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61)
61화 : 살아 있는 자들
“근데 진짜로 시체 덩어리들 널려 있는 거 빼면 뭐가 없는데?”
“당연하지. 보니까 대충 형태만 갖춘 채로 더미 데이터 집어넣고 천천히 개발 중인 것 같네. 이곳의 중점이 되는 핵 같은 거라도 찾아보려 했는데 비슷한 것도 안 느껴지고.”
“특정 행동이나 루트 밟아 가면서 깨는 레이드인 거 아냐?”
“그러면 지금 여기서 돌아다녀 봤자 그냥 견학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 너도 뭣 좀 해라. 계약 위반으로 쳐 버린다.”
“잘못하다가 치명적인 오류 생겨서 아이피 밴 먹고 고소당할까 봐 무섭다고….”
닉은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에 이상이 생길까 검 하나도 제대로 꺼내 들지 못하고 있는 판국이었고, 반대로 마라는 되는 대로 시체 덩어리에 발길질을 하거나 바닥에 삽을 쑤셔 보는 둥 온갖 짓은 다 하고 있었다.
음습하고 찝찝한 거대 공간. 그리고 사방에 늘어져 있는 눌어붙은 시체들. 그 밖에 볼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자, 마라는 깊게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재미없어!”
“구현도 덜 된 곳인데 당연하지!”
“너희랑 있으면 뭔가 신나는 일이 잔뜩일 것 같았는데. 물론 여기 들어온 건 정말 예상 못 한 일이라 처음엔 좋았지만. 그래도 기대한 게 있다고.”
“역시 노리는 게 있었구만…. 대체 뭘 기대한 거야?”
“한계치도 한번 겪어 보고, 아슬아슬하게 살거나 죽기도 해 보고,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 드라마…. 동료들 간의 끈끈한 우정과 신뢰…. 그리고 배신과 사랑!”
닉은 손톱에 낀 때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그렇게 대놓고 딴짓하면 아무리 나라도 좀 상처받아.”
“미안. 삽소리를 들으면 손톱에 때가 끼는 병이 있어.”
“작은오빠가 치료술사도 겸하고 있는데 데려올걸.”
마라는 입을 쭉 내민 채 무어라 툴툴거리더니,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근데 동생이나 언니 있어?”
“여동생 있는데, 왜.”
“참 살갑지 못한 언니겠다. 나처럼 깜찍하고 활발한 자매가 있으면 얼마나 좋니?”
“으!”
“진짜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다는 얼굴 하지 말아 줄래?”
“미안. 싫은 소리를 들으면 싫은 얼굴을 하는 병이 있어.”
닉은 심드렁하게 마저 손톱 정리를 마친 후, 손을 툭툭 털고 마라를 보았다.
“그럼 넌 사 남매야?”
“응! 동생하고 작은오빠하곤 같이 길드에서 게임도 하고 있지롱.”
“큰오빠는?”
닉의 질문에, 브이 자까지 하며 웃고 있던 마라의 낯이 바로 일그러지며 혀 차는 소리가 났다.
“걔도 게임은 하는데~ 별로야. 마음에 안 들고. 지가 라노벨 주인공인 줄 알아. 그냥 회사 일이나 얌전히 하지. 여기 온 것도 아마 그 새끼 때문인 것 같은데.”
여기 온 거? 닉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으려는 찰나, 갑자기 공간이 크게 흔들리며 육중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배…… 파…. 고파…. ……아. 아아….”
“어라.”
“엥?”
아까까지는 미동도 않던 공간이 더 크게 요동치고, 몇몇 시체 덩어리들은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마저 보였다.
십수 명의 인원들이 서로 녹고 엉겨 붙어 끔찍한 모양새가 된 와중에, 몸을 떨어트리기 위해 신음을 흘리며 꿈틀대는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마라의 눈은 일순간 당황에 빠졌지만, 이내 호기심으로 그득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앞에 떠오른 퀘스트창 하나. 금색 테두리로 번쩍이는 그것은 전 유저에게 통용되는 대륙 메인 퀘스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퀘스트명: 포식하는 자 에리식톤대륙 어딘가에서 과거의 재앙 중 하나였던 에리식톤의 부활이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아직 그것은 완전히 부활하진 않았으나, 이대로 아무 조치를 행하지 못한다면 끔찍한 재앙이 다시금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퀘스트 성공 조건:
보상: 대량의 경험치와 명성, 가장 가까운 영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
실패 시: ???]
