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37)
37화 : 침공
“이미 침공이 시작됐다고요…?”
“응. 딱히 알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도 내가 왜 안 알려줬는지 모르겠네. 역시 좀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게 재밌어서 그랬나?”
빙글빙글 웃는 아네모이를 보고 라칼이 다시 달려들려는 것을 막고 있을 즈음,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닉은 곧바로 환경설정을 켰다.
이후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허공을 휘적이며 공지사항을 찾던 중,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시작했네.”
“네?”
“대규모 전투 이벤트. 떡밥만 뿌리면서 정확한 내용이나 일정은 얘기도 안 해주더니,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공지 떴어.”
그 말과 동시에, 마을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식을 알려주는 사람이 광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헤르도아의 선전포고가 시작됐다! 자신들의 부활을 알리는 전초전이래!”
아마 저것도 ‘신탁’ 같은 것을 통해 알게 된 것일까.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것을 포고하는 것에 가까웠다.
비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규모나 악명이 줄어들었다지만, ‘헤르도아’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은 일반적인 산적이나 반란군 같은 것과는 그 급이 다르다.
“사전에 대비하고 막을 방도는 없었을까요…?”
적의 규모나 전투력은 둘째 치더라도, 침공 시기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긴장감이나 준비 태세는 물론, 대규모 병력을 운용할 시기를 맞추는 것은 나라 차원에서도 많은 절차를 갖춰야 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
비단 아네모이가 아니더라도, 바람의 상급 정령 정도라면 꽤 넓은 범위를 정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닉의 말은 아인에게 있어 절망적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투성이였다.
“못 막아. 설정이야 끼워 맞추면 되는 거고, 파벨 영지가 급습이 되고 상태가 안 좋게 된다는 건 변함이 없을걸. 좀 쉽게 말하자면, 세계가 정한 거야. 결과는 정해져 있는 채로 시작해.”
아네모이가 그들의 침공 사실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은, 일종의 세계적 제약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인은 하늘을 보며 험하게 인상을 구겼다.
또 이런 식이다.
모든 것은 사전에 결정되어 있고, 이 세상은 그에 맞춰 흘러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처럼.
“언제나. 언제나 한발 늦게….”
바다 위를 표류하며 바람과 파도에 휩쓸릴 뿐인 삶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을 거스르기 위해 사람들은 노를 만들어 젓기 시작했고, 자신 역시 그 흐름에 저항할 것이다.
아인은 주먹을 꽉 쥔 뒤, 아네모이를 쳐다보았다.
“아네모이 님. 파벨 영지로 데려다주실 수 있으세요?”
평소의 마냥 순하기만 한 목소리와는 다른 분위기. 아네모이는 한 박자 늦게 히죽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은 다 끝났어? 그건 어렵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괜찮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서브 퀘스트’는 하나밖에 하질 못했지만, 잔당은 이미 라칼 일행이 모두 처리한 상태에다 닉도 뭔가를 더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아있을 이유도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모두가 동의하고 아네모이를 따라 이동하려는 찰나, 어느새 내려와 있던 실리본이 일행에게 손짓했다.
“아인과 잠시 이야기만 하고 보내겠다. 오래 안 걸리니 기다리고 있어.”
아인은 눈을 깜빡이다가 뒤따라가겠다는 눈짓을 하고, 실리본을 잔뜩 경계하는 에르를 진정시킨 뒤 고개를 돌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있다마다. 아까는 공개된 장소라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아까 긴급패치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면 좋겠는데.”
실리본의 말에 아인은 잠시 움찔했다가, 아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지엠의 말대로라면 아네모이가 본래 광기의 정령이 됐을 거라는 점.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지엠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 같다는 점. 데스나이트들도 그들이 데려왔다는 점. 그 외 등등.
그러면서 지엠들이 나쁜 일만 하는 것 같다고 투덜댔지만, 실리본은 그보단 다른 쪽에 주목했다.
“그러면, 네가 한 것이 그 ‘인공지능’이 한 짓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런 것 같죠?”
“당분간은 속일 수 있겠군. 하지만 너무 남발하면 그 녀석들도 위화감을 느낄 테니, 허튼 곳에 사용하지 말고 필요한 곳에만 사용해.”
그 말에 아인은 살짝 어깨를 움찔했다.
이미 ‘설정 스크립트 변경’을 이용해 한 아이의 불치병을 난치병으로 만든 상태인데, 아마 실리본이 그것을 들으면 ‘허튼 곳’에 썼다고 무어라 할 것이 뻔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세상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에 있었으니.
때문에 괜한 반항심이 든 아인은 묘하게 삐뚜룸한 얼굴로 실리본을 바라보았다.
“필요한 곳이 어딘데요?”
“시의적절한 때.”
“제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실리본은 아인에게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파란 수정을 주었다.
“통신석을 줄 테니, 내 조언이 필요할 때 마력을 주입해. 그러면 나와 연락이 가능할 거다.”
마치 자신의 결정은 당연히 틀릴 거라고 전제하는 것 같아 아인은 또 뚱한 얼굴이 되었지만, 동시에 약간의 안심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실리본이 보다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말해두는데, 너에게 무작정 호의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명심해라. 나는 세계의 진실을 찾기 위해 협력하는 거니까.”
“…네.”
“알았으면 가봐. 일거수일투족에 주의하며 다니는 것 잊지 말고.”
