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76)
76화 : 퀘스트는 깨라고 만들어 놓는다
아인은 갑작스럽게 바뀌어 가는 상황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처음 라칼은 홀로 베르마의 약점이나 빈틈을 찾기 위해 나섰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비적으로 전투를 하면서 다소의 여력은 남겨 두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리고 초반에는 실제로 그런 식으로 간을 보듯이 전투를 이어 갔다.
이후 어느 정도 여력을 드러낸 베르마가 딜레이가 큰 강력한 기술을 쓸 즈음, 빈틈을 노려 다른 이들이 다 같이 덮쳐들면 보다 수월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많은 전투를 경험하고 페리스와 라칼에게서 직접 교육도 받은 아인이었기에 라칼도 그것을 알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격투나 전사의 스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아인이 보더라도 현재 상황은 라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올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상대방의 숨겨진 기술 같은 것을 끌어내기 위해 라칼 쪽에서도 어느 정도의 힘을 끌어올려야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너무 과했다.
라칼에게서 살기가 실체화되고 공기가 까끌까끌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물론 페리스와 싸웠을 때보다도 훨씬 짙은 살기였다.
‘둘이 나누었던 대화 때문인가? 베르마가 과거 대륙전쟁 당시 라칼의 원수였다는 것 같은데.’
라칼은 지금까지 집착적으로 헤르도아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고, 그들과 관련한 이들이라면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했다.
밝은 귀로 둘의 대화를 들어 보면 개중 베르마는 특히나 라칼의 과거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였고, 눈이 뒤집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라칼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아인을 보며 놀란 얼굴로 굳었고, 이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던 베르마는 추가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인은 급하게 달려와 가쁜 호흡을 몰아쉬면서도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잡고 있는 라칼을 잡아 뒤로 끌었다.
“저 광신도 말은 들을 필요가 없어요. 말이 안 돼요. 베르마는 오시하는 눈이 악명을 떨칠 당시에 이미 사형되었고, 헤르도아로 인한 대륙전쟁은 그보다도 훨씬 뒤의 일이라고요. 그냥 라칼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거예요.”
에리식톤이나 오시하는 눈처럼, 얼마 전부터 하나둘씩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재앙’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
하지만 헤르도아가 전 대륙을 휩쓸고 다니다가 절멸한 것은 인간을 기준으로도 불과 한두 세대 이전의 일이었다.
만일 라칼이 헤르도아의 군대에게 비극을 당했다면, 이번에 오시하는 눈과 함께 부활했다고 여겨지는 베르마가 손을 댔을 리가 없었다.
라칼도 그 말에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밖으로 줄줄 새던 살기들이 조금씩 진정되며 정제된 기운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으로 베르마의 잘린 머리는 덜컥거리더니 입을 벌리며 중후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몸의 존재를 지워 버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꽤나 합리적이고 오만한 넘겨짚기다.”
“안 그러면 당신이 어떻게 그때 있었다는 거예요?”
“단순한 이유다. 나는 이미 대륙전쟁 당시부터 헤르도아에 의해 부활해 있었으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아인의 눈이 찌푸려지며 ‘억지예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베르마는 천천히 발걸음을 가까이 옮기며 말을 이었다.
“데스 나이트, 어비스 나이트, 패잔병들의 왕… 죽은 이들을 되살리는 헤르도아의 사술은 아주 고차원적으로 발달된 상태이다. 그리고 생자의 몸보다 죽은 이들의 몸이 대의를 이행하기에도 훨씬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
잘린 목의 단면과 부서진 갑옷의 균열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아무리 봐도 생자라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 새삼스레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대륙전쟁 당시의 헤르도아는 일부러 패배하고 절멸한 것이다. 일종의 준비 단계이지. 더 큰 계획을 위해. 그리고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하지만 그 너덜거리는 죽은 육신이 나약하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끈질기고, 집착적이고, 처절하기까지 한 광신의 증거로만 보일 뿐이었다.
“대륙전쟁 당시에는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들까지는 부활시키지 못했지만, 그 부하들은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는 살펴 왔던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 태어나기 가장 적절한 때를.”
그리고 ‘오시하는 눈’이 다시금 준동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마치 우매한 백성들에게 교리를 설파하는 광신도처럼, 베르마는 두 팔을 벌리기까지 하며 일장 연설을 펼쳤다.
그 말인즉슨 지금 다시 부활한 헤르도아는 일부러 언데드의 육체를 가지기 위해 한 번 전멸했다는 뜻이 된다.
‘미친 것도 정도가 있지.’
아인은 이전 데스 나이트 군단과의 교전에서, 헤르도아의 주교에게 롤백을 했더니 온갖 이름으로 된 육체들이 보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자는 언데드화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몸의 일부를 다른 이들의 것들로 기워 맞추며 거짓된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혼란을 야기시킨 주제에, 준비 단계라고…!”
“고작 몇 개의 종족. 몇 개의 왕국이다.”
기가 막힌 아인이 대놓고 욕을 하려고 입을 벌리려는 순간, 라칼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우리 일족을 몰살시켰다는 것이 사실이면 내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사하바티와 이후프는 약속한 것이 있어 나서지 않을 거다. 너희도 내 일을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칼이 할 일이 뭔데요.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요!”
