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73)
73화 : 오만함의 기준
아인은 오시하는 눈의 영역에서 서쪽으로 향하며, 어느 모험보다도 힘들고 괴로운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시체가 즐비한 것도 아니고, 움직임이 불편한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불덩어리가 꿈틀거리긴 했지만 이쪽으로 날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인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다름이 아니라 아까 전에 닉이 특명으로 내렸던 말 때문이었다.
“어떤 기준이어야 오만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는지 몰라도, 적어도 한껏 거만해져야 여기에서 이점이 있는 건 틀림없어. 지금까지도 별문제는 없었지만 좀 더 부탁해.”
‘하지만 갑자기 오만해져 보라고 해도. 이게 저녁 식사 메뉴 같은 것도 아니고…!’
사하바티와 이후프, 라칼은 닉의 말에 ‘이미 한없이 오만해져 있다.’라는 뜻 모를 대답을 했고, 에르도 별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에 닉은 이 중에서 가장 오만함과 동떨어져 있는 아인을 집중 마크하기로 했다.
“자세도 펴야 하나? 영화 보면 보스들은 죄다 삐딱하게 앉아 있긴 하던데. 뭔가 네가 잘하는 거 아무거나 정해서 과장스럽게 자랑해 봐.”
“제, 제가 잘하는 거요…? 과장스럽게?”
닉의 요구에 아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 가지를 쥐어짜 냈다.
“저… 저는요…! 남들보다는 조금 더 빠를지도 몰라요…!”
“이건 오만한 게 아니라 자존감 재활 훈련이잖아.”
“그치만 부끄럽다고요!”
“더 당당하게 얘기해 봐. 나는 늉늉… 아니, 엄청나게 빠르다.”
“나, 나는…!”
“목소리 더 크게!”
“나는 엄청나게 빠, 빠르쿨럭콜록켈록.”
결국 더듬거리다 못해 사레가 들려 버린 아인을 보며 닉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널 어떻게 하면 좋니. 물론 너하고는 상성이 유독 안 맞는 방법이긴 하지만….”
이후로도 닉은 아인에게 ‘자신감 있게 말하는 법’이라든지 ‘건방지게 구는 법’ 같은 것을 알려 주는 기괴한 광경을 연출했지만, 만족스러울 만큼 오만해지는 모습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전 결국 틀려먹은 걸까요….”
“오만해지진 못할망정 그렇게 자신감까지 잃어버리면 어떡해.”
다음엔 어떤 방법을 써 봐야 하지. 닉이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눈앞에 붉은 글씨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과도한 게임 이용은 몸에 해롭습니다. 휴식을 권장합니다.]아무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상당히 몰입을 한 나머지 현실에서도 시간이 꽤 지나 버린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마무리할 과제가 남아 있던 차라, 닉은 주변에 위험 요소가 없는지 확인하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나 잠깐 로그아웃 좀 하고 올게. 어디 멀리 가진 말고, 아인은 그사이에 연습하고 있어 봐.”
“지금요?! 적이 언제 올 줄 알고요!”
“정말 금방 끝내고 올게. 그때까지만 기다려.”
닉은 적당히 앉아 있을 만한 자리를 찾은 후 아인에게 힘내라고 응원까지 한 뒤 로그아웃을 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줄 사람까지 없어지자, 아인은 주변을 살피다가 라칼 쪽을 힐끔 보았다.
“저기….”
“도와줄 생각 없다.”
“너무해요!”
“애초에 그런 건 누가 도와주거나 연습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어디까지 헛짓거리를 하나 싶어서 재미 삼아 구경하고 있었지만, 슬슬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라칼은 허리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인은 희망을 놓지 않은 얼굴로 이후프를 보았지만, 그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오히려 그런 걸 하다 보면 더 안 좋아질 가능성이 커요. 다음에 닉이 오면 말해 둘 테니, 아인은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될 거예요.”
