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74)
74화 : 오만의 정의
“싫어.”
-진짜 잠깐이면 돼. 나 보고서 과제 한 거 잘했는지 한 번만 봐 주라.-
“남의 손으로 과제 하면 안 되지.”
김유리는 갑작스러운 부탁에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듯 긴 침음을 흘렸다.
미뤄 두고 있던 과제의 마지막 부분만 끝내고 메일을 보내는 순간, 같은 과목의 다른 분반을 듣는 친구가 전화를 걸더니 과제를 봐 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적당히 거절하고 끊으려는 차에, 아까보다도 세 배는 커진 성량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제발! 적어도 단어 선정 정도만! 한번 밥 살게! 반 겹치는 것도 아니잖아! 내 머릿속에서는 멋지게 물 흐르듯 말하는데 글로 옮겨 놓으니까 중학생 학예회 수준이 되어 버렸어! 춤과 노래로 한창 달아오른 분위기 중에 시 낭송 차례 온 것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고!!-
“아니 나 게임 하러 가야 된다니까. 누가 기다리고 있어.”
귀찮다는 듯 거절하는 유리의 말에,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코웃음을 쳤다.
-너 무슨 게임을 하든 거의 솔플만 하던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니면 파티 짰어?-
“…파티는 짰는데.”
-죄다 NPC지? 사람 없지? 그럼 됐네.-
“…….”
김유리는 굉장히 복잡해진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별일 없겠지.’라고 중얼거린 후 깊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데스크톱 의자에 앉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방 하나 만들게. 들어와서 마이크랑 화면 공유 켜. 아예 모조리 뒤집어엎어서 새로 쓰게 만들어 줄 테니.”
-박력 봐. 두근거린다…. 얼마든지 내 과제를 거칠게 다뤄 줘.-
“미친놈아.”
이번 과제의 주제는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가상현실은 현실을 대신할 수 있는가?’였다.
최근 가상현실 게임 카오스로 인해 사회에서는 온갖 논제와 윤리적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고, 가상현실 및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특히 이전까지는 인공지능의 수준 미달로 인해 AI와 인간의 교류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했지만,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어쩌면 사람 이상의 인공지능이 개발되자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아직까지는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가상현실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캡슐에서 보내는 경고 신호를 모두 무시하는 바람에 현실의 몸이 영양실조 상태까지 갔다는 기사가 조금씩 보이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아무리 큰 회사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사 측은 육체의 건강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시 강제로 연결을 끊는 시스템을 개발 중이라고 했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을 것이다.
“최지우, 너 내가 문장 끝 음슴체로 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맞다. 초본으로만 이렇게 쓰고 고친다는 게 까먹었어.-
“한 문단에 같은 단어 두세 개 이상 보이면 신경 쓰이니까 유의어로 고쳐.”
-슬슬 쩐다도 표준어 사전에 등재될 때 안 됐나? 그러면 대단하다의 유의어로 쓸 수 있는데.-
“그렇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는 그렇게 여겼다, 로 줄여.”
-안 돼! 내 필살의 글씨 늘리기가!-
가볍게 투닥거리기도 하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렇게 한창 과제의 교정 작업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최지우는 기지개를 쭉 펴더니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넌 뭐라고 써 냈어?-
“뭘? 과제?”
-응. 혹시 과몰입 겜창이 돼 버려서 게임 안에 사람이 있다고요! 이렇게 쓴 거 아니지?-
“…아냐. 가상현실 속 공간과 현실의 공간은 반드시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했어.”
대답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자, 최지우는 흐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헤드셋의 마이크를 고쳐잡았다.
-그다음은? 그것만으론 마무리가 어설픈데.-
“다 알려 줄 필요는 없잖아.”
-감추네? 뭔가 수상한데? 혹시 안에서 랜선 연애 해? 아니다 가상현실은 랜선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가상현실이나 메타버스 연애 관련 논문 있나?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염병 그만하고 다 끝났으면 메일이나 보내. 마감 시간 얼마 안 남았다.”
