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49)
49화 : 인식의 차이
‘이건 또 뭐야…?’
아인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들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에는 글자는 읽어도 어떤 뜻인지를 모르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예 어떻게 읽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글자라기보다는 낙서나 기호 같은 모양.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것은 체력과 마나 옆에 각각 쓰여 있는 숫자였다.
자신의 체력과 마나의 상태를 알려 주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아인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체력과 마나의 상태를 정확한 수치로 알게 된다는 것은 전투 시에 엄청난 이점을 가져온다.
아직 여력이 있음에도 몸 상태를 장담할 수 없어 빠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위험한 상황임에도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없어 무리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전장이나 모험가의 이야기에서 종종 들려오는 사례이다.
마나 역시 마찬가지로, ‘한두 번쯤 마법을 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어림짐작을 할 뿐, 정확하게 마나의 남은 정도를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카오스의 조각들은 정말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이점을 가지고 있구나.’
질투는 나지 않았다. 그들은 태생부터 다른 존재니까.
다만 알면 알수록 알 수 없고 신기하기만 할 뿐인 그들이 왜 이 세계로 온 것일까 하는 의문은 있었다.
서풍의 숲에서 닉이 ‘이 세상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왔다.’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에 급하게 대응하려는 모습이 눈에 훤했기 때문에.
아인이 상태창을 보며 온갖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그를 난처한 얼굴로 보던 라칼이 다가와 머리를 꾹 눌렀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나. 혼자 궁상떨지 마.”
“아, 네!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라칼 님 걱정은 조금도 안 했어요!”
“대놓고 말하니까 좀 그런데. 아무튼 알겠다.”
라칼은 아직도 욱신거리는 몸을 꾹꾹 누르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전에 따로 수련한 적이 있나? 어지간해선 이 정도 수준이 되기 힘든데. 쉽게 생각하다가 정말 다칠 뻔했군.”
“따, 딱히 그런 적은 없는데… 심부름은 열심히 했어요.”
“그 심부름이 기초 체력이 됐을지도 모르겠는데. 산을 오르고 내리기라도 한 건가?”
“잡화점의 캐시에게 길드장님의 외상값을 대신 전해 주고… 외양간을 보수하거나… 잡일을 돕거나….”
“…이해가 안 되는데. 타고난 체질이 그런 건가.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마치 카오스의 조각 같아.”
“그, 그럴 리가요?!”
아인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웠다가 움찔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보면, 카오스의 조각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상식 외의 성장 속도에, 그들만이 볼 수 있다고 여겨지는 퀘스트창이나 상태창 같은 것까지 눈앞에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지난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은 온데간데없이 패잔병들의 왕에게 불나방처럼 돌진하던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머릿속에 또렷했으며, 그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했다.
더군다나 아무렇지도 않게 중요한 정보를 넘긴 뒤 홀연히 사라져 버린 이번 PC까지.
자신은 그런 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신기한 능력이 생겨난다고 해도, 카오스의 조각이 아닌 이 세계의 주민들과 가깝다고 믿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아인을 보며, 라칼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사로잡은 헤르도아의 사제… 카오스의 조각이 말하더군. 우리와 그들의 차이가 뭔 줄 아냐고.”
“결코 죽지 않는 몸…? 종족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
“나도 그런 걸 말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자는 간절함이라고 답했다.”
의외의 말에 아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간절함이요?”
“그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고.”
진심으로 목숨을 거는 이와 단순히 여흥으로 여기는 자의 마음가짐이 같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은 이 세상의 주민들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모습은 낯섦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간절하게 된다면.
이 세상의 무엇에라도 진심이 된다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일 수 있을까.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아인은 한창 페리스와 수련을 하고 있는 닉을 가리켰다.
“용사님은 간절한 쪽일까요?”
아인의 손짓에 라칼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간절한 게 맞긴 한데.”
***
“아오, 진짜 넌 내가 꼭 잡고 만다!!!”
닉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다가, 페리스가 든 검집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다.
