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43)
43화 : NPC와 PC
“설마 저게 여기서 나올 줄이야….”
아인은 떨려오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려 애썼다. 기록과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존재를 눈앞에서 보니, 그 위압감이 엄청났다.
부서진 갑옷과 무기, 죽은 이들의 살점을 원한으로 엮어 골렘의 형태로 되살아난 ‘패잔병들의 왕’.
규모가 큰 전장일수록 그 힘은 더욱 강대해지며,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주위에 있는 시체들을 사용해 수복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짝이 없는 언데드 중 하나였다.
특히 대륙전쟁의 막바지 무렵, ‘종언의 광야’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이들은 수많은 영웅들을 죽이고 그들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다.
핵이 되는 부분을 공격하면 붕괴되긴 하지만, 그 위치가 몸이 복구되면서 무작위로 결정되는 데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대.
드문드문 그것을 향한 마법이나 지원사격이 날아오곤 했으나, 한 번 거대한 팔을 휘두르는 것으로 마법은 막혀 버리고 그리 강하지 않은 원거리 공격은 무시한 채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망할, 뭐 저딴 게 다 있냐!”
“카나운 용병단은 퇴각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방패 부대들은 버프를 받고 끝까지 막아라! 저게 성벽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족까지 끝장이야! 1초라도 더 시간을 끌어!!”
그리고 뒤이어 닥쳐오는 데스 나이트들의 파상공세에, 한참 헤르도아의 세력을 몰아붙이던 용병과 군대들은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되기 시작했다.
영지와 왕국 소속의 군대들은 이를 악물고 그것의 시선을 끌거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별 효험은 없었다.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뛰어드는 이들도, 공포에 질린 채 느릿하게 뒤따르는 이들도 단 몇 초를 붙들었을 뿐이었다.
“아….”
그것을 보던 아인은 짧게 신음을 흘렸고, 주춤거리며 패잔병들의 왕 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는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들과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의 시체, 자신이 무엇에 죽은 것인지도 모르는지 멍한 얼굴의 시체, 눈가가 아직까지 축축해 보이는 시체.
그들 모두가 전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나누고 후회 없는 마지막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몇몇 시체의 옆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붙어 있기도 했는데, 그들도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망할. 망할…. 좀 일어나. 일어나라고.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진짜로 큰일 난단 말이야.”
이미 숨을 멎은 이를 어떻게든 끌고 가려는 용병의 얼굴은 처절하다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끈적하고 탁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곳에 평화니 이상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말들은, 피 웅덩이 안에 가라앉아 버렸구나.
아인은 길드장 페리스가 자신을 왜 전장에 나서지 않게 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도로 삼킨 뒤, 아인은 다리에 힘을 주고 박차 나가며 닉모하지와 라칼 일행을 찾기 시작했다.
중간에 만났던 이후프는 ‘곧 따라가겠다.’라고는 말했지만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고, 닉모하지는 자신과 가트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강한 몬스터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모습이었다.
‘정면으로 마주치기 전에 어떻게든 데려와야 해. 그런데 어떻게 찾지…?’
아인은 순간적으로 성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은 뒤 앞으로 걸었다.
성벽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에르를 부르면, 당장이라도 라칼 일행과 닉모하지를 찾고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는 화력 조절을 힘들어하기 때문에 함부로 노출시키는 것도 위험할뿐더러, 자칫 별생각 없이 던진 공격이 닉은 물론 근방의 아군까지 휘말리게 할 우려가 있었다.
자신 때문에 이 지경에 빠진 것인데, 더 곤란한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아인은 윈디 한 개체를 소환해 에르에게 전할 말을 소곤거린 뒤,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나갔다.
‘패잔병들의 왕’이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어?”
눈앞의 풍경에, 아인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마치 불나방처럼, 그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자신이 알기로 ‘패잔병들의 왕’에게 사람들을 매혹시킨다든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증오심을 부추기는 기술은 없었다.
