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39)
39화 : 정령화
페리스의 눈동자가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며 분위기가 급속도로 변질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말투로 일관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데스나이트들을 훑으며 검 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이제 적들과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지성체의 군대라면 서로 대치한 뒤 자신의 침략 정당성을 위한 으름장이라도 놓을 테지만, 저들에게 그런 절차는 필요치 않았다.
자신들의 삿된 교리와 믿음을 맹신하고 돌진하는 사교도의 군대. 언데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드문드문 보이는 헤르도아의 사제들에겐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일말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모든 것을 휩쓸고 혼란에 빠트리는 것. 그것이 저들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포교인 셈이었다.
데스나이트들이 육안으로도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검붉은 풀 플레이트 갑옷을 착용한 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린 파란색 안광을 흩뿌리는 죽음의 기사들.
개중에는 슬레이프니르라는 마수를 탄 개체도 보이고, 무기는 대검과 철퇴, 도끼 등 각기 다른 것을 들고 있었다.
어떠한 함성도 없이 묵묵하게 상대방의 생명을 취하기 위해 다가오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인은 결국 저 공터에 함께하질 못했다. 긴장된 얼굴로 침을 삼키고 성벽 아래쪽을 둘러보니, 스스로를 땅에 심고 주변에 나무 송곳을 만들어내는 사하바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허리를 숙인 라칼과 주변의 돌을 이용해 자신의 크기를 조금씩 키우기 시작하는 이후프가 눈에 들어왔다.
에르는 행여나 다른 마법이라도 날아올지 방어막을 몇 겹으로 펼쳐두고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성벽 위에서는 원거리 포격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대규모 마법진을 준비하던 마법사는 전장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너무 앞으로 밀고 나가면 아군 포격에 휘말리니까 알아서 처신해!!”
이윽고 묵묵하게 다가오던 데스나이트들의 한복판에 거대한 불기둥이 뿜어지는 그 순간, 양 측이 격돌했다.
페리스의 자색 검이 선두에 있던 데스나이트의 허리를 양단하고, 그것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재가 되어 바닥에 쏟아졌다.
본디 언데드라면 몸이 잘리더라도 끝까지 상대방을 물어뜯으려는 집착이라도 보이겠지만, 영혼 자체를 손상시키는 페리스의 공격은 흑마법이든 신성마법이든 어떤 회복도 용납하지 않고 그대로 언데드를 소멸시켜버렸다.
시야가 부옇게 변할 정도로 잿가루가 허공에 흩날린다. 페리스는 정면에서 오는 공격은 허리를 크게 젖혀 피하더니, 바로 검을 앞으로 휘두르며 후방에서의 기습을 피하는 동시에 정면의 데스나이트를 세로로 쪼개버렸다.
뒤에 눈이 달린 게 아닐까 싶은 움직임. S급 용병이라는 호칭이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진짜 강하긴 하시구나. 인간 상대가 아니니까 더 가차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인도 그가 검을 뽑고 싸우는 걸 보는 건 이걸로 두 번째였다. 그것도 이렇게 제대로 된 전장에서는 처음.
또한 사하바티와 이후프 역시 저마다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방어선을 뚫으려는 데스나이트는 사하바티가 만들어낸 거대한 나무 말뚝을 넘지 못하고 죄다 꿰뚫렸으며, 한쪽 손을 거대화시킨 이후프는 한 번에 열 개체 이상의 데스나이트를 말 그대로 짓이기고 있었다.
온화한 모습에 깨닫고 있질 못했지만, 그들도 상당한 실력자이며. 이 전장에서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짊어지고 헤르도아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은 잠시 넋을 놓고 전투하는 걸 보다가, 뒤늦게라도 바람의 중급정령 제피로스를 소환해 전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에르.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원거리 마법으로 저 데스나이트들만 요격해줄 수 있어?”
“응.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설정 프로그램 개입 같은 걸 썼다간, 사용 방법은 둘째 치더라도 그 파장이 어떻게 퍼질지 예상도 되지 않아 최대한 아껴두고 싶었다.
에르가 한 번 손짓을 할 때마다, 날카로운 얼음송곳들이 데스나이트를 꿰뚫고 내부에서 2차적으로 폭발한다.
짧은 시간에 몇 기나 되는 데스나이트들이 순식간에 쓰러졌지만, 그 뒤로 쓰러진 것보다 많은 적들이 우글우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아인은 적진 사이에서 말 그대로 짐승처럼 움직이는 라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칼은 데스나이트에는 큰 관심이 없는지, 무릎을 걷어차 관절을 반대로 꺾어버리거나 손톱으로 안면만 찢어발긴 뒤 자신을 쫓아오지 못하게만 하고는 더욱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공격은 맨손으로 막아낸 뒤 무기를 부러뜨리고, 다리를 잘라 쓰러지는 데스나이트를 디딤돌 삼아 파고들기도 하고.