“평소처럼요…? 평소에 제가 오만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나요?”
자신이 건방지게 굴거나 남이 보기에 좋지 않을 만한 짓을 했을까. 아인이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자 사하바티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껏 네가 고압적인 행보를 보이거나 비슷한 이유로 불편했던 적은 없었으니 걱정 말렴. 이것도 설명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말하지 않는 것뿐이야.”
“뭐냐구요. 용사님도 전에 설명은 못하겠다고만 하던데. 저만 빼고 다 아는 것 같아서 따돌림당하는 기분이에요. 그나저나 여러분은 이미 한없이 오만하다면서 연습도 안 하신다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예요?”
“물론. 건방지고, 오만하지.”
사하바티의 어투는 여전히 차분하고 담담했다. 아인은 그것을 농담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짐짓 콧방귀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제가 봤을 때 사하바티랑 이후프는 정말로 거기에서 거리가 먼데요. 자랑하는 일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따지면 오히려 겸손한 축에 속하잖아요. 같이 오만해지기 연습이나 해요!”
사하바티는 그저 웃기만 했고, 라칼은 웃음기도 없이 혀를 한 번 차는 소리를 냈다. 다만 이후프만이 턱을 매만지며 검지로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바로 그거랍니다, 아인. 자랑하지도 않고, 겸손한 모습. 그게 저희의 오만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네…? 진심이에요? 이해가 안 가는데.”
“조금 도움을 드리곤 싶지만, 이런 건 스스로 깨달아야 맛이 있는데.”
“퀴즈 풀다가 타 죽게 생겼어요. 힌트 조금만 주세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적당히 고난에 처하면서 싸울 수 있는 강한 상대가 있으면 딱 좋을 텐데요. 대화도 적당히 하면서. 그러면 아인이 알아서 깨우칠 거예요.”
“그렇게 속 편한 적이 어떻게 나와요. 게다가 지금은 용사님도 안 계셔서 전력도 누수가 된 상태예요. 어느 정도 깊이 들어온 상태에서 강한 적이라도 만나면….”
아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투덜거리다가, 미미하고도 낯선 기척에 귀를 쫑긋거렸다.
불에 타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만이라면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정체 모를 불덩어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규칙적이고 무게감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지금도 불타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걷고 있는 것만 같은 소리.
그리고 그 소리는 아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강한 적이라도 만나… 면…?”
“아인? 왜 그러나요?”
“뭔가가 오고 있어요.”
아인의 말에 라칼이 고개를 들고 코를 찡긋였고, 오래지 않아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정말이다. 타는 냄새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아아아아, 하필 용사님 없을 때에!”
“징징거릴 시간 없다. 싸울 준비나 갖춰! 적이 어디에서 나올지 모르니, 사하바티는 후방에 자리 잡으려 하지 말고 아예 중앙에서 보조해라!”
이후프와 라칼, 아인, 에르는 사하바티를 감싸듯 자리를 옮겼다. 이윽고 타는 냄새와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의 온도가 빠르게 높아졌다.
“수, 숨 쉬기가 힘들어요.”
아인은 운디네를 소환해 차가운 물을 뿌려 주변의 온도를 낮춰 보려 했으나, 아주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증발하기 시작한 수증기가 시야를 가리고, 방금 소환한 운디네마저 주변의 힘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아인은 급하게 역소환을 시켰다.
‘어지간한 정령은 소환해 봤자 물들기만 할 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훈련이라도 해 놓을걸. 설정 프로그램 개입을 무의식적으로 맹신하던 탓에, 언제나 준비도 못 하고 이런 식이다. 아인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지금 와서 어쩔 수는 없었다.
이윽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 발로 걸어오며 얼핏 인간의 형태로 보이는 존재였지만, 살아 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컸다.
반쯤 부서진 갑옷은 걸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듯 너덜거렸으며, 어깨 위로 보이지 않는 머리는 오른쪽 손에 들고 있었다.
