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81)
81화 : 오시하는 눈
비밀 통로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 서쪽을 빠져나와 동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으로 가야 했기에 동선의 낭비가 심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사이에 프로토게노이가 이 근방의 몬스터들을 모두 죽인 덕분인지 이렇다 할 필드몹들이 잘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불타는 말을 타고 있는 언데드인 데스 라이더나 온몸이 마그마로 이루어진 슬라임이 중간중간 나타났지만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었다.
“생각보다는 강하지 않네.”
“에르가 상성인 물의 정령술을 잘 사용해 줬어요. 원래라면 좀 더 고전했을지도.”
표면이 식는 바람에 통째로 새까맣게 굳어 버린 슬라임을 톡톡 건드리던 아인은, 땀이 흐르는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운이 좋게도 몬스터를 많이 만나진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높아지는 온도가 더욱 힘들 정도였다.
이프리트 덕분에 불의 친화력이 올라간 라칼과 자신, 온도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이후프나 에르는 큰 어려움 없이 선두에서 걸어갔지만 이미 잎사귀가 시들시들해지고 있는 사하바티에게는 상당히 고된 길이었다.
“사하바티. 괜찮겠어요?”
아인이 걱정스레 물어보자, 사하바티는 예의 그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해야… 시들고 불타 죽을 뿐이니까.”
“그게 안 돼요! 그게 안 된다고요!!”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바람을 일으키려 해도 여기선 후끈한 바람만 불 뿐이고, 물의 정령을 소환하기엔 아직 아인의 실력이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그렇다고 에르에게 부탁해 버리면 자칫 사하바티를 통째로 얼려 버릴 위험성이 있는지라 함부로 부탁을 못 하고 있는 상태.
에르도 아인의 마음을 읽고 몇 번 시도를 했지만, 두어 번 정도 사하바티의 몸 일부에 서리가 끼자 급하게 서리를 지운 뒤 다소 시무룩해진 얼굴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조절이 잘 안 돼.”
더군다나 이곳은 화염 속성이 천지에 깔린 곳이라 얼음과 물 속성의 힘 조절이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사하바티는 오히려 에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나를 위해 힘써 줘서 고마울 뿐인걸.”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막말로 이렇게 쇠약해져 있는 순간에 커다란 불의 정령술이 사하바티를 덮친다면 그 순간 치명타를 입을 터였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사하바티. 자칫하다간 정말 큰일 나요.”
“괜찮아. 괜찮아. 기껏해야….”
“전혀 안 괜찮다고요!!”
똑같은 패턴에 아인이 여태 그랬던 것처럼 투덜거리자, 사하바티는 아인을 빤히 보다가 슬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상관없어.”
“…….”
여전히 차분하고.
여전히 온화하고.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세상의 모든 일들이 별것 아니라는 양.
농담이 아닐 것이다. 아인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애초에 사하바티는 종잡을 수 없거나 엉뚱한 언행을 보이곤 하지만, 거짓말은 거의 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라칼도 그렇고 사하바티도 그렇고, 애초에 죽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본다면 기꺼워한다고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상관있어요. 용사님이 그랬는데 그런 건 트롤 짓이라 했다고요.”
“내 종족은 드라이어드인데.”
“몰라요!”
아인은 툭 쏘듯이 중얼거리곤 자신의 품을 뒤적여 GM에게서 받은 아티팩트를 사하바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무슨 효능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지만 ‘시간을 빼앗은 대가’라고 말하며 주었으니 적어도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게 뭐야?”
“…아는 사람한테 선물로 받은 거요.”
“친구도 있었구나.”
“굉장히 어감이 묘해요, 사하바티.”
사하바티는 푸슬푸슬 웃으며 아티팩트를 꼭 쥐어 나무 덩굴로 감쌌다. 고맙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고.
그사이 닉은 탕이 체크해 준 미니 맵을 몇 번 확대하고 축소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런데 조건이 안 맞아서 갈 수 없는 확률도 있으니까 그건 유의해 둬.”
비밀 통로로 갈 수 있는 인원에 대한 가설은 지금까지 인원수 및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반쯤 정설로 자리잡혀 있었다.
물론 통로로 향하는 ‘검은 불꽃’은 일회성용 아이템인 데다 그것을 드랍하는 직속 부하들도 한정되어 있었기에 충분한 실험은 해 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다만 무게로 제한이 걸리는 거라면, 온몸이 돌로 이루어져 있는 이후프의 경우 자칫 이동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도착한 곳은 불타고 있는 커다란 눈동자가 음각된 철문. 손잡이조차 존재하지 않는 문이었다.
새겨져 있는 것은 오시하는 눈일 터였다. 그 위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아래로는 경배를 하는 것인지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모를 수많은 생명체들이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엔 검은 불꽃을 집어넣을 만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닉이 그곳에 베르마를 죽이고 얻은 불꽃을 집어넣자, 음각된 눈이 뜨이면서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쪽에는 거대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한다면 수천 명도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그리고 안쪽에 들어가자마자, 지금까지는 도통 보이지 않았던 불의 정령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손님이 왔어.”
“도전자일까?”
“싸우러 온 거라면 정말 멍청한 녀석들이야.”
“모두 머리를 조아릴 준비나 하라고, 이 약해 빠진 녀석들!”