“그런다고 죽은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느니, 복수는 허무할 뿐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려거든 기절시켜 버릴 거다.”
딱 그 말을 하려고 했던 아인의 입이 턱 다물어졌다. 라칼이 다시 베르마를 노려보며 허리를 굽히기 시작하자, 아인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못 이기면요?”
“…….”
“이미 죽었었어요. 또 언제 부활할지 몰라요. 지금 이겨 봤자 또 언제 기어 나올지 모른다고요! 아무 의미 없는 자기만족으로 끝날 수 있단 말이에요!”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인은 어떤 말을 해서든 라칼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 행위였다.
라칼이 강하다고는 하나 오시하는 눈의 직속 부하를 혼자서 상대한다니. 합리니 뭐니 이전에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방법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는가.
분명 라칼은 감정이 너무 격양돼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인은 라칼의 손을 잡은 뒤 아주 조용히 읊조렸다.
“설정 프로그램 개입.”
이윽고 익숙한 알림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설정 스크립트 변경’을 들어가면 라칼의 과거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조금은 바꿔 버릴 생각이었다.
가령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라는 문장이 있다면 ‘적어도 죽지는 않게끔’ 같은 문장으로 바꾼다든지. 뭣하면 나중에 다시 고쳐 놓으면 될 것이 아닌가.
머릿속으로 어떤 문장이 나왔을 때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하던 도중, 아인은 라칼의 눈을 마주 보곤 짧게 숨을 뱉었다.
“…아.”
그 눈은 감정에 지배당하거나 눈이 뒤집힌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하여 지친 숨을 내뱉는 모험가처럼.
생각하고 고심하고 갈등한 끝에 내린 고민이 이것.
자신이 과연 이 아랑족의 설정을 멋대로 건드리고, 바꾸고, 명예와 긍지의 근본을 바꿀 자격이 되는 걸까. 동시에 이곳에 오기 전에 성안에서 만났던 GM의 말도 계속해서 머리에서 울리고 있었다.
이것을 사용할수록 오히려 더욱 괴리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뒤늦게 아인을 따라온 닉이 뒤에서 끌어안듯 입을 막고 에르가 눈을 가려 뒤로 끌어냈다.
ㅌ
“그만해, 아인.”
“라칼은, 절대로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아인은 닉에 의해 갑작스레 뒤로 한참 동안이나 끌려가다가 손을 뿌리쳤고, 반항심 가득한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용사님까지 이러시기예요?”
“쟤가 원한다잖아.”
“저대로 죽으면요. 정말 허무하게 쓰러지면 어떡하려고요. 우리는 용사님처럼 죽어도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게다가 상대는 죽여도 죽지 않는 언데드인데!”
아인의 말에 닉은 혀를 한 번 차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전에 내가 말한 적 있지. 누군가는 그저 여흥을 위해 이 세상에 나타나고, 누군가는 미쳐 가지고 죽는 길에 제 발로 뛰어들곤 한다고.”
패잔병들의 왕에게서 닉을 구하고 날아갈 때, 민폐를 끼치는 짓이라며 했던 말들이었다. 간신히 진정된 아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닉은 숨을 길게 뱉은 후 눈을 반쯤 감았다.
“허무해 보이고. 의미 없어 보이고. 허상과 가짜에 진심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이 진심이면 외부인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
“저 탈착식 대가리를 죽이길 원한다면 협조를 요청했을 거다. 고통을 원한다면 생포를 해야 하니 오히려 더 도움을 구했겠고. RPG 게임 오래 한 사람 입장에서 저건 끼어들어 봤자 좋을 게 없어. 가령 복수를 하면서 스스로의 목숨을 잃길 원했다면 어떡해?”
다소 우울한 서브 스토리가 있는 NPC에게서 흔히 보이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닉은 자신이 이해할 수도 없는 사정에 발을 들이며 오지랖을 부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아인은 그런 건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멍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죽으면 슬프잖아요.”
당연한 말. 닉은 한동안 대답을 못 하다가 한숨을 쉰 뒤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니까 믿어 봐. 쟤도 늉늉 세잖아.”
“그치만… 그치마안… 힘들게 죽였다가 또 일어나며느은… 죽지도 않는데….”
“죽일 수 있어.”
“네?”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닉의 말에, 아인은 글썽거리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허세 부리시는 거 아니죠?”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아.”
“용사님이라면 가능해요.”
“되게 긍정적이고 용기를 주는 문장을 이딴 곳에 쓰지 말아 줄래?”
“아무튼 어떻게 하시려는 건데요?!”
“몰라.”
아인은 ‘이 용사님을 진짜 어떻게 하면 좋지’라는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욕하지 좀 말아 줄래?”
“입으로 욕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방법도 모르고 된다고만 하면 누가 믿어요?”
“설명이 좀 복잡한데. 일단 저걸 처치할 수 있냐는 질문엔 무조건 오케이야. 방금 베르마를 소멸시켜 영면에 들게 하라는 퀘스트가 나왔거든.”
닉은 아직 수락 버튼을 누르지 않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퀘스트창을 훑고는 슬 미소를 지었다.
“퀘스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소멸시키라는 퀘스트가 나왔으면, 그걸 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