투구가 씌워진 잘린 머리에 작게 보이는 틈새로 새빨간 안광이 스쳤고, 탁한 파란색 불꽃이 투구 사이와 발길을 따라 울컥거렸다.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거대한 철퇴는 가시의 이가 나가고 곳곳이 쭈그러든 상태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가 약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헤르도아에 의해 ‘오시하는 눈’과 함께 부활한 그의 직속 부하 중 한 명. 인도자 베르마.
언제나 눈에 띄게 활동하는 성향 탓에 직속부하 중 가장 먼저 잡히고 목이 잘려 죽었으나, 그 누구보다 주인을 섬기고, 이해하고, 높은 충성심으로 떠받들었던 존재.
인도자라는 별칭은 오시하는 눈을 섬기는 종교에 가장 많은 신도를 귀의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거룩하기 짝이 없는, 경배해야 마땅한 자신의 주인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을. 신성함을 인정하지 않는 수만 수십만의 적들을 ‘이단이 향할 길은 이곳뿐이다.’라며 모조리 죽여 버린 것에서 비롯된 피의 별칭.
살아 있을 적부터 언데드와 같은 끈질김과 집착 때문에 상대하기 힘든 존재로 분류되었는데, 진짜 언데드가 된 지금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만전이 된 상태여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광신도를 한 명이 빠진 상태에서 제대로 상대할 리가 없다. 아인은 긴장과 공포가 어린 눈으로 지켜보다가 소리를 죽여 말할 수 있도록 입을 작게 모았다.
‘설정 프로그램 개입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비록 전체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재앙의 하나인 에리식톤의 설정을 일부 변경하는 데에 성공한 자신이라면 직속 부하 정도는 어찌저찌 처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롤백을 사용한다든지, 설정 스크립트를 이용해 사실은 약하다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약점을 만들어 낸다든지.
정령화를 사용하기 위해 에르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마 전에 보았던 GM이 한 말이 아인의 귓가에 떠돌았다.
‘그걸 사용할수록, 너와 세상은 더욱 괴리감이 심해질 거다.’
“…….”
주문을 읊으려던 말이 멈춘다. 입은 뻐끔거리는 것에서 그치고, 문장은 이어지지 않는다.
“아인, 데스 나이트들에게 했던 것처럼 이 언데드를 한 번에 해골로 돌려보낼 수는 없나?”
이전에 아인이 전장에서 했던 것을 기억하는 라칼이 물어보자, 아인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 무리예요! 그때는 조, 조건이 있었어요. 데스 나이트들이 비교적 약하기도 했고.”
“그런가. 하긴 멋대로 쓸 수 있으면 말이 안 되지.”
이후로도 라칼은 베르마를 상대할 방법에 대해 이것저것 읊었으나, 아인은 ‘말이 안 되지.’라는 말 이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분이었다.
‘맞아. 강한 마법을 사용하면 정신력과 마나가 소모되고 칼을 강하게 휘두르면 근육통이 오고 칼날이 무뎌지기라도 하는데, 이건 아무런 페널티가 없잖아. 시간마법처럼 상태를 되돌려 버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하는데도.’
이것을 제외하면 자신에게 남는 것은 높은 자연 친화력이나 쓸 만한 육체 능력 정도. 하지만 이마저도 다른 이들에 비해 막강하냐고 물으면 절대로 아니었다.
즉 설정 프로그램 개입이 없는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다.
‘최악이네. 재수없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나였어.’
아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정신으로는 설정 프로그램 개입은 사용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되든 안 되든 해야 한다. 아니, 되게 만들어야만 했다.
숨을 고르고 호흡을 안정시켰다. 억지로 정신을 한곳에 모은다. 어쨌든 될 거야. 그 생각만이 아인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런 아인과 나머지를 느릿하게 훑어보던 베르마는, 어디서 소리를 내는지도 모를 감탄사를 짧게 흘리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너희는 오만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