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60)
60화 : 더미 데이터들
일행은 마라가 가지고 있는 발광 구체를 이용해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었지만,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은 당장 무엇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인의 기억으로도 에리식톤의 위장 안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살아서 빠져나온 이들이 없을 테니까.
당장 바닥에서 무언가 솟구쳐 올라오진 않을까. 천장에서 위액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지진 않을까. 아인이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사이에도 마라와 닉은 두런두런 잡담을 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실상 우리는 지금 바이러스 같은 거 아니냐?”
“몰라! 하지만 우리한테 잘못은 없잖아. 통로가 생겼길래 들어온 것뿐이라고.”
“그런데 그 통로가 갑자기 왜 생긴 거야.”
“낸들 알아? 인공지능인가 뭔가가 보내 줄 만하다 생각해서 그런 거 아냐?”
‘어떻게 내려왔는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
아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 다른 의미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무렵, 성큼성큼 발을 옮기던 마라가 문득 멈춰 서더니 가지고 있는 발광 구체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여기에 뭐가 잔뜩 있는데.”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거대한 공간이 드러나고, 옅은 선홍빛을 띠는 벽과 구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빚다 만 찰흙 덩어리처럼 보이는, 혹은 반쯤 녹은 고깃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
둥글게 보이는 형체는 사람의 머리일까. 하지만 이목구비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이미 한없이 뭉개져 구멍의 흔적 정도만 보일 뿐이었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닉은 한숨을 쉬며 필터링을 씌워 버렸고, 마라는 싱글싱글 웃으며 더 빨라진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인은 몇 번 구역질을 한 뒤 어두운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에리식톤에게 먹힌 사람들… 일까요?”
“그렇겠지? 내 생각으로는 시간이 지나서 레이드 몬스터로 나왔을 경우엔 얘들도 어떻게 살아나서 우리를 공격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려나요?”
“아마?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달려들면 그거대로 재밌겠는걸. 확인해 볼까?”
“불길한 소리는 마시구요….”
“이렇게 대단한 설정을 가진 몬스터 안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그거대로 문제라고!”
마라는 전용 스킬인 ‘미지의 탐구가’를 발동시킨 후 육체 덩어리에 가볍게 손을 대더니,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차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덜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가, 그냥 디자인용 더미 데이터일지도 모르겠어. 시시해.”
“더미 데이터요?”
“뭐라고 해야 하나. 찌꺼기? 유용하지 않은? 으으음…, 별 의미 없는 시체 덩어리라고 말해 주는 편이 이해가 빠를까.”
“…….”
더 재밌는 것은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던 마라는 미간을 좁힌 아인을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왜 그래?”
“말씀이 좀 과하신 것 같아요. 여러분이 저희 세상의 사람들과 목숨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에, 에에. 아니 나도 일부러 시비 걸려고 말한 건 아닌데. 진짜로 그 비슷한 의미라고!”
“결국 끔찍하게 희생당한 사람들한테 유용하지 않느니 의미 없다느니 하는 것부터요! 효용성이 없다곤 해도, 최소한의 애도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시체 덩어리야. 저스트. 그냥. 단지 시체 덩어리. 진짜로 보이는 설정 스크립트가 그랬어. 이걸 너한테 말해 뭣 하나 싶지만 나도 돌아 버리겠다.”
“세상에 그냥 시체 덩어리가 어디 있냐구요!”
마라는 자신도 답답한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몇 번이고 침음을 흘리다가, 아인의 어깨를 잡고 잔뜩 고심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대한 맞춤형 설명을 해 줄게. 아인, 어렸을 때 인형 놀이 해 본 적 있어?”
“노예상한테 인형 취급은 당한 적 있어요.”
“찰흙 가지고 논 적 있어?”
“배고파서 흙 먹은 적은.”
“닉, 나 좀 도와줘라. 이거 어떡하냐? 문답이 이어질수록 내가 쓰레기가 되어 가는 기분이야.”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쓰레기라 그렇거든. 닉은 팔짱을 낀 채 한심한 얼굴로 마라를 바라보았지만, 무엇을 설명하려고 했는지는 저도 알 수 있었다.
