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34)
34화 : 서브 퀘스트
아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기껏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고 완벽하게 퀘스트를 완료하는 듯싶더니, 닉은 원래 아네모이가 광기에 물들었어야 했을 거라고 말하질 않나 지금은 아예 여기에 오류가 생겼다고 패치가 예정되질 않나.
‘오류 데이터’인 자신으로서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순간이었고, 아예 자신이나 에르를 노리고 오는 것이라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짚이는 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데다, PC인 닉은 도움은커녕 곧바로 로그아웃을 해야 하는 상황.
아인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실리본은 한숨을 쉬더니 양손으로 에르와 아인을 잡은 후 아네모이를 보았다.
“너도 내 실험실로 따라와.”
“걔들까지 실험하려고? 외롭지 않네. 두근두근거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시간이 없다.”
이후 실리본은 짧은 주문을 읊더니 곧바로 자신의 실험실로 워프마법을 사용했다.
익숙한 약품과 오래된 나무 냄새가 아인과 에르의 코를 찔렀다. 이곳으로 온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인이 눈을 깜빡이자, 실리본은 여러 실험대 중 두 개를 가리키며 아인과 에르를 돌아보았다.
“둘 다 저기 누워 있어. 이불이라도 뒤집어쓰던지.”
“네…?”
“너희는 지금부터 내 실험체 행세를 하면 된다.”
“돕는 걸 핑계로 더러운 지식욕을 채우시려는 건 아니죠?”
“진짜 그 생각을 하기 전에 빨리 누워. 지금까지 있었던 패치나 점검 중에 내 실험체가 건드려진 적은 없었어. 난 언제나 실험의 모든 상태를 수기로 기록해놓기 때문에 그건 확실하다.”
물론 완벽하진 않은 방법이었다. 조금만 더 세심하게 확인한다면 곧바로 알아챌 눈속임.
“제대로 실험체처럼 보이려면 팔 하나 정도는 잘려있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실리본의 중얼거림에 아인이 질려버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에르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팔을 쑥 뽑아 실리본에게 건넸다.
“에르!!”
“마나 모으면 금방 재생시켜. 괜찮아.”
“아씨 진짜.”
이번엔 그 실리본조차 질려버린 얼굴을 했고 아인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싸다가 시간이 없으니 당장은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패치가 끝나면 잔뜩 잔소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인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이불로 덮었고, 에르는 일부러 팔이 잘린 것을 보이려는 양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때 내가 팔 자른 건 별 타격도 아니었나 보네? 한 번 더 싸울래?”
아네모이는 마냥 이 상황이 재밌는지 깔깔거리기만 했다.
농담처럼 들리긴 했지만 바람의 정령왕인 이상 언제 진심으로 돌변할지도 몰랐기에 아인이 아네모이를 진정시키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
아네모이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마치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것은 실리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르의 팔을 호기심이 동한 표정으로 든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렇다는 건….’
머리가 끝까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섬뜩한 기운과 함께 맹렬한 압박감이 아인을 옥죄였다.
이전에 에스텔에서 한번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 바라보는 것조차 금기시되고, 저항한다는 전제 성립이 불가하다고 생각되는 기분.
호흡조차 쉽지 않아 간신히 조용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지척에 인기척과 함께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귀찮게 숲 뒤질 일은 없어 다행이네요.”
얼굴을 돌릴 수가 없어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들킨 걸까.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용서를 구하면 삭제시키지 않을까.
질식할 것 같은 중압감에 아인의 마음속이 온갖 충동으로 들끓던 찰나, 인기척들은 아인이 있는 침대를 지나 조금 떨어진 아네모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네모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진짜.”
“실리본인가? 이 엔피시하고 친하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나저나 매드 사이언티스트 설정이라더니 실험체 팔 자른 것 보세요.”
“딴소리 말고. 광기 속성에 잠식돼가지고 서풍의 숲 작살냈어야 할 놈이 왜 여기서 시시덕거리고 있냐고.”
“글쎄요. 확인해볼게요.”
찾았다는 것이 아인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대화하는 내용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고픈 충동을 참으며 입술을 꾹 깨물고 있자, 여자는 아인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의문 섞인 침음을 흘렸다.
“이게… 뭐지. 롤백 흔적 보이는데.”
“롤백이라고? 사전 고지 받은 거 있어?”
“없죠.”
“그럼 우리 중에 누가 멋대로 얘 설정 건드린 건가?”
“설마요. 아네모이 같은 중요 NPC 데이터는 훨씬 높은 분들이나 인공지능밖에 못 건드리는데.”
“… 제기랄. 근처에 여기 로그인하신 분 없지?”
“없어요.”
남자 쪽은 여자의 대답에 한숨을 탁 뱉더니, 실험대에 풀썩 걸터앉고는 실리본을 툭툭 두드렸다.
