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6)
6화 : 전직
목숨을 거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버린다는 쪽에 가까운 전술.
아니, 이건 전술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의 무모함이었다.
“리치여도 마나 다 떨어지면 할 만하겠지.”
“그런 꼴로 나와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얕잡아도 분수가 있지!”
리치의 말에 닉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몸을 몇 번 움직여보더니, 별 시답잖은 말이라도 들은 얼굴로 천천히 걸어갔다.
“뭐, 실제였다면 아프다고 뒹굴었겠지만. 여긴 아니잖아. 아무리 현실성 추구한다고 해도, 알피지 게임에서 체력 떨어졌다고 못 움직이게 하면 욕먹어.”
“그게 무슨 말…!”
리치의 대꾸가 채 끝나기도 전, 닉이 바로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리치는 다급히 지팡이를 쥐었다가 줄어드는 마나를 의식했는지 주변의 멧돼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 마음의 어두운 곳에서 손짓하리니….”
“가만히 구경할 것 같아?”
하지만 명령은 끝까지 이행되지 못했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지팡이와 칼이 부딪혔다.
붉은 송곳니들이 움찔거리기는 하지만, 세심한 명령을 이행하기에는 계속되는 공격이 방해가 되고 있었다.
“크르르…!”
더욱이, 그 사이에 기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늑대 수인의 울음소리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움찔거리던 멧돼지들이 완전히 겁을 먹은 듯 뒤로 슬슬 물러나기까지 했다.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동물계 몬스터들을 강제로 위축시키는 수인 고유의 기술 중 하나.
의지가 약해져 명령도 듣지 못하고 위압감에 짓눌린 멧돼지들은 이 상황에서 별다른 전력이 되지 못할 터였다.
“쓸모없는 돼지들… 하지만 고작 시간을 조금 끈다고 뭔가 달라질 성싶으냐!”
사실 아인의 일행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아인은 이 상황을 마냥 구경할 여유가 없었다.
아까 전에 꺼내두었던 정령석을 이용해 중급 정령들을 불러들이자 아인의 몸속에서 순식간에 마나가 빠져나갔다.
자연 상태의 정령을 무작위로 부르는 것이 아닌, 특정 개체와의 일대일 계약이 되는 정령석 계약.
마나의 소비가 상당한 편이었지만, 계약자와의 오랜 동화로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의중을 파악한 뒤 알아서 기술을 사용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땅의 중급정령 불칸과 바람의 중급정령 제피로스 역시 마찬가지. 불칸은 부상자들의 주변에 두터운 돌의 벽을 세우고, 제피로스는 아인이 고함을 지르는 타이밍에 맞춰 바람을 소리가 깃든 바람을 멀리까지 퍼트렸다.
“여기, 좀. 누가 도와주세요!! 리치예요! 리치가, 여기 있어요!!!!!”
말을 하는 동안에도 수십 번의 낙뢰가, 닉의 짧은 기합과 신경질적인 신음을 뱉는 리치의 목소리가 아인의 귀를 때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닉은 속절없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길 반복할 것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것이 생생했다. 귀가 좋다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너무나 괴로웠다.
“제발 누구라도 와서 도와주세요!”
검은 벼락을 손안에 끌어모으던 리치가, 결국 아인 쪽을 돌아보았다.
“정말 더럽게도 시끄럽군.”
리치가 닉을 상당히 성가셔하곤 있지만, 딱 그뿐.
장비가 좋더라도 결국은 실력이 부족한 데다, 신성 축복은커녕 은제 무기도 가지지 않은 닉은 리치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 힘들었다.
지원군이 오지 않을 경우엔 남은 것은 몰살이라는 미래밖에 없었다.
멧돼지들을 막고 있던 늑대 수인은, 힘겹게 발톱을 세우더니 돌벽 옆으로 나와 아인에게 향했다.
“여기서 벗어나. 더 휘말리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시간을 벌어다 준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하겠다.”
바람의 정령이 펼친 능력으로 아직 목소리가 크게 퍼지고 있었는지, 닉이 그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가면 돌발퀘 취소에 쌩돈만 날리는데! 절대로 못 가!”