-힝.-
친구한테 말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작은 투덜거림과 몇 번의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과제 전송을 마친 최지우의 말이 이어졌다.
-카오스 닉네임이라도.-
“싫어. 알 수도 있어 가지고.”
-어라? 유명인이야?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알려 줘!-
“아악! 귀 울리니까 그만해! 에코 넣지 마! 진짜 이건 말 못 해.”
-치사하다, 정말. 그러면 무슨 퀘스트 하는지 정돈 알려 줄 수 있지?-
“오시하는 눈 레이드.”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었다. 대륙 메인 퀘스트다보니, 오히려 이쪽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예상대로 최지우는 우는 소리를 내며 칭얼거렸다.
-아~ 너무 방대해. 그건 내 길드도 하고 있잖아. 조금 성장했다 싶은 애들은 죄다 모여드는데 그중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겠냐고. 혹시 우리 길드에 들어와 있나? 나를 위한 서프라이즈?-
“나 길드 가입 안 했어.”
-힝.-
김유리는 ‘친구에게 게임 상황을 알려 줘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설파하는 최지우의 목소리를 반쯤 흘려듣다가, 턱을 괴고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 물어볼 거 있는데.”
-어떤 거? 연애 상담?-
이 로맨스 망붕 뇌를 어떡하면 좋지. 김유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번 부여잡았다.
“다른 거야. 혹시 오만함의 정의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으응~ 애매하네. 다른 전필 과제야? 아니면 게임 퀘스트 관련?-
“후자라고 말해 둘게.”
“으음~”
침음이 길어졌다.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건지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추측해 보는 것인지. 괜히 물어봤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최지우가 입을 열었다.
-글쎄. 사전적 정의를 보면 남을 업신여기고 깔보는 그런 느낌인데. 근본적으로 봤을 때 분에 맞지 않게 자신을 과신하느라 그런 것 같아.-
“분에 맞지 않게 자신을 과신하는 것….”
김유리가 그 말을 한 번 곱씹자, 최지우는 가볍게 긍정하는 소리를 냈다.
-쥐꼬리만 한 권력을 쥐었는데도 오만하게 구는 사람 역사책에 보면 종종 나오잖아. 별것 아닌데도 자신을 엄청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거지.-
“그럴듯하네. 고마워.”
-감사의 의미로 닉네임 알려 줘.-
“싫어. 나 간다.”
-김유리 반드시 찾아내고 말그쓰….-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종변약이라도 먹어 둬야 할까. 김유리는 종변약의 가격과 자신의 생활비를 비교하며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진 버티자고 결론 내린 뒤 캡슐 안으로 들어섰다.
“로그인.”
평소처럼 눈앞이 새까맣게 변한다. 직후 약간의 울렁거림과 함께 가상현실 게임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리던 중, 닉의 눈앞에 전에 보지 못했던 알림창이 떠올랐다.
[현재 로그아웃 지역 일대가 전투 지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지금 로그인을 진행하면 5초간 무적 효과가 진행되는 대신 다시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마저 로그인을 진행하시겠습니까?]‘전투 지역이라고…?’
로그아웃을 하던 사이에 뭐가 나오기라도 한 건가? 닉은 마음이 급해지며 괜히 시간을 더 쓴 것을 후회했고, 망설이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로그인 진행! 확인!!”
***
“오만… 하다뇨?”
“그 가냘픈 몸뚱어리와 약하디 약한 능력으로 대항하려는 것.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만용을 부리는 이 모습. 얼마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가.”
베르마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말의 기쁨마저 섞여 있었다. 목이 제대로 붙어 있었다면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어쩌면 싸우지 않고 말로 해결하며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아인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베르마에게 다가가 말을 걸려는 순간, 라칼이 아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어딜 가까이 가는 거야!”
“으아악?!”
라칼이 뒤로 끌어내는 동시에 아인이 서 있던 곳에 새파란 불꽃의 창이 솟아올랐다. 창끝에 꽂혀 있던 돌은 그대로 녹아내렸으며, 라칼은 창백하게 변한 아인을 보며 혀를 찼다.