이는 닉에게도 동일하게 보였고,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더니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정반대의 표정을 지었다.
“늉됐다.”
“늉됐다!”
닉은 절망에 빠진 얼굴. 마라는 환희에 찬 얼굴.
특히나 세계의 정세 및 정보 파악에 예민한 헌터 길드의 길드 채팅창은 일정 계급 이상만 사용할 수 있는 채팅방조차 불이 나고 있었다.
[야, 지금 무슨 일이래? 저번 업데이트로 나온거 오시눈 아니었어?] [같이 업데이트 됐나본데.] [아니 미친 무슨 한 번에 재앙 두 개가 업데이트된대? 게다가 에리식톤은 이거 살펴보니까 설정상 죽이는거 가능은 한 거야?] [에리식톤 관련 소재 아는사람? 장소 파악 돼?] [아직 아무 곳에서도 발견 못했어요. 에리식톤 관련 정보는 잡다한 것도 좋으니까 죄다 비싸게 받아. 여기에서 이기는 길드가 영향력 세게 가진다.]‘와아~’
마라는 솟구쳐 올라가는 채팅방을 빤히 보더니, 쿡쿡 웃으며 알림을 꺼 버렸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재밌는 상황을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재미없는 방식으로 풀어 가긴 싫었다.
‘오시하는 눈과 에리식톤이 싸우면 누가 이기려나?’
마라가 그런 생각이나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즈음, 퀘스트를 받지 못한 아인은 변화하는 주변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다가 ‘파티원 위치로 이동’을 사용해 닉에게 돌아왔다.
“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에리식톤이 부활하려 하고 있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그 대답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입이 파르르 떨렸다.
“좃됐어요.”
“엔피시는 필터링 없는 거 진짜 부럽네.”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요! 원인은 알고 계세요?”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근데 좀 힘들지도 모르겠다.”
닉은 애매하게 웃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곳에 있는 절반가량의 시체 덩어리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덩어리에서 인간의 형태들이 하나씩 떼어졌다.
누군가는 마치 검을 쥘 듯 자세를 취하고, 누군가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허공을 휘적이며 주문을 읊었다.
처음에는 그냥 행동을 흉내 낼 뿐인 몸짓에 불과했지만, 점차 그들의 주변에 검붉은 오라가 휩싸이더니-
천천히 그들은 어비스 나이트와 엘더 리치들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어디서 나온 거지?”
“잘은 몰라도, 아마 저것들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진 것 같은데. 저녀석들 안에 있는 영양분이라도 흡수했나. 네이밍 몬스터 펨푸스, 라훌란, 예크투…. 아깐 보이지도 않던 이름들이 막 생겨나 있어.”
마라의 말에, 아인은 크게 흠칫하더니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이름들은 아까 자신이 이곳에 있는 시체들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임의로 붙여 놓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름을 붙이고, 멋대로 설정을 짜 놓은 것이 오히려 재앙을 깨우는 시초가 되어 버린 걸까.
“으….”
초점이 흐려지고 호흡이 불안해졌다. 누가 봐도 티가 날 정도로 몸이 떨리기 시작하자, 마라는 으응? 하고 아인을 쳐다보더니 깔깔 웃으며 가볍게 끌어안았다.
“뭐야, 뭐야~ 겁먹었어? 아니면 내가 아까 전에 카오스의 조각들을 선두로 세워서 방패로 삼느니 뭐니 한 것 때문에 그래? 그거라면 걱정 마! 몇 번 죽어도 네 탓은 안 해! 정말로!”
“으으으으으으으…….”
“아니구나! 잘못 짚었구나! 불안함을 한층 더 안겨 줬나?! 미안해!!”
닉은 시선을 돌려 아인을 힐끔 보았다. 간신히 호흡을 진정시키며 시선이 오갈 데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이제 표정만으로도 대충 어떤 느낌인지 짐작이 가고 있었다.
‘저거, 자기가 뭔 일 저지르고 불안해서 그러는 얼굴인데.’
닉은 눈을 깜빡이다가, ‘파티만 들을 수 있게’ 설정으로 잠깐 바꿔 놓은 후 아인에게 말했다.