가령, 인형 및 찰흙을 가지고 병정놀이나 소꿉놀이를 할 때, 처음부터 ‘죽어 있는 사람’ 역할을 만들어 놓는 것과 비슷하다.
시작할 때부터 죽어 있는 역할은 별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죽어 있는 사람’이라는 짧은 한 문장으로 그 본분을 다한 것이다.
거기에 도덕이나 윤리 관념이 얽히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과몰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써먹지도 않을 텐데 귀찮게 설정을 붙일 필요도 없고.
물론 그것이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이고, 삶을 살아온 이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미완성 데이터에 그런 설정이 있을 리가. 있다면 마라가 먼저 반응했겠지.’
마라를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걸 구태여 언급해서 말싸움에 끼는 것은 귀찮았다.
결국 마라만 울상이 된 채 따박따박 말을 뱉는 아인을 보다가, 더 말을 질질 끌기는 싫었는지 한 번 크게 손뼉을 치고 아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좋아. 애도를 하건 뭘 하건 그건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내가 말하면서도 이상하지만. 그것들은 시체로 태어난 거야. 그것뿐이야.”
시체로 태어났다. 정말 이보다 이상한 말이 없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닉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인데, 아인이 그것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냥 상황 넘어가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난 거짓말한 적 없어. 정 안쓰러우면 발광 구체 다른 거 하나 빌려줄 테니, 애도하고 와. 나랑 닉은 다른 거 보고 있을 테니까.”
마라는 품에서 조금 작은 크기의 빛나는 구슬을 하나 더 꺼낸 뒤 아인에게 건네고, 한숨을 쉬며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닉에게 다가갔다.
“너무 힘들어….”
“아무리 봐도 인과응보인데. 너 이제 아인한테도 미운털 박힌 것 같네.”
“나 너한테도 미운털 박혔었니?!”
“계속 보다 보면 눈치가 빠른데 없단 말이야.”
“와! 나 그 말 진짜 많이 들어.”
“그런 말 하는 것까지 완벽하네. 아무튼 노닥거리지 말고 탐사나 이어 가자. 아인한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파티원 위치로 이동하면 될 테니.”
칭얼거리며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닉을 졸졸 쫓아다니던 마라는 마지막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인 지금 파티원이야?”
“응. 만났을 때부터 쭉 하고 있어. 별로 이상할 건 없잖아? NPC 파티원 하는 시스템이야 뭐.”
그 말대로, 파티에 NPC를 끼워서 진행하는 경우는 별로 드문 것도 아니다.
특히나 게임 초반일수록 대부분의 NPC가 유저보다 레벨이나 실력 면에서 앞서 있기 때문에, 대규모 용병 NPC와 파티를 짠 뒤 버스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너처럼 오래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조금 이상할지도.”
마라가 히죽 웃으며 몸을 완전히 폈다. 닉은 한숨을 쉬며 힐끔 얼굴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시비 거는 거 아니야. 그냥 대단하다고? 진짜 친구? 동료? 같은 느낌이고. 과몰입 같긴 한데 네 정도야 아주 건전하고 애교 수준이니까.”
“내가 과몰입이라고?”
“자신의 플레이를 되새겨 본 다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보지 그래.”
“…….”
닉은 한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짜증이 나긴 하지만 대놓고 반박하기에는 최근에 아인이나 에르에 대해 생각하는 빈도수가 많아지긴 했으니까.
마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닉을 보고 깔깔 웃으며 등을 팡팡 쳤고, 멋대로 팔짱을 끼며 주위를 돌아다니더니 눈동자만 힐긋 옮겨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아인하고는 친구 추가 해 봤어?”
“무슨 소리야. NPC는 안 되지 않아?”
“그렇지? 그렇지? 내가 별 소릴 한다. 내가 뭐 착각했나 봐~ 아, 저기 뭐 징그러운 거 보이는데 같이 보러 가자.”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팔 풀어. 야, 아인! 삽질은 적당히 하고 뭐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 이쪽으로 와!!”