“처음엔 얘 짓인가 해서 조치하고 다시 아네모이한테 광기속성 집어넣으려 했는데… 인공지능이 한 거면 우리가 할 게 없어.”
“그 정도예요?”
“권한에 있어서는 어떤 운영진보다 그쪽이 우위를 가지거든. 인공지능이 옳다고 생각한 거 우리가 되돌려놓으면 머리 아파진다.”
“아… 골치 아프게 됐네요. 그러면 광기의 정령왕 레이드는 어떻게 해요? 첫 대규모 이벤트인데. 갑자기 없던 걸로 치면 유저나 위쪽이나 난리 나요. 광고사 측엔 어떻게 말해요.”
“북쪽에 데스나이트 군단 모인 거 있지. 그걸로 해. 어차피 대상이 누군지는 정확히 안 했었잖아.”
“괜찮아요? 난이도 더 빡셀 텐데.”
“어차피 아네모이 레이드 다음에 진행할 이벤트였어. 평균 레벨 차이 때문에 피해가 좀 크겠지만… 고위 NPC들 더 데려오라고 해. 물갈이 빨라서 나쁠 건 없어.”
“네… 일단 그렇게 보고해 놓을게요. 공지로는 무사히 문제 해결했다고 하고?”
“그래야지. 해결됐으면 나가자.”
“온 김에 다른 오류 있나 확인해보실래요? 일한다는 티는 내야지.”
‘제발 직무유기 해주세요.’
아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파들파들 떨고 있자, 남자의 그림자는 주변을 느릿하게 훑더니 손사래를 쳤다.
“됐어. 여긴 실험체밖에 없는 것 같고. 저 하프엘프 이불 들추면 해부 현장이라도 나올까 겁난다. 난 비위 약해서 설정도 아동용으로 하고 있단 말이야.”
“그럼 제가 봐도 돼요?”
“당장 나와. 긴급패치가 1초 길어질 때마다 누적되는 손해 네가 갚을 수 있으면 실컷 구경하다 나와.”
“힝. 로그아웃. 확인.”
“어른이 힝이 뭐야. 로그아웃. 확인.”
로그아웃이라는 말과 함께 두 명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인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나 움직이자마자 다시 그 지엠들이 돌아올까, 돌아오는 순간 움직이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는 에스텔에서 보았던 그 사람처럼 삭제를 당할까 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인에게는 한순간 한순간이 영겁과도 같았던 그때. 아네모이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리고 실리본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무튼. 패치 전에 어떻게든 놈들의 눈을 속여야….”
아네모이와 실리본은 그 순간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오류 데이터가 아니었으니.
자신과 그들의 괴리감을 느끼며, 아인은 조금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패치. 끝났어요.”
“… 그런가? 너도 저 정령도 사라지지 않은 걸 보니 무사히 지나갔나 보군.”
“네… 그리고 노리는 대상은 제가 아니라 아네모이였던 것 같아요.”
“아네모이가? 이 녀석도 오류 데이터였나? 뭐가 문제였지?”
“…그건 아니에요.”
“말해봐. 그 녀석들의 정보를 하나라도 더 알아야 대처를….”
아인이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실리본이 다그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아네모이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실리본에게 물러나라는 듯 손짓했다.
“정령 앞에서 감정을 숨기려 하다니 참 바보 같고 착한 아이네. 원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뻔했던 거구나?”
“…네.”
“너무 상심하지 마렴. 그거대로 나는 꽤 신났을 거야. 바람 따라 흘러가는 삶이 다 그렇지. 정령. 그것도 바람의 정령이 생에 미련을 가지는 건 그거야말로 농담 같은 일이란다.”
자신을 위로해주는 아네모이의 말에도, 아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당신이 원래는 광기에 잠식됐어야 했대요. 토벌됐어야 했대요. 그게 맞는 거였대요.’
온갖 문장이 목구멍에 드리워져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아인이 괜히 시큰해지는 콧등을 꾹꾹 누르고 간신히 감정을 진정시킬 즈음, 패치가 끝나자마자 로그인을 한 듯한 닉이 급하게 올라와 아인과 아네모이를 번갈아 봤다.
“얜 또 왜 울어. 애 좀 울리지 마라. 아무튼 공지 떴어. 얼마 후에 파벨 왕국 쪽에서 데스나이트 군단을 상대로 한 대규모 레이드가 발생한다는데?”
***
닉이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라칼과 이후프, 사하바티가 차례로 실리본의 사무실로 찾아와 방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네모이는 데스나이트 군단이 나타났다는 닉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아까 말하려고 했던 헤르도아의 주력이 그건데, 타이밍이 이렇게 되네?”
“데스나이트라….”
라칼은 벌써부터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인은 이야기에 통 집중하질 못하고 있었다.
긴급패치 중 지엠들이 했던 대화들. 그들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문제를 가져오는 쪽에 가까워 보였기에.
아네모이를 오염시키려 들질 않나. 정황을 들어보면 데스나이트를 데려온 것도 그들로 추정되었다.
