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42)
42화 : PC와 NPC
“하 제기랄…. 다굴빵은 플레이어만의 특권 아냐?”
닉은 신중하게 자신을 몰아넣는 어비스 나이트와 끊임없이 몰려드는 데스 나이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진퇴양난’을 통해 어비스 나이트를 대상으로 삼고, 그에 맞춰 향상된 스탯 덕분에 몸놀림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공격을 피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여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어비스 나이트가 광폭화 상태에 들어섭니다.]“아오, 얘는 뭐 이런 스킬을 가지고 있냐!!”
카앙!
검붉은 검신이 점점 더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한다.
한 번을 막으면 곧바로 다음 공격이 들어오고, 거리를 벌리려고 하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곧바로 쫓아온다.
특히나 어비스 나이트 특유의 오라가 주변에 넘실거리며, 숨을 쉴 때마다 불쾌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에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권선징악’의 효과로 ‘심연의 오라’ 효과가 약화됩니다.]다행스럽게도 무언가 효과가 낮아졌는지, 오라는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오염물질을 뒤집어쓴 무언가’처럼 생각되어 다가가기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똥 묻은 맹수 상대하는 기분이다. 이걸 어떡하냐.”
“크아악!”
“제길, 화났니?! 미안해!”
가까이 다가가기는 싫고. 이러다가는 끝이 나질 않고. 고심하고 있는 닉 옆으로 다른 플레이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저거 안 잡을 거야? 그럼 내가 딴다?”
“네?”
“딱 봐도 잡기 어려워하는데. 선타 안 쳤지? 뒤로 빠져 있어, 그럼.”
자신보다도 좋은 장비를 끼고, 이미 데스 나이트를 여럿 잡았는지 몸 곳곳에 검은 액체나 잿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상당히 고렙인 유저이고, 자신이 어비스 나이트에게 쫓긴다고 생각하여 도와주려고 온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데스 나이트보다도 상위 개체라고 생각되는 이 녀석의 드롭템이 탐났거나.
성장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어주지 않았겠지만, 아이템이나 몬스터에 그다지 큰 욕심도 없는 닉에겐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안 그래도 그 불쾌한 오라 때문에 다가가는 것도 꺼려지던 차였다.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무슨 오라 나오는 거 조심….”
“나와라, 흑검!!!”
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플레이어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새까만 검신 하나를 생성하며 어비스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아까부터 지켜보면서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고만. 닉이 별생각 없이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
“이, 이게 뭐야. 몸이 안 움직이… 크악!”
가까이 다가가던 플레이어에게 오라가 뒤덮인다. 이내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기세 좋게 달려가던 몸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무, 무서워. 무서워…. 뭐야. 게, 게임인데 이래도 돼? 주, 죽어. 도와줘.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키륵. 키르륵.”
어비스 나이트는 그를 보며 비웃는 것 같은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오라가 검 주변에 모이며 응축되기 시작하고, 닉은 결국 혀를 차며 달려 나가 어비스 나이트의 검을 튕겨 냈다.
“늉늉 가지가지 한다, 진짜.”
[카르마 포인트 ‘선’이 쌓였습니다.현재 카르마 포인트: 선 1, 악 0]
‘이건 또 뭐야. 카르마 포인트? 착한 일 하면 주는 건가? 이제야 주는 걸 보면 플레이어 한정인 건가. NPC하고만 다니는 나한텐 꽤 불리한….’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광폭화 상태에 오래 접어들기 시작한 어비스 나이트는 이제 앞뒤 가리지 않고 거칠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무차별적인 맹공에 닉은 몇 번 검을 막는가 싶더니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플레이어를 잡아채 뒤로 물러났다.
“내 명에 못 죽지. 여긴 그냥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저리 가 있어요!!”
“자, 잠ㄲ….”
그는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멱살을 잡히곤 데스 나이트가 비교적 적은 후방으로 날아갔고, 닉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안 그래도 얼굴이니 이름이니 온갖 곳에 알려져 있는데, 일부러 안 잡고 있다가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고 이상한 글 올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미치겠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녀는 이를 악문 채 검을 내질렀다. 어비스 나이트는 지금까지 공격을 흘렷던 것처럼 검술을 흘리지 않고 그대로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카앙!