아마 라칼의 목표는 데스나이트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위치한 헤르도아의 사제들일 것이다.
아인은 제피로스에게 라칼을 보조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런 난전 속에서 직접적으로 공격이나 엄호를 하는 것은 힘들더라도, 몸이 가벼워지거나 움직임에 탄력을 받아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제피로스가 그에게 붙자, 라칼은 아인을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아인은 다음으로 닉을 찾았다.
“미치겠네. 스탯은 앞서는 것 같은데 이 죽일 놈의 운동신경이….”
난전 가운데서도, 아인의 귀는 닉의 목소리를 똑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선에 들어온 것은 숨을 고르는 닉.
그리고 다소 먼 곳에서 정확하게 닉을 바라보며 달려오는 데스나이트.
“어… 어, 어. 요, 용사님!”
하지만 어지간한 외침 정도가 난전 중인 이들에게 들릴 리가 만무하다.
성벽 위에서 온갖 엄호사격이나 포격을 뿜는 이들도 닉을 보진 못하고, 닉은 여전히 데스나이트를 눈치채지 못했다.
약간 거리가 떨어져 있긴 하지만, 저대로라면 얼마 안 가 그대로 뒤를 덮쳐질 것이 뻔했다.
“어? 이봐, 뭐해!”
아인은 닉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성벽 가장자리에 발을 올려놓고
“저 녀석 뭐야! 헤르도아한테 당했어?!”
“아인!”
주변 병사와 에르가 말리기도 전에,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
순간적으로 아인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본디 제피로스를 이용해 공중을 날고 닉에게 빠르게 달려갈 생각이었지만, 라칼에게 제피로스를 붙여두었던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그 순간, 아인의 눈앞에 여러 개의 상태창이 동시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온몸을 감쌉니다.] [바람의 친화력이 극도에 달한 상태입니다.] [정령화 스킬이 사용 가능해집니다.]얻기만 하고 지금까지 사용해 본 적도 없었던 ‘정령화’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아인은 간신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정령화!!”
[누구도 얽맬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 바람의 정령이 됩니다.모든 물리 피해에 면역이 됩니다.
바람의 정령술을 이용한 피해에 면역이 됩니다.
모든 마법 공격에 70%의 피해만을 입게 됩니다.
숙련도가 높지 않습니다. 일부 정령술의 사용에 제약이 뒤따릅니다.
존재하는 숨결과 바람은 모두 당신의 손길이고, 당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것입니다.
정령화 유지시간: 4분 53초]
바닥에 몸이 닿을 즈음, 아인의 몸이 둥실 떠오른다.
몸이 가벼워지고 주변에 있는 바람과 공기의 흐름들이 손에 잡힐 듯 익숙해진다.
거기에 더해 연달아 눈앞에 나열되는 효과들은 엄청나다는 말로도 부족했지만, 그것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닉과 데스나이트의 거리는 지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당장 달려가도 다가갈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기에, 아인은 결국 숨을 깊게 들이쉬고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용사님!! 뒤!!”
[당신의 목소리에 바람이 실립니다.]그리고 아인의 목소리는, 온 전장에 또렷하게 퍼질 정도의 엄청난 소리로 터져나왔다.
한순간 모든 병사는 물론 데스나이트나 헤르도아의 사제들마저 잠깐 뒤를 돌아볼 정도로.
소리의 증폭을 노리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아인의 얼굴이 새빨개질 때, 닉 역시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데스나이트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것까지는 좋았지만.
“저것들 뭐야?”
“좀… 뭔가 많이 다른데?”
거대한 데스나이트 무리가, 아인과 닉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데스나이트들보다 덩치가 1.5배는 큰 데다, 검붉은 갑주가 아닌 심연처럼 새까만 갑옷을 입은 언데드들.
풍기는 분위기는 물론이고 바로 달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지성도 겸비하고 있는 고위 언데드처럼 보였다.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질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그 사이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아. 익숙한 목소리들.”
“….”
익숙함은 불온함을 일깨우고, 이내 피어나는 두려움이 뇌리를 휘감는다.
에스텔에 입성하기 전, 그리고 서풍의 숲에서 마주쳤던 존재.
세상의 모든 색을 한데 섞어 만들어진 것 같은 혼탁한 검정.