오히려 극도의 절망과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상대방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면 저건 카오스의 조각들일 것이다. 아인은 특별히 PC와 일반 사람들을 구분하는 능력이 없었음에도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달려드는 이들의 표정과 말을 보면 바로 알아챌 수 있기에.
“아, 나 죽겠다.”
“포션 남지 않았어?”
“이거 엄청 비싼 거라서. 그냥 한번 죽었다가 살아날게.”
“여기까지 패턴 7개 정도 보였어요. 이후로도 다른 패턴 있으면 길챗으로 계속 말씀해 주세요.”
“저희 곧 전멸요. 살아나면 바로 다리 노려 볼게요. 화이팅합시다.”
“등 노리시는 분들 같이 파티하실래요?”
그 표정에서는 공포도 처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커다란 부상을 당했을 때 아쉽다고 하거나, 눈앞의 존재가 징그럽다며 불평하거나 조금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
바로 주변에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피를 흘리면서 그들을 멍하게 보는 용병과 군인이 도처에 깔린 채.
악의 없는 기만이 거기에 있었다.
카오스의 조각들이 특별히 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조금은 신경 써 줄 수도 있잖아…!’
아인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급한 대로 물의 정령을 불러 주변의 부상자들에게 응급치료를 해 준 뒤, 제피로스를 이용해 날아올라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 순간 아인의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 길게 흔들리는 은색의 머리카락.
“용사님?!”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소란의 한복판에 있어서 목소리가 닿지 않은 걸까. 닉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몸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지만 이 경우는 자신이 초래한 것도 있었기에 크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저기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면 패잔병들의 왕부터 처리해야 했다.
생기를 빼앗을수록 더욱 힘이 강대해지는 저것에게 무작정 달려들어 봤자, 도리어 전력을 보태 주는 꼴밖에 되지 못한다.
처리 방법은 보통 두 가지. 원거리에서 끊임없이 폭격을 퍼붓거나, 한순간에 강한 공격을 넣어 재생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자신의 육체 능력이나 정령술로는 대단한 피해를 줄 수 없을 것 같고, 설정 프로그램 변경이라도 사용해야 유효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선 직접 다가갈 필요가 있는데, 패잔병들의 왕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 중 하나인 ‘망자의 부름’으로 인해 자신은 가까이 가기도 전에 먹잇감이 되어 버릴 것이 뻔했다.
“아, 미치겠네, 진짜…!”
요즘 들어 자신의 말투가 닉 모하지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생각하며, 아인은 제피로스를 이용해 공중에 오른 뒤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용-사-님!!! 거-긴- 위-험-해-요!!!”
바람의 정령을 이용한 목소리 증폭은 온 전장이 떠나가라 울렸고, 주변에 있던 카오스의 조각들은 물론 패잔병의 왕까지 일순간 자신을 쳐다볼 정도였다.
너무 출력을 크게 했나? 순식간에 쏠린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아인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다행스럽게도 닉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올려 아인을 쳐다보았다.
“너 거기서 뭐 하냐?!”
“당연히 도와주러요!”
“전장에서 빠졌으면 그냥 기다리고 있지 뭐 하러!”
“제가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냐고요! 게다가 이런 위험한 곳에 있으면 빼내 줘야죠!”
“어어 야, 잠깐 하지 마. 지금 나 잡고 빠지면 저거 그대로 나 쫓아오….”
아인은 뒷말을 더 듣지 않고 닉을 낚아챈 뒤 그대로 날아올라 후방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남은 PC들이 어련히 발을 묶어 놓고 잡을 거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패잔병들의 왕은 주변에 있는 PC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닉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악, 저거 뭐예요! 용사님, 뭘 하신 거예요!! 왜 이쪽으로 와요?!”
“그러길래 하지 말랬잖아!!”
쾅 쾅 쾅 쾅 쾅 쾅!