“뭐라고 하는 거지? 일단 절대로 못 간다는 건가. 정의감이 너무 투철해도 문제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정의감과 신념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대로라면 백 번이고 더 죽을 것이 뻔했다.
“제발, 아무도 없어요? 누가 듣고 있다면 여기 빨리 와 주세… 악!”
아인이 다시 도움을 요청하려고 소리를 지르던 찰나, 검은 번개가 정확하게 아인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가고 리치의 음산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여기서 저 녀석을 계속 공격해 봤자인 것 같은데… 손쉬운 먹잇감이 여기 있었군. 어차피 다른 놈들은 다 잡은 반 시체나 다름없으니, 너부터 죽여주마.”
강대한 마력은 농도 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한 곳에 응축된 검은 벼락은 파직거리며 어떤 형태를 갖추더니, 흉포한 마수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 살기는 정확히 아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아인!!”
“더욱 슬퍼하고 좌절하라. 내 새로운 영양분이 될 터이니. 크흐, 크하하하!!”
사악한 광소과 함께, 응축된 번개가 한번 꿈틀거리더니 아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끝까지 목표한 대상을 추적하여 물어뜯는 검은 사냥개와 같은 것.
아인은 혀를 차며 땅을 박차 피했지만, 번개는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아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당장에라도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했고, 결국 닉은 방패를 손에 꽉 쥐더니 아인을 보며 소리쳤다.
“파티원 위치로 이동!!”
그 외침이 들리는 동시에 아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윽고 격발된 번개가 충돌하며, 일순간 주변이 새까맣게 물들 정도로 검은 마력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어어…!”
“…….”
닉은 온몸이 새까맣게 그슬린 채 서 있었다.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고, 장비는 강한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며 반파되었다.
아인이 숨을 삼키며 엉망이 된 닉의 몸을 붙잡았다. 그 뒤로 리치의 비웃음이 땅에 뚝뚝 흘렀다.
“닉 모하지 님… 왜 저를!”
“아니, 너 죽으면 패널티 심할 것 같아서 그런건데….”
“대단한 신파극이군. 하지만 너희는 이제 끝….”
“저는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이 정도로 난이도 높으면 퀘스트 보상이 기대되니까. 포기할 수는 없지.”
“후우… 그럼 저도 어떻게든 도울게요.”
“나도 여기 있다. 너희끼리만 얘기하지 마라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
리치의 고함이 울려 퍼지고, 아인과 닉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아보았다.
이제 리치를 방해하는 자는 없었다.
탁한 마력이 재차 집중되기 시작하며, 늑대 수인에 의해 의지가 약해지고 있었던 멧돼지들에게서 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닉은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리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위쪽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휘적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수락.”
“지금까지 피라미들 주제에 잘 버텼다만.”
“수락, 수락.”
“이 위대한 리치는 너희를…!”
“에잇 읽기 귀찮아. 모든 항목에 동의.”
“… 좀 들어라 이 망할 쓰레기들!”
“아, 미안. 진짜 미안. 갑자기 퀘가 떠가지고. 근데 너 그렇게 있어도 되냐?”
“무슨 소리를…?”
닉은 리치의 발치를 가리켰다. 그곳엔 나무줄기 하나가 그의 발목뼈를 휘감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리치는 당황하며 발을 털었지만 그것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제 의지로 잡고 붙잡는 것처럼.
당장 멧돼지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그들을 억제하고 있던 늑대 수인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지친 웃음을 보였다.
“늦었다. 사하바티, 이후프.”
“최대한 빠르게 부른 건데도.”
“하하 죄송합니다. 요란스레 부르면 눈치챌 것 같아서.”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중상을 입고 쓰러져있던 드라이어드와 골렘이, 아인과 닉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고하고 청초한 얼굴에 흑색의 장발을 가진 드라이어드와, 이목구비를 조각하지 않은 인간 조각상처럼 생긴 골렘.