세상의 문제를 고친다면서 한다는 것이 데스나이트 군단이라니.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아인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아인이 혼자만의 고민을 끌어안고 끙끙대던 사이, 라칼은 무언가 결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닉과 아인을 쳐다보았다.
“닉 모하지. 아인.”
“내 풀네임을 오랜만에 상기시켜줘서 정말 고마워. 닉변권은 도대체 언제 팔 생각인지….”
“우리는 데스나이트 군단이 있다는 쪽으로 갈 생각이다. 동행할 생각이 있나?”
“안 갈 이유는 없긴 한데….”
닉은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는 아인을 힐끔 돌아보고, 한숨을 푹푹 쉬던 아인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흠칫하며 라칼을 돌아보았다.
“네, 네? 그, 괜찮아요!”
“괜찮은 거 맞아?”
“네! …그리고 그런 큰 전투가 있는 곳은 이제 저도 찾아서 가야 할 상황이거든요.”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
적어도 아까처럼 침대에 누워 벌벌 떨기만 하며 속앓이를 하는 것은 이제 질색이었다.
언젠가 지엠들 앞에서 당당히 서서 그들에게 물어보고 화를 낼 수 있는 날까지 자신은 게으름을 피울 생각도 피워서도 안 되니까.
남몰래 주먹을 꾹 쥔 아인은, 기분과 분위기 쇄신을 할 겸 부러 밝은 얼굴로 라칼을 보았다.
“파벨 왕국은 역사적으로도 여러 다양한 몬스터와 대적했던 곳이니만큼 용병들이 자주 찾는 곳이잖아요. 그러면 라칼이 아는 분들도 만날까요?”
아주 어린 아이라도 C등급 용병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아랑족은, 단련된 전사의 경우 단신으로 소규모 용병단과 맞먹을 정도로 강대한 무력을 자랑한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용병단을 가든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곤 한다.
과거에는 아랑족 용병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가 용병단의 전투력을 결정하는 척도였다고 하니 말을 다 한 셈이었다.
때문에 뛰어난 용병 하면 아랑족이라는 인식이 남아있었지만, 라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다.”
“아… 그런가요?”
‘없을 거다.’도 아니고 ‘없다.’라고 확신하는 것이 의문스러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라칼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헤르도아한테 거의 다 죽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마을에 있거든.”
‘괜히 물어봤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으로 찾아온 숨 막히는 정적이 아인의 목을 콱 졸랐다.
아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여기서 몇 초만 더 침묵이 이어지면 이래저래 분위기가 파탄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생각 안 난다.’
그냥 이대로 무릎 꿇고 사과할까 하는 결론이 나려던 차에, 아네모이가 부드럽게 웃는 소리를 흘리면서 라칼을 보았다.
“아하. 그래서 그렇게 조급해하고 뭔가에 쫓기듯 굴었구나?”
“…남의 감정을 함부로 보지 마라 아네모이.”
“미안. 근데 그냥 보일 뿐이라. 정령이니까 봐주라.”
아네모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같은 표정으로 이후프와 사하바티를 돌아보았다. 그 둘은 웃기만 하면서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이후프는 얼굴이 없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인은 그들도 라칼과 같거나 비슷한 일을 겪었으리라 생각했다.
헤르도아와의 전쟁은 꽤 오래전에 종결되었다. 하지만 ‘꽤 오래전’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의 기준일 뿐이고, 수명이 긴 종족은 그 전쟁을 직접 겪거나 바로 한 세대 위의 일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네모이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웃으며 손뼉을 치더니, 모두를 한번 훑더니 밖으로 따라오라는 양 손짓했습니다.
“그럼 다들 거기로 가는 거야? 좀 느긋하게 있다가 가도 돼. 내 도움이면 한두 시간이면 갈 거거든.”
“어라, 진짜? 그럼 나야 좋지. 괜히 길 가다가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거든.”
“…아네모이 님이 직접이요?”
아네모이는 별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닉 모하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아네모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인으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광기에 잠식된 것이 아니더라도, 여전히 장난기 넘치고 예측하기 힘든 정령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은 상태. 그 생각을 아네모이도 바로 알아차렸는지,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적어도 받은 건 확실하게 갚아줘야지. 나는 물론 서풍의 숲 은인이잖아? 이동은 서비스로 해줄 테니, 그 외에도 내가 가능한 차원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줘. 딱 한 가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줄 테니.”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내가 너무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아인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무렵, 닉 모하지는 바깥을 빤히 보더니 일행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럼 데스나이트와의 전투 시작 전까지는 여기 있어도 되는 거지?”
“그렇죠? 뭐 할 거 있으신가요?”
“서브 퀘스트… 아니.”
닉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주지역을 가리켰다. 다른 이들에게는 평범한 풍경이지만, 자신에게는 수없이 많은 노란색 느낌표가 떠 있는 곳.
“용사 노릇 할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