넘실거리는 오라가 몸 곳곳에 들러붙고, 불쾌한 감각이 이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는 데엔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이런 정면 승부라면 닉 쪽이 유리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더니, 날카로운 눈매가 한층 치켜 올라갔다.
“잘! 만났다, 이 늉늉! 아까부터! 이리저리! 꿈틀거리면서! 빡치게 만들고! 마음에 안 들었어!”
캉! 쾅! 깡! 캉! 쾅! 쾅! 깡!
한 번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어비스 나이트의 검에 균열이 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강강약약’으로 인해 한층 높아진 스탯. 거기에 악 성향인 어비스 나이트는 ‘권선징악’의 효과까지 제대로 받고 있었다. 더해서 적의 공격은 점점 단순하게 변해 가는 중이었다.
이 상황은 사실상 닉이 최대한으로 역량을 뽐낼 수 있는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일발역전.”
사선으로 내리치는 공격을 피한 닉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적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척추 부근에서 맥동하고 있는 붉은 핵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폭화 이전이었다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겠지만, 지금 어비스 나이트는 이 순간마저도 그저 공격을 하기 위해 허리를 돌려 대검을 뒤로 휘두를 뿐이었고-
“그리고 똥내 좀 그만 풍겨!!”
떠엉!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어비스 나이트의 검이 부러지며 그대로 붉은 핵이 절단되었다.
움직임이 멈춘다. 그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더니, 천천히 검은 재로 변해 갔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레벨업] [어비스 나이트 ‘투귀 페이프’의 안식을 도와주었습니다.] [명성이 상승합니다.] [‘진퇴양난’이 중지됩니다. 동급 및 그 이상의 몬스터가 주변에 감지될 경우 자동으로 대상이 옮겨집니다. 일정 시간 후 완전 해제 됩니다.]“뭐야. 이거 네이밍 몬스터였네?”
몬스터도 플레이어처럼 행동에 따라 명성이나 악명을 얻으며, 그것이 일정 이상 올라가면 ‘네이밍 몬스터’ 취급을 받는다.
이름이 붙여져 있으면 같은 몬스터라도 모든 능력치가 몇 단계나 상승되어 있으며, 훨씬 많은 경험치 및 낮은 확률로 희귀한 아이템도 준다. 그래서 그것들만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네임 헌터’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눈에 띄는 아이템 없이 검붉은 파편 하나 정도만 얻었을 뿐이지만.
[불길한 조각을 획득했습니다.]‘예전에 리치 잡았을 때도 비슷한 거 얻었는데. 아주 좋은 건 아닌가 보네.’
닉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제 슬슬 설렁설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쉽게 두진 않나.”
하지만 아직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으며, 데스 나이트들도 적지 않은 수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늦췄다간 순식간에 둘러싸일 것이 뻔했다.
심지어 ‘진퇴양난’도 완전히 해제된 것이 아니다. 닉은 ‘똥망캐’라고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전쟁 필드라는 특성상 죽는다 해도 곧바로 살아날 수 있었지만, 잃어버리는 경험치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몸을 함부로 굴릴 수는 없었다.
특히나 자신처럼 노가다성 레벨업이 힘든 사명을 가진 캐릭터라면 말이다.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몸을 굴리면 아인이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벌써 레퍼토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닉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라칼이나 아인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눈 딱 감고 도망쳐 버릴까.”
닉은 이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울 생각까진 없었다. 적당한 레벨업과 명성, 스킬 레벨의 상승 정도가 본디 원하던 목표였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앞에 있는 데스 나이트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드러누워 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자신도 안다.
아인이 무사히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리스크가 높은 스킬인 ‘진퇴양난’을 사용했고, 그 효과로 주변의 어그로를 무진장 끌어 버린 것.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물어본다면 선뜻 답할 자신이 없었다.
‘뭐긴 뭐야. 중요 NPC 함부로 잃어서 좋을 건 없으니 그렇지.’