말이 좋아 수련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농락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시각의 사각을 이용해 한순간에 허점을 몇 번이나 찔러 대더니, 악에 받쳐 휘두르는 닉의 검은 가볍게 회피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다시 공격하기도 했다.
“늉늉!”
“귀여운 소리만 내지 말고 한 대만 맞춰 보라니까?”
닉과 페리스가 하고 있는 것은 민첩성과 반사신경 기르기… 를 위시한, ‘페리스를 단 한 대라도 때려 보기’라는 이름의 훈련이었다.
말 그대로 닉이 가지고 있는 검으로 페리스의 몸을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성공.
지금까지의 행보 덕분에 상당한 명성과 함께 스탯이 올라간 닉은 처음엔 무척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첫 일격엔 닉을 얕보던 페리스의 방심으로 인해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그 이후로는 승산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페리스는 자신이 맞을 만하면 미끄러지듯 도망치고, 정면에서 힘으로 누르려는 것은 흘리고 되받아친다.
닉의 공격은 강하고 빠르긴 했지만 너무나 직선적이었으며, 한 번의 일격에 너무 많은 것을 거는. 소위 말해 뒤가 없는 공격이었다.
“화를 내니까 공격이 너무 정직하잖아. 첫 번째 공격이 빗나가면 그다음을 생각하라고 했지. 붕붕 휘두른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손목 그러다가 부러진다. 허리 펴고.”
페리스는 마치 아이에게 검술 강좌라도 가르치듯,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더니 검집으로 닉의 손목이나 허리를 툭툭 건드리며 교정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빡세게 해야 하냐고!”
“받아들인 건 너다? 게다가 카오스의 조각인데 금방금방 배울 거라 믿어.”
페리스는 빙글빙글 웃더니 허리를 앞으로 굽혀 가로 베기를 피하고, 닉의 다리를 잡아채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으아악! 이거 안 놔!?”
“반드시 무기만 사용하란 법도 없다는 걸 명심해. 이거야 원. 실전이었으면 수백 번은 더 죽었겠네. 어차피 수백 번 살아나서 상관없나?”
페리스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건 채 고개를 까딱이더니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닉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크악!”
“놓으라길래.”
“빌어먹을 진짜… 목 꺾일 뻔했잖아. 한 번에 체력 십 분의 일이 확 깎여 버리네.”
“죽지도 않으면서. 이제 네가 얼마나 부족한지 좀 감이 와? 거기엔 나보다 괴물 같은 놈들이 득실거린다고.”
“그럼 뭐 어떡해. 적당히 배우면서 실력 키우고 해야지.”
닉의 말에 페리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웃음의 종류가 조금 바뀌었다.
그저 유들유들하던 아까와는 달리 무섭게 가라앉은 듯한.
“적당히…. 로는 부족해. 한참 부족하지.”
검집이 닉의 목가에 들이밀어진다. 하지만 단순히 쇳덩어리였던 아까와는 달리, 그 표면에 검기가 서려 있었다.
즉, 저 상태로도 닉의 목 정도는 쉽사리 베어 낼 수 있는 상태.
갑작스레 바뀐 분위기에 닉이 움찔하며 몸을 굳히자 페리스는 목에 검집을 겨눈 상태로 천천히 자세를 낮춰 눈을 마주쳤다.
“한 가지 물어보자. 너에겐 헤르도아는 뭐지?”
“무, 무슨 소리야.”
“헤르도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고.”
“귀찮고 짜증 나게 하는 집단…? 대륙 메인퀘? 악의 세력?”
닉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리스는 아무 말 없이 손잡이를 거꾸로 들더니 그대로 검집째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런가. 예상은 했지만. 너에겐… 아니, 너희에겐 딱 그 정도의 감상이군.”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야?”
“바란 건 없어. 하지만 뭐가 부족한지는 알겠네.”
페리스는 그대로 손잡이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빛을 등진 페리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다.
그 목소리는 낮았으며, 눈빛은 차가웠다. 짙은 눈동자에선 간신히 가라앉힌 살기가 듬성듬성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나는 너희가 싫은가 봐.”