[이거 마라는 못 들으니까 조용히 하고. 여기에 대답해도 나만 들릴 거야. 무슨 일 저질렀어? 안 혼낼 테니까 말해. 알아야 대처를 하든 파훼를 하든 하지.]닉의 목소리에 아인은 어깨를 움찔했다가, 눈치를 살살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자세하겐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제가 저분들에게 설정… 아니,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아서… 그것도 꽤 강하게요.]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아인의 말에 닉은 한숨을 쉬더니, 검을 빼 들고 마지막으로 파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삽질할 시간 있으면 네가 벌인 일 수습하는 거 생각이나 해.]그것을 마지막으로 닉은 전체 음성으로 변경하고, 자신을 적대하는 어비스 나이트나 엘더 리치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스탯 올라가는 수준이 무슨…. 이것들 하나같이 능력치가 괴물인 모양인데.”
“…….”
일단 과거에 엄청났다는 설정을 주고 싶어서 아무렇게나 능력치를 대폭 올려 버린 장본인인 아인은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너무 강해 어쩔 수 없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대일로 영웅급의 언데드들과 순수한 전투기술로 이길 자신도 없었다.
‘롤백해야 돼. 그러면 처음의 그 시체로 되돌아갈 거야. 나 때문에 대륙의 사람들에게 조금도 피해를 줄 수는 없어.’
공간의 특성 때문인지 정령과 친화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급 정령인 윈디는 나오지도 않고, 제피로스를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칠 것 같았다. 주변에 바람도 없으니 정령화를 기댈 수도 없다.
그러면.
“제가 앞장서서 이목을 끌게요.”
자세를 낮추고 무릎을 굽힌다. 잔뜩 눌러 놓은 스프링처럼 근육에 힘을 준다.
아인의 공격 태세에 상대방도 경계를 하며 맞대응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지만, 그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말 그대로 바람처럼 튀어 나가 어비스 나이트의 머리를 발로 차 버렸다.
소멸되거나 하진 않았지만 충격으로 인해 잠시 스턴 상태에 빠진 어비스 나이트가 바닥에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적들이 괴성을 지르며 아인에게 공격을 날리고 그 틈으로 닉과 마라가 파고들었다.
‘빨라. 하지만 라칼이나 페리스 님보다는 아니야.’
닉이 로그아웃을 하고 두 명에게 특훈을 받을 때, 그야말로 죽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끝없이 도망치거나 공격을 시도했다.
영웅에도 급이 있는 법이다.
마라는 이름도 모를 다양한 아이템들을 사용해 엘더리치의 마법을 그대로 빼앗아 되돌려 주고, 닉은 을 사용 후 걸린 대상만 구렁이처럼 피해 가며 주변 언데드들을 베어 나가고 있었다. 저 상태라면 치명적인 일격을 받더라도 HP가 0이 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난전이라면, 자신이 가까이서 설정 프로그램이나 롤백을 중얼거리더라도 어지간히 귀가 밝지 않은 이상 눈치챌 리도 없을 것이다.
아인은 아까 전 투구를 걷어차 쓰러져 있는 언데드에게 다가가, 몸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설정 프로그램 개입.”
[접촉한 몬스터 및 NPC의 설정을 확인하고 거기에 개입 및 왜곡이 가능합니다.현재 개입 가능한 몬스터 정보: 검사 펨푸스
변경 가능한 설정: 설정 스크립트 수정, 롤백, 리셋, 데이터 삭제]
이젠 ‘롤백’만 하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대가 다소 많다 할지라도,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이며 속도전으로 가면 결국 모든 언데드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대로 롤백을 하려는 순간, 원한으로 들끓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족에게 돌아가야 해. 에리식톤을 죽이고 반드시 집에 가기로 약속했다.”
“…….”
아인의 입이 턱 막혔다.
이건 자신이 만든 ‘설정’이다.
검사 펨푸스를 비롯해 이곳에 있는 네이밍 몬스터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이들은 아니다. 따지면 소설의 등장인물 같은 것이고, 아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창작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것을 아인도 인지했다. 하지만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모든 것이 가짜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 이렇게 처절하게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실리본과 닉에게 말했던, 혹은 말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어….”
정신을 차린 어비스 나이트가 검을 쥐고, 그대로 아인의 배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