자신에게 주어진 퀘스트 하나를 떠올리며 닉은 한숨을 쉬었다. 그저 히든 연계 퀘스트겠거니. 지금은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었다.
보상도, 패널티도 없이 내용조차 이상했던 퀘스트 ‘존재의 증명’.
게임 NPC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퀘스트에 보상을 주는 존재고. 오류가 발생하면 수정하거나 삭제하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다양한 표정 변화나 반응을 보다 보면, 마냥 딱딱하게 대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정해진 스크립트와 키워드대로만 움직이던 지금까지의 게임 내 NPC들과 달랐다. 이곳에 있는 NPC들은 거대 인공지능에 의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있고 그것을 주요 장점으로 광고하기도 했으니까.
점점 아인을 대하는 태도가 애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즈음-.
[진퇴양난의 대상이 변경됩니다.]“아 젠장. 또 그 녀석이야?”
상대하고 있던 몬스터가 사망할 경우,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몬스터에게 타깃이 옮겨지는 스킬 진퇴양난.
일정 시간이 지나도 대상이 포착되지 않으면 저절로 해제된다길래, 내심 데스 나이트만 가득한 이곳에선 더 나오지 않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세상이 쉽게만 돌아가진 않았다.
[패잔병들의 왕이 당신을 주시합니다.]“응?”
어비스 나이트가 아니었다. 패잔병들의 왕은 자신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네이밍에서, 오랜 시간 게임을 즐겼던 닉은 짙은 불길함을 느꼈다.
패잔병이라는 대목부터 찝찝하고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데, 어지간한 알피지에서 ‘왕’이라는 호칭은 아무리 못해도 필드 보스 정도는 돼야 붙여 주는 이름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초보자 구역 같은 만만한 곳이 아닌, 헤르도아의 주교니 어비스 나이트니 하는 무시무시한 것들이 사방에 깔려 있는 전쟁터.
[스탯이 상승합니다.] [스탯이 상승합니다.]상대방이 강할수록 비례하여 올라가는 스탯 덕분에, 닉은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지 대략적으로 측정해 볼 수 있었다.
그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어비스 나이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였다.
“시1발.”
감출 생각도 없는 짙은 살기가 피어올라 자신을 향하고, 닉은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돌려 살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찰흙처럼 뭉쳐 어설프게 사람 형태로 빚어낸 듯한 모습.
강하고 말고 이전에 생리적으로 불쾌감이 느껴져, 닉은 짧게 헛구역질을 했다가 질린 눈으로 검을 쥐었다.
‘저것도 약점이 있나? 바로 일발역전 사용해 봐야 하나? 그러다가 바로 죽으면 어떡하지?’
가늘게 뜬 눈이 복잡하게 굴러갈 무렵, 갑자기 자신의 옆으로 수많은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패잔병들의 왕’이라는 놈의 기술일지도 몰랐다.
‘젠장, 당했…!’
혀를 차며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데, 닉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패잔병들의 왕’이 사용한 무시무시한 기술이 아니었다.
“야, 저거 무조건 유니크템 드롭이다! 빨리 가서 죽여! 막타는 못 쳐도 최대한 딜 넣어!”
“패턴 모르는데 어떡해요?”
“그냥 몸으로 부딪혀. 전쟁 필드라 죽어도 바로 살아나.”
“아 이런 헤딩팟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전체 수위로 좀 낮춰야겠다. 왜 저렇게 징그럽냐?”
“나 바꿨는데 인형 무더기 돼서 더 무섭던데. 차라리 지금이 나아.”
“그냥 게임인데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좀비겜은 지금까지 어떻게 했냐?”
수많은 플레이어가 저마다의 감상을 털어놓으며,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닉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작게 웃었다.
이후 다리에 힘을 준 뒤, 상승한 스탯을 바탕으로 폭발하듯 앞으로 쇄도했다. 앞을 가로막는 몇몇 데스 나이트들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앞으로 나가는 것에 망설임은 없다. 죽으면 살아나지, 뭐. 아인 그 NPC에게 찍혀도 호감작 좀 하면 되고.
들었던 말을 한 번 더 중얼거린다. 자신에게 되새기듯이.
“그냥 게임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