개중 이후프라고 불린 골렘은, 매끈한 얼굴을 아인 쪽으로 돌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입은 없어도 상대방의 의식에 직접 말을 거는 방식.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따뜻한 미소를 짓는 것만 같은 신사적이고 안온한 분위기가 있었다.
“당신이 펼쳐준 바람의 정령의 소리가 닿았습니다.”
“네…?”
쿠릉. 그 말이 끝나자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곳곳의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고 리치를 비롯하여 멧돼지들도 동요하고, 이곳으로 튀는 공격을 막기 위해 돌벽을 세워놓고 있던 불칸이 꼬리를 살랑이면서 이곳으로 오는 이들을 반겼다.
“진심 어린 목소리. 당신과 저희의 요청을 형제들은 한 조각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고.”
갈라진 곳에서 날카로운 뿌리가 솟구쳐올라 멧돼지 한 마리를 꿰뚫었다. 요란한 비명이 들판에 퍼졌다.
당황한 리치가 급하게 돌격 명령을 내리고, 수많은 멧돼지들이 아인과 닉을 향해 쇄도했다.
모든 것을 짓이길 것 같은 육중함이 달려들었지만, 바위로 이루어진 손이 땅에서 솟아올라 열 마리에 가까운 개체를 멀리 튕겨냈다.
“대지는 심판에 응했습니다.”
솟아오른 뿌리들은 서로 엉겨 붙더니 열 명이 넘는 앤트와 드라이어드가 되었으며, 바위 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몸체를 드러내며 거대 골렘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사하바티라 불린 흑발의 드라이어드는, 느리게 아인 쪽을 바라보더니 웃었다.
“착한 아이, 이제 걱정하지 마. 불길한 마나는 모든 자연의 적.”
땅이 뒤집히고, 거대한 멧돼지들이 한꺼번에 뿌리에 꿰뚫리거나 통째로 날아다니는 거짓말 같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몇몇 멧돼지의 이빨이 바위와 뿌리 일부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지만, 손상된 부분은 금세 땅을 이용하여 수복시켰다.
완벽한 형세 역전이었다.
“이이…! 피라미같은 놈들이…!”
리치는 분노에 찬 괴성을 질러대더니 자신의 주변에 커다란 자기장을 펼쳤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모든 이들이 열기와 함께 피부가 찌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 아직도 저런 기술을 숨기고 있대?”
닉의 투덜거림과 함께 모든 이들이 잠시 물러난 사이, 리치는 지팡이에 거대한 마나를 응축하기 시작했다.
“…무지 위험해 보이는데.”
리치는 아인의 걱정에 고개를 숙이고 불길한 웃음을 뱉은 후, 기고만장한 태도로 닉을 쳐다보았다.
“고작 인간 주제에 날 이기려 들었는가. 나는 이전 헤르도아에 몸담았던 존재. 최후에 웃는 자는 내가 될 것이다. 언데드 군단을 만들 생각으로 아껴둔 마력이지만… 영혼까지 부숴주지. 이걸 맞고 살아남은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플래그 그만 세워! 보기 안쓰러울 정도야!”
“네 몸은 실험장으로 데려가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병에 가둬 내 실험체로….”
“평생? 병에 가둬?”
다시 손을 휘적이며 리치의 말을 끊은 닉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게 물었다.
“있지, 네가 모르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어. 알려줄까?”
“…무엇이냐?”
지식을 탐하고자 타락한 리치답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했다.
닉은 헛웃음을 잠깐 흘리더니, 한 손으로 손가락 세 개를 피고 차례대로 접었다.
“첫째. 버그 때문에 위치렉 걸려서 끼거나, 어쩌다 나가는 게 불가능해진 지역에선 명령어 입력하면 마지막 비전투 지역으로 이동해. 슬래시 치고 비상탈출.”
“뭐?”
“둘째. 넌 사망플래그를 지나치게 많이 꽂았어.”
“그게 무슨 말이냐!”
“셋째.”
닉은 다른 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그 위압감이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리치를 처음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했다.
“나 아까 받은 거 전직퀘거든?”
리치와 비교해서, 조금도 밀려 보이지 않았다.
“이제 너보다 강하다는 소리야.”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