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82)
82화 : 내가 무서워하는 것
오시하는 눈.
아주 오래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상징이 없던 때에 불현듯 생겨난 것 중 하나.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무엇을 기원으로 두고 있는지도 밝혀진 것이 없는 존재.
세상을 불태우며 등장한 그것은 오래지 않아 모든 것들의 적으로 군림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에게 복종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벌을 내린다.’라는 말을 하며 오만과 분노의 상징임과 동시에 불의 정령의 근본이자 일종의 신적 존재로도 여겨졌다.
동시에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었던 재앙으로, 아인이 알고 있는 기록에 따르면 세상에 두 번째로 생겨난 재앙이었다.
너무나 오래되었기에 아무도 실제 이름을 알지 못하며 대신 역사에 따라 온갖 호칭과 악명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가 ‘오시하는 눈’이라는 최종적인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오만한 불꽃과 마주합니다.] [거대한 존재 앞에 압도됩니다.]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현 상태가 20분 이상 유지되거나 공포 수치가 일정 이상 올라갈 시 레이드 실패 혹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그것은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다만 드높은 곳에서 그저 일행들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뿐인데.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해도 조그마한 불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인과 닉의 눈앞에 수많은 알림창이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흑, 콜록. 흐윽. 으…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디야. 모두 어디 있는 거야. 나 때문이냐?”
“하하….”
“…….”
아인의 호흡이 불안해지기 시작하더니 갑작스럽게 초점이 흐려지고 연신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이상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인뿐만 아니라 라칼과 이후프, 사하바티도 마찬가지였으며 두려움과는 거의 무관하리라 생각되었던 에르마저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스킬을 사용한 거람. 공포 상태에 걸렸다는 상태 이상은 떴지만 실제로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태에 오래 빠져 있으면 좋을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기에 다른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닉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여는 순간.
화륵.
“…어?”
귀를 가린 채 얼굴을 푹 숙이고 주저앉아 있던 아인, 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 중얼거리던 라칼, 멍하니 어느 한 곳을 주시하던 이후프와 사하바티, 안절부절못하던 에르까지.
모두가 눈앞에서 불에 타기 시작했다.
닉은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나 쉽게? 이렇게나 허무하게?
그리고 불타던 이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스러져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뭐야. 대체 뭐냐고.”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비명도 고함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나 여기 오기 전에 몇 번이나 괜찮을까. 괜찮을까. 하고 되뇌고 걱정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행운이 겹쳐 오게 되었고 결국 모두 불타 죽었다.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다.
기존의 RPG 게임과 다른 카오스의 특징이 있다면, 완전히 똑같은 NPC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특정 캐릭터가 죽는다면 두 번 다시 받지 못하는 퀘스트도 많았고, 게임 시스템상 반드시 필요하다면 엇비슷한 설정의 캐릭터가 새로이 창조되긴 해도 둘은 별개의 NPC였다.
이 때문에 ‘단 하나뿐인 NPC’라는 소재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으며 관련한 2차 창작도 활발하게 이루어질 정도였다.
“아인. 라칼. 이후프. 사하바티. 에르. 제기랄, 다들 어디 간 거야? 장난 까지 마. 이게 뭐야.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잖아.”
닉의 동공이 수축된 채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 아득한 공간에 남은 것은 자신과 저 높은 곳에 있는 눈뿐이었다.
오시하는 눈은 여전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드를 포기하겠습니까?]눈앞에 새로운 알림창 하나가 생겨났다. 닉은 숨을 몰아쉬며 침을 몇 번 삼켰다. 열이 잔뜩 오른 머리는 눈앞의 상황을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진정해.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이렇게까지 감정 쓸 일도 아니야. 맞잖아. 생각해 봐. 그동안 같이 다니던 NPC 몇 명이 죽은 것뿐이야. 지금까지 하던 알피지 게임에서 엔피시들이 죽은 것과 비슷해. 아니, 같아.’
닉의 게임 성향은 라이트 게이머와 헤비 게이머의 사이. 과금은 그때그때 여유가 되는 선에서 저렴한 세일 품목을 사는 것에서 멈추고, 서브 퀘스트나 스토리도 취향이 아니거나 지루한 것은 스킵을 눌러 빠르게 지나간다.
다만 마음에 드는 물건은 이따금 배달 음식이나 옷을 살 돈을 줄여 과금할 때도 있고, 좋아하는 퀘스트 및 스토리는 인게임에서 몇 번을 재탕하거나 인터넷에서 해당 클립을 따로 만든 것을 반복 재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스토리를 좋아한다 해도 개중 같이 다니던 NPC가 죽는다고 이렇게까지 힘들어한 적은 없었다.
그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하던 게임들의 NPC는 다시 시작하면 언제든 다시 살아난다.
물론 근래에는 다양한 게임이 생겨나 컴퓨터 IP당 단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NPC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컴퓨터와 게임에서는 몇 번이고 처음부터 볼 수 있으며 그것을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어떤 게임에서도.
정말로 단 하나뿐인 자신은 살아 있고, 고작 데이터 같은 게 아니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리젠조차 되지 않는 한 명의 NPC 같은 것은 없어서.
[공포 수치가 올라갑니다.]알림창 두어 개가 쑥 올라갔다. 닉은 얼굴을 구기며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었고, 뒤룩거리는 불타는 눈동자와 간신히 마주했다.
그것은 내내 어떤 말도 움직임도 없다가 눈을 마주친 뒤에야 짧게 목소리를 울렸다.