닉은 작은 빛이 드리운 곳을 향해 소리를 한 번 지르고,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로 빤히 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
아인은 수십 개체의 시체가 엉기고 들러붙어 있는 육체 덩어리 앞에 선 채,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셋이 같이 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주 가까이서 귀를 기울이니 희미한 신음 같은 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체에서 새어 나오는 것인지, 해방되지 못한 영혼에게서 나오는 흐느낌인지, 자신의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인은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듣다가, 육체 덩어리에 손을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설정 프로그램 개입.”
[접촉한 몬스터 및 NPC의 설정을 확인하고 거기에 개입 및 왜곡이 가능합니다.현재 개입 가능한 몬스터 정보: 시체 덩어리1]
‘시체 덩어리1’이라는 문장에 아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체 덩어리1: 첫 번째 시체 덩어리현재 변경 가능한 설정: 설정 스크립트 수정, 롤백, 리셋, 데이터 삭제]
이어지는 문장도 그것뿐이었다. 어떤 비극으로 인해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 안에 들어 있는 시체 덩어리들의 사연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인은 이빨을 한 번 꾹 깨물더니, 몇 번이나 ‘롤백’을 읊조렸다. 데스 나이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시체로나마 돌아가게 한다면 안식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롤백이라는 주문은 인지되었지만, 신음이나 끔찍한 외양은 그대로였다.
롤백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 아인의 머릿속에 마라의 이야기가 상기되었다. 마치 정말 이렇게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처럼 그들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콧잔등에 열이 올랐다. 소리를 한번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후, 아직 사용하지 않았던 ‘리셋’과 ‘데이터 삭제’를 힐긋 보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어 버렸다. 어느 정도의 반향을 일으키는지도 모를 것을, 남들과 같이 있을 때에 사용하기는 싫었다.
“설정 스크립트 수정.”
『이름: 시체 덩어리1
호칭: –
사명: –
레벨: –
성향: –
체력: – 마나: –
근력: – 민첩: – 지력: – 행운: – 명성: – 』
[설정을 수정하시겠습니까?]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아인은 이 능력을 사용하게 된 후 처음으로, 아주 온전한 정신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스크립트를 선택 후 수정해 주십시오.]이번 스크립트는 수정하거나 삭제할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설정된 것조차 제로였으니 말이다. 아인은 자신에게 주의 사항을 소리쳐 알려 준 뒤 외각을 조사하는 마라와 닉을 힐끔 보고선, 상태창을 짚고 천천히 글을 추가해 나가기 시작했다.
‘시체 덩어리라는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들어. 처음부터 시체가 생겨났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분명히 이 사람들도 어떤 사연이 있고, 에리식톤을 처치하러 나왔다가 비극을 맞이하게 된 거야. 에리식톤을 처치하러 나온 사람들이 강하지 않을 리도 없고.’
설정이 조금씩 추가된다. 아인은 온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짜 내며 문장을 추가하거나, 일단은 되는 대로 숫자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름: 언젠가의 영웅들
호칭: 잊혀지지 않을
사명: 영웅
레벨: 400
성향: 선
체력: 총합 100,000 마나: 총합 100,000
근력: 총합 10,000 민첩: 총합 10,000 지력: 총합 10,000 행운: 0 명성: 총합 10,000
검사 펨푸스, 도끼 전사 라훌란, 성기사 케니아루, 냉기 마법사 예크투, 화염 마법사 파야, 사제 리 세티스바흐, 드루이드 뱅, 쌍둥이 레인저 미류와 미아, 정령사 린. 총 10명의 영웅들이 재앙 에릭시톤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흔적.』
그 외에도 아인은 옛 기록에서 스쳐 지나가기만 하고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던 이름들을 참고로 꽤 자세하게 설정을 추가하고, 하나를 끝마치면 곧바로 주변에 있는 시체 덩어리에 가서 비슷한 작업을 실시했다.
어느새 100여 명에 가까운 시체 덩어리들에게 이름과 설정이 붙여지고, 설정 스크립트가 저장이 완료되는 순간.
쿠르릉.
“-파…… 아…. 고… 파. 배.”
짧은 울림과 함께, 둔중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리는가 싶더니.
“어…?”
아인의 앞에 있던 살덩어리가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