“자기 과신도 적당해야지. 저건 이미 광기밖에 남지 않은 말하는 유품 같은 거다. 이성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아. 대화는 포기해!”
“함부로 넘겨짚는 모습도 마음에 드는군.”
베르마는 자신에게 쇄도하는 라칼의 발톱을 뒤로 크게 움직여 피했다. 이윽고 거대한 철퇴를 두 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땅에 내려찍었다.
“고귀한 이에게 다가올 때는, 무릎을 꿇고 와라.”
콰앙-!!!
일대가 완전히 분쇄되고 대지가 으스러진다. 동시에 땅에 인 균열 사이에서 푸른 불꽃의 창이 무작위로 솟아올랐다.
에르는 공중으로 빠르게 치솟았고, 라칼은 급하게 옆으로 피했지만 어깨와 다리 일부가 베여 버렸다. 이후프는 사하바티를 자신 옆으로 잡아끌고 바닥에 두꺼운 바위벽을 만들었지만, 몇몇 창은 그것마저 뚫고 새파랗게 뜨거운 창날의 끝을 위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인은- 너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근처에 있던 닉 모하지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팅팅거리는 소리만 날 뿐 로그아웃 상태의 닉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했고, 아인은 ‘용사님 죄송해요!!’라고 외치면서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그 위에만 있을 건가. 나에겐 너를 시험하고, 헤르도아에 귀의시킬 의무가 있다.”
“그런 곳 살아서 절대 안 가요!!”
“그거라면 죽어서 가도 된다.”
“안 가!!!!”
베르마가 웃음을 흘리며 한 번 더 철퇴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푸른 유성들이 대거 떨어지기 시작했고, 에르가 거대한 얼음 탄으로 유성을 격추시키는 사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유성 하나가 아인을 향해 빠르게 내리꽂혔다.
직격하면 사망. 피해도 유성의 여파로 중상.
아인은 결국 이를 꽉 깨물며 입 밖으로 하나의 주문을 외쳤다.
“설정 프로….”
하지만 유성은 주문이 모두 읊어지기 전에 직격해 버리고, 사방에 튀는 파란 불똥과 고온이 일대를 뒤덮었다.
“아인!!!”
에르가 소리를 지르며 맞대응을 하듯 집채만 한 불덩이를 만들어 던져 버렸으나, 베르마는 도리어 기껍다는 듯 한 손으로 화염을 모두 흡수해 버렸다.
빠져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목숨만은 붙어 있기를. 그러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살려 낼 테니까. 에르가 불안한 눈으로 유성이 떨어진 곳을 보았고, 흙먼지가 가라앉은 곳 중심에는-
무적 판정으로 인해 조금의 피해도 없이 유성을 막은 닉과,
“…나 제대로 온 거 맞냐?”
그 밑에서 입 모양으로 ‘그램’을 발음하려던 아인이 벙찐 얼굴로 주저앉아 있다가 환하게 웃었다.
“용사 같았어요…!”
“다행이네. 그나저나 오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람. 늦게 와서 미안하다.”
닉은 로그인을 하자마자 수직 상승 하는 스탯과 함께, 잘린 목을 덜컥거리며 웃음소리를 흘리는 베르마를 보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간 보스야? 딱 봐도 기분 나쁘게 생겼는데, 빨리 죽이고 이프리트나 찾으러 가자.”
닉은 심드렁한 얼굴로 검을 꺼내 들고, 베르마는 이프리트라는 말에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듯이 머리가 없는 상체를 움찔했다.
“불의 정령왕을 찾으러 왔나. 그거야 이미 사방에 있지 않은가.”
“응?”
그 말에 아인과 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것은 새까맣게 탄 대지와 사방에 널린 불덩이뿐.
멍하니 불덩어리들을 보던 아인은, 그 속에 남아 있는 미약한 정령의 기척을 느끼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아인의 중얼거림에 베르마는 다시금 철퇴를 높게 들었다. 수많은 이단들을, 종족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길로 인도했던 자신의 포교 도구를.
“이프리트의 찌꺼기들도 이프리트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