-나약한 조각아. 그게 너의 무른 부분이구나.-
“말할 수… 있었잖아…!”
-나는 성대와 폐를 사용하여 말이라는 저급한 음성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위대한 의지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오시하는 눈이 아니라 오시하는 혀냐고. 말 진짜 늉늉 많네.”
-…….-
“아인하고 다른 애들은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원래대로 돌려놔!”
-그것들 말인가.-
오시하는 눈은 느릿하게 웃는 소리를 흘리더니, 공중에 네 개의 불덩어리를 솟아 올렸다. 이내 그것은 천천히 사그라드는 듯하더니, 각각 아인과 라칼, 사하바티, 이후프, 에르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공간에 거기에 있는 나와 함께 존재하며, 죽지 않았다. 첨언하자면, 죽일 생각도 없다.-
“뭐…?”
불덩어리가 비추는 모습들은 제각각이었다. 라칼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손톱에 마나를 담아 사방에 휘두르는가 하면, 아인은 계속해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고 사하바티와 이후프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르는 여러 종류의 정령술들을 사방에 폭사하고 있었으나 공간에는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했다.
-나는 지금 당장 스스로가 느끼기에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무서워하는 것…?”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이 몸과 이야기할 최소한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무슨. 너 처음에 온 놈들은 직접 다 태워 버렸다면서!!”
-성을 짓기도 전에 쳐들어와서 당황해 가지고 그만.-
“아.”
아직 업데이트가 덜 됐었나.
아무튼 닉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싸움해서 깰 수 있는 레이드가 아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거는 것을 보면 레이드 성공 조건도 특정 키워드를 이끌어 내는 것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포심부터 어떻게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방금 다른 일행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조금 진정되나 했는데, 목소리는 계속해서 닉을 쿡쿡 건드렸다.
-그렇게 있어도 되는가. 카오스의 조각인 너야 죽지 않겠다만. 시간이 지체될수록 위험한 건 저들이다.-
“망할 새끼가….”
-동정심과 애정이라는 가냘픈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것이다.-
“내가 쟤들한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정령의 일종인 오시하는 눈은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닉 스스로는 약간의 정을 붙였을지는 몰라도 동정심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무언가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대화를 할 시간이 아니었다.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려움을 제거해 보려 했지만, 눈앞에서 괴로워하며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들을 보니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젠장. 젠장…, 좀 진정해 봐. 심호흡. 심호흡….”
-라칼과 에르라는 녀석의 감정이 극에 받쳐 있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이후프와 사하바티가 지금까지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나?-
“습… 후우… 습… 후우….”
“아인이라는 녀석은 지금….”
“늉늉, 좀 늉늉늉 닥치고 있어 봐!!”
“나에게 그렇게 대하다니… 건방진 녀석.”
오시하는 눈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재앙이 아니라 그냥 관음증 변태 마조 새끼잖아!! 이래서 재앙이라는 건가?!’
오래된 재앙이니 최초의 불꽃이니 뭐니 거창한 수식어만 봤을 때는 웅장하고 고고하기만 한 분위기였지만 막상 만나 보니 심심해서 이웃집 기웃거리는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나 다름없다.
아예 눈을 감아 버리고 귀까지 막아 버렸지만, 눈을 감았는데도 풍경이 펼쳐지고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너를 위한 아주 간단한 조언을 하나 알려 주도록 하지.-
“좀 닥쳐 봐, 불꽃 틀니.”
-너에게는 어려울 것도 없다. 그저 저 녀석들을 모두 부정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뭐?”
닉은 꾹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오시하는 눈의 불타는 몸체는 여전히 까마득한 천장에 떠 있었고, 눈밖에 없었음에도 닉은 마치 그것이 웃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멸의 파편. 변하지 않는 이. 이 세계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쇠하지 않는 카오스의 조각이여. 너에게 주변의 필멸자들이란 한낱 스쳐 지나가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일 것이다. 마치 내가 그들을 보는 것처럼.-
“…….”
-기실 너 말고도 다른 카오스의 조각들이 몇몇 찾아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각기 자신과 관련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문에 끝끝내 떨쳐 내지 못하고 쫓아내야만 했다.-
그것은 직속 부하를 죽이고 얻은 검은 불꽃과, 비밀 통로의 위치를 알고 있는 프로토게노이의 공략 대원 중 한 명일 터였다.
“자신과 관련된 두려움?”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공포 같은 것. 하지만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타인과 관련한 것이 아닌가?-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데?”
-연결이 끊어지고, 저 녀석들은 곧바로 이곳에서 사라진다.“
플레이어가 아닌 강력한 NPC가 대규모 콘텐츠를 깨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카오스에서는 대륙 메인 퀘스트에는 최소 한 명 이상의 플레이어의 대동이 필수였다.
연결을 끊는 것은 파티를 해제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NPC뿐인 남은 인원들은 자동적으로 레이드를 실패하게 된다. 그 대가는 추방이든 불태워 죽이든 오시하는 눈의 마음.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나. 너와 저들은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실은 별것도 아닌 미물들이라는 점을. 그것만 하면 네가 어떤 카오스의 조각보다도 높은 곳에 군림할 수 있다.-
“…….”
-이들은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오시하는 눈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하고 느릿했으며, 말 그대로 뇌리에 음각되듯 깊숙하게 박혔다.
닉은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었다. 묘하게 아까보다 천장까지의 길이가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