직이는 방식까지는 알게 되자, 아인은 한숨을 쉬면서 일단 자신 앞의 퀘스트창을 시야 구석에 옮겨놓았다.
에르는 자신이 펼쳐놓은 어둠 때문인 줄 알고 장막을 거두었다.
이윽고 허공을 휘적거리는 아인을 걱정스러운 듯 보았지만, 아인도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커녕 무슨 상황인지조차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 사태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카오스의 조각인 닉이나 이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는 실리본 뿐.
“결국 만나긴 해야 하나…?”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일어나. 거기서 그렇게 죽치고 있으면 남들이 다 해결해줄 것 같아?’
아인은 길드장과의 만남이 떠올랐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을 그가 안다면 분명 잔소리를 잔뜩 퍼부을 것이다.
눈을 감고 감정을 진정시킨다. 아인은 심호흡을 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방문을 벌컥 연 뒤….
“으아악!”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거야!!”
실리본은 한 손에 무시무시한 실험기구를 든 채, 구석에 앉아서 자고 있는 닉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아인의 비명소리에 실리본은 느릿하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실험기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용사님이 로그아웃한 사이에 실험을 해서 이기적인 지적 욕구를 해결한 거죠!”
“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앗… 정말요?”
“실험결과 어떠한 지적 욕구도 충족하지 못했다.”
“실험 이미 했냐고! 그럼 더 문제야!”
로그아웃 상태의 닉은 상태이상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조차 움직이게 하질 못하니, 몸에 해가 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간신히 누그러뜨렸던 실리본에 대한 경계심이 다시금 아인의 마음속에서 수직 상승했다.
마음의 거리가 늘어난 만큼 아인은 뒤로 물러나고, 실리본은 제자리에 선 채 팔짱을 끼고 덤덤하게 아인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했는데. 다시 만나 반갑다는 인사라도 할까.”
“당신이 좋아서 온 건 아니에요.”
“나도 화해의 악수나 하자는 건 아니야. 욕을 하든 화를 내든, 날 원망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다.”
아인은 언성을 높이고 싶은 것을 꾹 삼키고, 아랫입술을 깨문 뒤 간신히 말을 이었다.
“…제 비밀에 대해서 다 말씀해주신 이유는 뭐예요? 그냥 거짓을 말해도 됐을 텐데.”
“너에게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진실에 한 발자국이나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그것은 책임감이나 죄책감에서 온 것이 아닌 단순한 호기심이나 학자로서의 지적 욕구일 것이다. 또한 실리본 스스로도 이를 부정하진 않을 터였다.
궁색하게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라리 다행일까. 아니면 그 뻔뻔함에 더욱 화를 내야 할까.
아인은 뒤에서 마나를 천천히 모으기 시작하는 에르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한 뒤, 짧게 숨을 뱉고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 가능성이나 진실이라는 게 대체 무슨….”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다.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뭐지?”
그 말에 아인의 입이 한번 벙긋했다. 이번엔 답하지 못했다. 대신 실리본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로 도망쳐도 경비병들이 너흴 막을 이유는 없다. 헤르도아를 막은 은인들이니. 단순히 내 마법을 경계한 건 아닌 듯한데.”
그 말대로, 아인은 밖으로 나온 순간에 완전히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남아있었고, 알아야 할 것들도 생겼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요.”
하프엘프로 태어나 께름칙하고 진귀한 보석 취급을 받고, 지금은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이에게 오류 데이터라고 판명되었음에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며 겪은 모든 것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아인이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구석에 있던 퀘스트창이 반짝이며 눈앞에 새로운 글씨가 떠올랐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퀘스트 수락창을 보는 아인의 입가에, 마음을 들킨 것처럼 쓴웃음이 퍼졌다. 실리본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아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좀 별로거든. 살아 있는 것처럼 구니까.’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보았던 닉이 떠올랐다. 아인은 닉에게도 저 말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까. 실리본은 학자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호기심이 일었다.
“결국, 오류 데이터라는 것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지?”
짧은 침묵. 이내 아인은 웃음을 그대로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김유리는 게임을 끈 김에 식사와 샤워를 마친 뒤, 가상현실게임 카오스의 인벤에 들어가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용사’라는 사명에 대한 정보를 더 확실하게 찾기 위해서였다.
사명의 이름이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위험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지켜줄 때’ 전직 퀘스트를 얻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것만 보면 용사 사명을 얻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자잘한 조건이 생각보다 많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스킬 구성이 좋지 않아서 선택하지 않은 것인지, ‘용사’라는 사명을 가진 이조차 극소수였다.
온갖 어그로성 게시글들을 무시하며, 김유리는 간신히 제대로 된 정보글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우와… 인게임 닉도 영웅이야? 레어닉 선점한 거 보니 벌써부터 고인물 냄새 풍기네.’