불의 정령들은 서풍의 숲에서 보았던 것처럼 광기에 사로잡혀 있진 않았지만, 어떤 정령은 실시간으로 물이 증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어떤 정령에게선 자갈 조각이 투두둑 떨어지는 상태였다.
이곳에 존재하던 물의 정령이나 땅의 정령들이 모두 오시하는 눈의 능력에 감화되어 속성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불 속성과 상성이 좋은 바람의 정령들은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당장 공격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불 속성 친화력이 높은 라칼과 아인, 에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말을 걸고 있었다.
“너희들 그분에게 잘 보일지도 몰라. 한자리 꿰차 봐.”
“한 명도 겁을 먹질 않았네. 그러면 전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닉은 정령들이 무어라 말하든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중, 한 정령이 하는 말을 듣고 얼굴을 돌렸다.
“겁을 먹으면 올라갈 수 없어?”
“아주 기본적인 예의 같은 거지. 제국의 황제 앞에 벌거벗고 나서지 않는 것처럼.”
“그런 녀석들은 올라가자마자 바로 쓰러질 게 분명하니까! 위대한 분의 시간 낭비는 시키지 않는 게 좋아.”
숫자나 무게가 아니라면 차라리 안심이었다. 최소한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헛걸음을 한 건 아니니까.
아인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불의 정령들을 일일이 쳐내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휘둘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태울 뻔한 불의 정령에게 저리 가라고 손을 휘젓자 꺄르르 하고 정령들의 웃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나약한데 올라갈 수 있겠니?”
“너는 정말 이상한 아이야. 겁쟁이인데 용기도 있네.”
“그분께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잿더미가 되면 내가 그 위에 불씨를 뿌려 줄게.”
잔뜩 겁을 주는 소리에 아인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시하는 눈의 영향 때문인지 기존에 있는 불의 정령들보다도 훨씬 막 나가고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듯싶었다.
‘자신들을 어떻게 태울지’에 대해 즐겁게 구상하는 정령들에게, 아인은 눈치를 한 번 보며 슬쩍 말을 붙였다.
“그런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뭔데?”
“오시하는 눈… 님도… 약점 같은 게 있을까?”
아인의 말에 정령들은 주변에 불똥이 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없어!”
“있을 리가!”
“세상의 무엇보다도 힘이 세고, 세상의 무엇보다도 똑똑해.”
“물론 자기보다 대단한 존재면 겁을 먹을 거야!”
“하지만 그분보다 위에 있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약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정령들은 대수롭지 않게 포기하라는 듯 말했지만, 아인은 턱을 매만지며 눈을 굴렸다.
적어도 자신이 알기로, 이 세상을 구성하는 어떤 것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는 존재가 있었다.
강대한 재앙도, 대천사도, 마왕도, 신들도, 차원의 밖에 서식한다는 정체 모를 괴물들조차 뛰어넘는 존재를 말이다.
아인이 한참 생각을 하는 사이 일행은 공간의 중앙까지 도달했다. 그 아래에는 마법진이 거대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이전에 텔레포트 시설과 롱샤가 그렸던 마법진과 유사하게 생긴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곧바로 ‘오시하는 눈’을 만나러 가는 통로일 터였다. 그리고 닉의 눈 앞에 펼쳐진 알림창 하나가 그 확신에 쐐기를 박았다.
[조건을 확인 중입니다.] [조건 충족 확인.] [파티가 보스존으로 진입 가능합니다. 해당 구역에서는 강제 종료를 제외한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닉은 ‘입장’이라고 말하기 전 아인을 돌아보았다.
“상태 어때?”
“괜찮아요.”
“속으로 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삽질하고 있는 거 아니지?”
“제가 그거 몇 번이나 했다고 그러세요?!”
아인이 큰소리를 내자 에르가 옆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 만난 이후로 정확하게 382번.”
“에르!!!”
물어본 거 아니냐는 얼굴로 에르가 눈을 깜빡이자, 닉이 중간에 서서 진정하라고 손짓했다.
“말싸움할 시간 없어. 이번엔 보스 만났을 때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으니까, 마인드 컨트롤을 해 보자.”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최근에 가장 빡쳤던 때 있어?”
“용사님이 자기 멋대로 하고 세상만사 심드렁하게 굴 때….”
“최근에 가장 자존감이 높아졌던 때 있어?”
“저런 사람도 용사를 하는데 나도 힘내야지 할 때….”
“너 잠깐 나 좀 보자.”
이번엔 결국 에르와 이후프가 둘을 말렸고, 닉은 날카로운 눈으로 아인을 쏘아보다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나 너희 잃기 싫어. 카오스에서 솔로 플레잉은 지옥인 데다 플레이어들한테는 어지간히 얼굴 팔려서 파티 짜기도 싫단 말이야. 알았지?”
“용사님 그 말 되게 자주 하고 있어요. 저희가 가지 않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
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몇몇 정령들이 ‘겁먹었나?’, ‘약간 겁먹은 것 같아.’라고 속삭이기 시작하자 닉은 결국 손사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아, 모르겠다. 확인. 입장!”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딸꾹.”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었다.
몇몇 보스존은 또 거기까지 가기 위한 통로 같은 것이 있기도 한데,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가로가 아닌 세로로 뚫려 있는 공간.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혀 위를 쳐다볼 수밖에 없는 곳.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그것만이 군림하고 있었다.
수백, 수천 미터는 떨어져 있을 까마득한 천장에. 불타고 있는 거대한 눈이 동공을 뒤룩거리며 일행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