닉에게 멋대로 선전포고를 한 뒤에 용사님에게 퀘스트를 안겨주고 떠났던 헤르도아의 고위 사제였다.
그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여유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목소리를 흘렸다.
“위선의 개들을 벌하소서.”
“유저가 컴플레인 넣었나 봐. 욕설 수위 줄어들었네.”
“용사님 제발 입 좀.”
“우리는 여명의 검은 빛을 알리는 신자. 쇠하지 않는 이들.”
헤르도아의 사제는 누가 뭐라고 하든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분위기가 어떻든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험성이 줄어들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 때보다 농도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새까만 늪에 발을 풍덩 담그는 기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용사였나요. 이번에도 우리의 과업을 성대하게 방해하러 와주신 모양이군요.”
“잘 만났다. 내가 너 때문에 친창이랑 귓속말 탭이 개박살….”
“저자는 원래 정령이었나요? 설마 정령화? 후후, 정말이지 다음에 만날 때는 얼마나 성장해있을지 감도 안 잡힐 정도군요.”
“이 늉늉 예나 지금이나 남의 말 안 들어먹는 건 똑같네.”
대화는 가볍지만, 대치한 상황 자체는 무척이나 급박하고 진중하다고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곳곳에서는 데스나이트와 용병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이곳 주변에서는 데스나이트들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손님과의 조우에 함부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자중하는 것처럼.
이 헤르도아의 고위 사제는, 분명히 이 군대를 일으킨 간부급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러면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하면. 원만하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남은 정령화 지속시간: 3:12]정령화도 어느 정도 여유시간도 남아 있는 데다, 지금 상태라면 누구와 싸워도 최소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의 정령화가 된 지금, 직접 손이 닿지 않더라도 바람을 움직여 닿게 하는 것만으로도 ‘설정 프로그램 변경’을 사용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런 힘을 멋대로 남발해도 되는 걸까. 실리본은 허튼 곳에 쓰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아인 특유의 우유부단함이 결정을 늦추고 있는 사이, 닉과 대화하던 헤르도아의 사제가 아인을 보고는 샐쭉하게 미소를 지었다.
썩어 물러터진 음식이 테이블 위에 쏟아지듯, 입꼬리가 찢어져라 길게 늘어지더니 께름칙한 웃음이 얼굴에 만연한다.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그게 다 얽매여서 그런 것입니다.”
“….”
“혼돈 속에서는 어떤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이 카오스의 의지이고 교리가 될 것입니다. 특히나 당신처럼 파악하기가 힘든 존재라면 더더욱… 아. 아아. 혹시 당신이 바로, 서풍의 숲에 있다던 혼돈의 정령인가요? 그렇군. 그래요! 그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요.”
‘진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중, 아인은 사제가 하는 뒷말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서풍의 숲에 있는 혼돈의 정령.
혹시 에르를 말하는 걸까.
“저기.”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 그 존재를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아아, 왜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걸까요. 이건 제 실책이에요… 그래요. 지금은 이야기를 나눌 장소가 아니니… 당신을 한번 시험해볼까요. 원래는 자색의 핏줄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것인데.”
“제, 제 얘기를 들어봐요! 저는 그 정령이 아니고….”
“자격이 되는지 알아보는 정도로는 충분할 거예요.”
“시발 사람 말 좀 들으라고!!”
헤르도아의 사제는 아인의 말을 일절 듣지 않고 해골 모양의 장신구를 하나 꺼내더니, 무언가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흉성의 신앙. 그 빛이 이곳에 쬐이라.”
보기만 하는데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마력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주문이 끝내자마자 그 장신구에서 탁한 검은색 오라가 넘실거리고, 아인은 급하게 맞대응하기 위해 헤르도아의 사제와 데스나이트들이 밀집한 곳에 세찬 바람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당신의 손길과 같습니다.] [힘이 닿은 이들의 설정 프로그램에 개입이 가능합니다.현재 개입 가능한 몬스터 및 NPC 정보: 어비스 나이트 10구, 헤르도아의 종 헤도스의 오른팔, 헤르도아의 종 아쿠타의 왼다리…….]
‘뭐야? 신체별로 이름이….’
예상치 못한 상태창에 당황한 아인이 순간 멈칫하고
“물러요.”
한 박자 빠르게 완성된 헤르도아의 마법이 아인에게 폭사됐다.
검고, 질척하고, 끈적한 화염.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공격은 순식간에 제 앞에 있는 존재를 집어삼키고, 아인의 눈앞은 새까만 그림자로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