“….”
“갑자기 온 세상에 포자처럼 떨어져선,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녀석들. 나는 너희가 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부터 마음에 안 들어.”
헤르도아는 지금 대륙 주민의 대부분에게 직간접적으로 하나 이상의 손톱자국을 남겨 놓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가족이나 친구를 죽인. 누군가에겐 종족이나 가문을 몰살시킨. 누군가에겐 나라를 잃게 한 집단.
때문에 그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공포로 인해 도망칠지언정 설렁설렁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 원동력은 분노와 원망 같은 끈적하고 뜨거운 감정들.
하지만 카오스의 조각들이 보이는 행태는 그 옆에서 찬물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페리스는 닉을 담담하게 쳐다보았고, 미간을 좁힌 채 마주 보던 닉은 실소를 흘리더니 비죽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늘어놓나 했더니. 결국 동정해 주지 않아서 삐쳤다는 거 아냐?”
“뭐?”
“전후 사정 스킵하고 갑자기 옆에서 엉엉 울고 있어 봤자 몰입이 될 리가. K 신파도 그렇게는 안 한다.”
“네가 우리들이 겪은 아픔을 알긴 하는 거냐.”
닉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 목을 뚜둑뚜둑 풀더니, 다시 검을 들었다.
“모르는데 어떻게 슬퍼해. 정상적인 반응 아냐? 질질 짜는 건 뭐라 안 하겠는데, 사정 모르는 행인 잡고 왜 같이 안 울어 주냐고 화내면 어이가 없어.”
“무게감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깊숙이 파고드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나?”
“우린 용병같은 거 아냐? 무례하게 굴지만 않으면 되지 무심한 걸로도 난리야. 주변 시선과 상황에 이리저리 휘둘릴 정도면 네 복수심이 딱 거기까지였다는 거지.”
“하하….”
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별로 긍정적인 기운이 담기진 않았다.
페리스는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내버려 둔 뒤, 거대한 검을 빼어 들더니 천천히 손잡이를 잡고 꺼내 들었다.
일전 데스 나이트 군단은 물론 대륙 전쟁에서도 사용했던 것. S급 용병의 지위와 함께 ‘자색의 핏줄’이라는 호칭을 얻게 만들어준 무기.
이윽고, 페리스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닉에게 휘둘렀다.
일반인이라면 움직인다는 것조차 인식하기 힘든 속도. 정신을 차려 보면 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 것만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카앙-!
상대방을 ‘적’이라고 인식한 닉의 스탯이 순식간에 솟구치고, 검에 반응했다.
맞붙은 검에서 카가각거리는 쇳소리가 울렸다. 기괴한 오라와 비명이 스산하게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주 조금만 실수했더라도, 곧바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만큼 페리스는 진심이었다.
닉은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입꼬리를 슬 올렸다.
“화를 내니까 공격이 너무 정직하잖아.”
“…그런가.”
페리스는 다시 한번 웃었다. 아까 전의 그것보다는 가벼워진 느낌.
하지만 검을 맞댄 힘은 그대로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닉 쪽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수준에 맞춰 스탯이 올라가는 용사 패시브는 어느 정도 ‘승부’라는 것이 이루어질 정도로 만들 뿐이다. 절대로 상회하는 수준으로 높아지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드득.
결국 힘과 칼의 경도에서 지기 시작한 닉의 검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
“일발역전.”
짧은 스킬명이 읊조려지고, 닉은 순식간에 페리스의 등 뒤로 위치를 옮겼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에 페리스의 균형이 크게 흐트러졌다. 이내 급하게 발로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에라이!!!”
“크악!”
온 힘을 다해 머리를 주먹으로 가격한 닉은 손을 툭툭 턴 후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아인 때문에 머리 복잡한데 너까지 짜증 나게 하지 마.”
바닥에 머리를 박은 페리스는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얼굴로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아인이 왜. 그리고 이건 내가 졌다고 하기엔….”
“잠깐.”
닉은 갑작스레 손바닥을 뻗어 페리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캡슐에 내장된 알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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