아인은 입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한번 꾸벅이고는, 저를 부르는 일행 쪽으로 달려갔다. 아직 여기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지만, 나중에 오면 된다고 생각하며.
“조금 늦었죠! 죄송해요.”
“괜찮아.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파벨 영지까지 데려다줄 건데….”
그때, 아네모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빤히 보던 에르가 움찔하더니 날개를 퍼드덕거려 아인의 앞에 섰다.
“…아인은 내가 데려갈게. 사하바티까지도 괜찮아.”
“에? 에~? 진짜로? 다 내가 데려가면 안 돼?”
“안 돼.”
단호한 에르의 말에 아네모이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닉과 라칼, 이후프를 보고 활짝 웃었다.
“자! 그럼 출발할까? 고소공포증은 없지? 있으면 더 좋고!”
***
“갔나요.”
“아까 전에.”
“그렇군요.”
이실라는 아네모이와 에르가 일행들을 잡아 공중으로 날아오른 곳을 빤히 보고 있었고, 실리본도 팔짱을 낀 채 옆에 서 있다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인에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었나?”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녀석의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잖아.”
“쫓아낸 곳에서 괜히 말을 해 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겨내야 할 게 아주 많은 녀석이다. 그 정도는 알려줘도 됐어.”
이실라는 입을 한번 벙긋했다가 다물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꺼풀이 반쯤 감기더니 두어 번 깜빡인다.
“언젠가 만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속 숨어있는 게 아니라, 저런 길을 택했다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나?”
실리본이 뒤늦게야 고개를 돌리고, 이실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위치는커녕 생사 여부조차 특정하기조차 힘듭니다. 그녀는 예전부터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요.”
***
“엄마야아아악!!”
“끄아아아악!!”
“…….”
“한 분 지금 기절한 것 같은데요! 너, 너무 너무 빨라요!!”
“아하하! 기절했으면 신경 안 써도 좋으니까 더 좋지~.”
닉과 아인 일행은 아네모이와 에르에게 들린 채, 방어막 하나만 덧씌워지고 말 그대로 태풍처럼 하늘을 거슬러가고 있었다.
방어막 덕분에 바람에 다치거나 숨이 막히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공기가 갈기갈기 찢기는 소리가 귓가에 미친 듯이 울리고, 투명한 방어막을 통해 까마득한 지상이 눈에 들어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아인을 데리고 가는 에르는 속도만 빠를 뿐 비행 자체엔 안정감이 있는 편이었지만, 아네모이의 경우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이게 바로 공중비행돌기 36연속 회전이라는 거야!!”
“늉늉 늉늉늉늉가 늉 늉늉.”
“아이참 그렇게 기분 좋니? 앙증맞은 발음만 하고 말이야.”
“욕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용사님 엄청 욕하고 있는 거예요!!”
아네모이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회전하면서, 품에 안고 있는 닉과 라칼, 이후프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라칼은 이미 아까 전부터 기절한 상태이고, 이후프는 자신의 몸으로 이런 상공에 오른다는 게 처음이라는 말을 몇 번 하더니 의도적으로 의식을 핵 안으로 숨겨두었다.
욕이라도 할 정신이 남아있는 닉이 오히려 신기하게 보일 지경.
바람의 정령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게, 속도 하나는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방어막이 투명한 탓에 아래쪽이 모두 보였는데, 아인의 눈으로 몇 개나 되는 왕국을 순식간에 지나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도착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아네모이가 이쪽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도착! 여기서 착륙한다! 난 착륙시키고 바로 서풍의 숲으로 돌아갈 테니까 다음에 봐! 정말 필요할 때 부르고!”
“착륙? 여기서? 야이 늉늉 이건 추락이잖아!!”
아네모이는 닉의 불만 토로에도 꺄르르 웃기만 하다가, 이윽고 자유낙하를 실시했다.
아니, 바람의 힘을 이용해 자유낙하보다도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내리꽂혔다. 라칼의 털이 거칠게 휘날리고, 닉의 눈에도 초점이 풀렸다.
다행히 에르는 아인을 걱정해주었는지, 비슷한 속도지만 방어막에 새까만 그림자를 입혀주었다. 덕분에 지상이 가까워지는 건 보이지 않았다.
‘고마운데! 정말 고마운데! 이것도 무서워!’
바람소리는 바람소리대로 잘 들려서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기분.
결국 공중에서 아인을 비롯한 일행들의 비명이 이리저리 퍼지고 섞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추락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다가, 어느 순간에 바람소리가 훅 멈추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야?”
“바람의 정령?”
“하지만 그런 형태의 정령은 못 봤는데.”
“근데 이것들 살아있긴 한 건가?”
“헤르도아의 기습 아냐?”
어느새 인파가 몰려들고, 날카롭게 벼려진 경계심이 일행을 둘러싼다.
아인은 소리를 통해 낯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고는 급하게 머리를 추슬러 귀를 가렸다. 짧고 뾰족한 귀끝이 머리카락에 가려지는 순간, 타이밍 맞게 아인을 가리던 에르의 그림자가 걷혔다.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각기 엄청나 보이는 무구들을 착용한 채 저희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모험가들.
그리고
“여기에 구경거리라도 났냐? 왜 다 모여있….”
“에….”
“…어?”
아인이 알기로는 시골구석의 용병 길드에서 빈둥거리고 있어야 할 길드장과, 옆에서 ‘정말 놀란 무표정’을 하고 있는 부길드장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