그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장착한 유저였으며, 용사 사명을 얻은 경위부터 자신의 추측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말인즉슨, ‘자신이든 누구든 죽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지켜줄 때’ 전직 퀘스트가 발생한다는 것.
지금까지 용사의 사명을 얻기 위해 시도한 이들은 많았으나,
그들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전직 퀘스트를 받지 못했다는 추측이었다.
김유리는 이 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용사라는 사명을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아인을 지키기 위해 강한 공격을 일부러 대신 맞아주었으니까.
‘그럼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이 알려질수록 오히려 얻기 힘들어지겠네. 분명히 히든은 맞긴 한 것 같은데… 스킬셋이 정말 구리단 말이야.’
게시글 작성자도 스킬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사기성이라고는 절대로 못하고 일반 직군에 비교해서도 좋다는 말을 해야 할지 의문일 정도라고 적어놓았다.
지금이라도 캐삭하고 다시 키울까. 심각한 고민을 하며 스크롤을 내리는 김유리에게, 일부러 문단을 띄우고 폰트도 바꾼 채 강조한 문단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분명히 유용하기도 하고, 용사 전용 사명 퀘스트를 진행하다보면 새로운 칭호를 얻으면서 표기된 스킬 외에 숨겨진 스킬을 얻기도 합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사명은 얻을 수 없는, 그야말로 용사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라고 생각하니 끝까지 가지고 있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헤르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닉 모하지 라는 유저도 용사….]김유리는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리를 감싸쥔 뒤, 더 보지도 않고 뒤로 가기를 눌렀다.
최근 친구창이나 귓속말 채널 자체를 차단해야 할 만큼 많은 알림이 오고 있었는데, 아마 이 게시글이 그 이유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더군다나 얼마 전에 실시간으로 중개되었던 ‘서풍의 숲 침략’ 동영상에서도 에르의 말도 안 되는 강력함이 나와, 버그나 핵이 아니냐며 난리를 피우는 족속들도 많았다.
사실 자신이라도 의심을 할 만했다. 마침 생각난 김에 김유리는 다시금 동영상을 올린 게시물에 들어가 댓글을 죽 훑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달린 댓글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바로 GM이 직접 단 댓글. 일처리를 언제 할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있어선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버그 패치로 오해를 푸는 것은 빠를수록 좋으니.
하지만 왜 이렇게 속이 쓰리고 찝찝하지. 김유리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북북 긁고는, 댓글 하나를 마지막에 단 뒤 가상현실게임 카오스로 접속하는 캡슐로 발을 옮겼다.
***
아인과 실리본은 닉이 로그인을 하기 전까지 여러 얘기를 나누었으며, 실리본은 아인을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존재’로서 보며 최대한의 투자를 약속했다.
고급 포션이나 희귀한 아티팩트 등등. 지원받을 것을 차례차례 안내받고 있던 찰나, 실리본이 조금 지루해진 얼굴이 되었다.
“이런 평범한 얘기는 다른 엘프들을 불러서 해도 상관없는데. 너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은 없나?”
“실제적으로요?”
“네가 오류 데이터인 이상 패치나 점검 때에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 신탁의 말을 들어보면 이 세계에 문제가 되는 것을 없앤다고는 하는데, 악마나 사룡이 여전히 활개치고 다니는 것을 봐선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무언가를 추가하거나 너희 같은 오류 데이터를 축출하기 위한 과정이겠지.”
아인은 실리본의 말에 에스텔에서 있었던 ‘정기점검’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주민.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던 이들.
자신은 그들에게만큼은 절대로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그것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나요? 지엠은 카오스의 조각도 어떻게 못 한다고 들었는데….”
“속단하지 마. 포기하지도 마. 그들을 만났나? 기억해봐. 끊임없이 생각해. 너는 이 세상의 균열이고 틈을 파헤치는 존재야. 아주 작은 단서도 놓쳐선 안 된다.”
“너무 경황이 없고 충격을 먹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중요도가 높았냐고 물어보고, 프로그램… 시뮬? 을 돌려봤더니 성장 가능성이 전무하다느니….”
기억을 떠올리며 아인의 기분이 다시금 착잡해지려는 찰나,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실리본이 말을 끊었다.
“그거다.”
“네?”
“성장 가능성의 유무. 그것은 오류 데이터의 삭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군. 구태여 그걸 확인했다는 건, 성장 가능성이 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말이 아닌가?”
이제야 깨달은 아인이 눈을 크게 뜨며 몇 번 깜빡이자, 실리본은 소파에 깊게 눌러앉으며 턱을 괴었다.
“너는 누구보다 성장하고. 추후 어떤 영웅보다도 영향력이 강해져야 해. 그게 네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