중급 정령을 끼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아인의 속도는 어지간한 말보다도 빨랐지만, 패잔병들의 왕은 육중한 몸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아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팔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께름칙한 비명과 함께 오라가 퍼져나가고, 발을 크게 구를 때마다 새까만 웅덩이가 생기거나 크고 작은 구울들이 수도 없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약한 카오스의 조각은 팔을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즉사해 버렸으며 나머지도 수백 기의 구울들 때문에 발이 묶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간다면 제대로 표적도 못 한 채 전장을 휘젓다가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짓밟아 엄청난 사상자를 낼 것이 뻔했다.
‘그걸 할 수밖에 없어. 그러면 잠깐이라도 멈춰야 해. 아주 잠시만 시간을 벌면 되는데.’
아인의 눈이 빙글빙글 돌며 온갖 타개책을 생각하고 있던 사이, 아인에게 안겨 있던 닉이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지금 너 하고 있는 거 되게 민폐인 거 알아?”
“알아요! 지금 아군한테 피해 안 가게끔 경로 조절하고 있….”
“아니, 아군 말고 나한테.”
“에?”
닉의 말에 아인은 벙찐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
“레이드 잘하고 있는 사람 무작정 빼내고 말이야.”
“그, 그거야 위험하니까….”
“난 죽어도 안 죽어.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요? 사람 눈앞에서 죽는 걸 보는 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우린 달라. 비단 너랑 나뿐만이 아니더라도. 너는 살아남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처럼 여기니까 그런 거겠지만….”
그 순간, 아인의 등 뒤로 거대한 나무 말뚝 수천 개가 솟아올랐다. 요란한 진동과 소음에 아인은 놀라 닉과 함께 넘어졌지만, 무언가가 더 이상 쫓아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신음을 흘리며 비척비척 일어서는 아인의 눈에 보인 것은, 자욱해진 먼지 너머로 나무 말뚝에 찍히고 거대한 돌에 뭉개진 패잔병들의 왕.
닉은 지친다는 얼굴로, 주저앉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저 이 세상에 나타난 이유가, 몬스터 잡으며 내 멋대로 유흥을 즐기고 싶을 뿐인 존재도 있는 거고.”
뒤이어 아인의 앞으로 이후프와 사하바티, 라칼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사정 때문에 제 발로 죽음에 가까워지려는 미친놈들도 있는 거야.”
말을 끝낸 뒤 닉은 힘들어 죽겠다는 듯 탄식하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인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닉과 라칼 일행을 번갈아 보았고, 이후프가 반가운 목소리로 먼저 다가왔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아인. 조금 더 잔당을 잡기 위해 전장에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목소리를 증폭시켰었지. 아인은 다시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게 사실은 에르하고 이야기가 된….”
“그래서 이건 어떻게 처리할 거지?”
“말 자르지 마세요!”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덩치를 처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지?”
“큿….”
사실이라서 아인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패잔병들의 왕을 처리하는 것이니까.
“이 상태에서 한 번에 죽일 수 있을까요?”
“쉽진 않겠지만 날뛰게 두는 것보단 낫겠지.”
라칼은 사하바티가 소환한 말뚝 위로 올라서더니, 그대로 뛰어내리며 길게 뺀 손톱을 사선으로 그었다.
“아악. 아. 끄아.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굵은 다리가 절단되며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이내 절단면에서 사람의 팔처럼 생긴 촉수들이 비집고 튀어나와 다리를 이어 붙였다.
라칼은 손톱에 붙은 피를 털어 낸 뒤 혀를 차며 말했다.
“통상적인 물리 공격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다른 방법이 필요해.”
그러면 역시 같이 오는 사람들과 함께 강한 마법이라도 사용하는 게 좋을까. 사하바티와 이후프가 간단한 논의를 하고 있을 무렵, 갑작스레 고함이 울렸다.
“여기야, 여기!! 그 필드 보스급 몬스터 찾았어!!”
아까 전 아인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소리. 바람의 정령을 이용한 목소리 증폭은 그렇게 대단한 기술도 아니다.
하지만 아인은 그 목소리에 유달리 얼굴이 창백해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큰일 났다.”
그리고 그곳엔, 기다렸다는 듯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