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96)
96화 : 외형 변화
“와. 바글바글하네.”
“북쪽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다는 걸 모두 들었나 봐요.”
북쪽의 해안가에 위치한 노타나 영지는 본디 그렇게 규모가 큰 곳은 아니었다. 근방의 얼음 늑대나 설인들을 사냥하여 그 가죽이나 고기를 팔거나, ‘얼어붙은 바다’에서 두꺼운 얼음을 깨고 그 밑의 희귀 생선들을 잡곤 했다.
“악식왕 님도 여기에 있는 바다에 가기로 했죠?”
“음, 만난 김에 너희에게 요리나 하나 더 해 주고 갈 생각이다. 여긴 공급을 받는 게 아니라 직접 잡아다가 바로 파는 데다, 지금 인구를 보니 회전율도 좋아서 아주 신선한 재료를 살 수 있겠군.”
모험가나 용병보다도 사냥꾼들의 비율이 높은 곳. 이따금 풍경을 즐기러 오거나 극지방의 던전을 경험하러 오는 이들을 제외하면 플레이어들도 별로 오지 않던 오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보급품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적어 직접 사냥을 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특히 텔레포트 시설이나 마법을 이용해 손쉽게 온 이들은 갑작스러운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제, 제발 옷 좀 팔아 주세요. 지금 실시간으로 HP 닳고 있어요.”
“이 뜨끈한 국물… 그리웠어.”
“야, 정신 차려! 그거 맨눈이야! 야!”
옷차림이 가벼운 이들은 농담이 아니라 지금 당장 생사를 넘나드는 중이었고, 별거 아닌 털옷이라도 몇 배나 되는 웃돈을 주고 사들이고 있었다.
악식왕은 그 광경을 보며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제대로 못 먹으니까 저러는 거다.”
“저건 먹는 거랑 별 관련 없어 보이는데.”
“펄펄 끓는 국밥 하나만 있으면 이까짓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 아저씨 국밥충이었잖아.”
“약간의 마약 성분이 있는 국밥이라면 정말로 추위를 느끼지 못할 거다.”
“국밥충이 아니라 미친놈이었어. 기다려!!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재료 찾지 말라고!!”
닉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는 악식왕을 뜯어말리고, 아인은 그 광경을 은은하게 지켜보다가 주위를 훑어보았다. 오픈베타 이후로 하프엘프에 대한 편견이나 잘못된 인식은 이제 없다시피 했지만, 시선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시선이 많이 쏠리진 않네요.”
오히려 아인보다는 드라이어드인 사하바티와 골렘인 이후프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관심도 곧 사라졌다.
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드문드문 다른 드라이어드나 골렘이 보이기도 했고, 라칼 같은 수인족은 은근히 눈에 띌 정도였다.
“숨어 있던 재야의 고수들이 모두 나오는 걸까요…?”
“그런 걸까. 그런데 내 동족으로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드라이어드… 아닌가요?”
“외형상으로는 분명 맞지만. 아주 먼 곳에서 온 걸까.”
사하바티의 말에 아인은 고개를 갸웃하고, 그사이 닉은 악식왕에게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하얀 가루’를 압수해 버린 후(악식왕의 말로는 설탕이었다고 한다.) 일행에게 돌아왔다.
“요즘 외형만 바꾸게 하는 포션을 기간제로 팔아 보고 있거든.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은가 봐.”
“아, 전에 용사님이 서풍의 숲에 들어갈 때 변비약을 드셨던 것처럼요?”
“누가 들으면 오해해, 인마. 변비약이 아니라 종변약이라고. 종족 변화 약. 그건 임시지만 스탯이나 스킬까지 바꾸는지라 좀 위험성이 있는데, 지금 파는 건 그냥 외형만 바뀌는 거야. 신체적 특징은 일시적으로 가져올 수 있어도, 종족 전용 스킬 같은 건 전혀 사용 못 하고.”
“그러면 용사님이 골렘이나 드라이어드, 늑대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거네요?”
“못 할 건 없지…?”
아인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닉을 쳐다보았다.
“안 해.”
아인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안 한다고.”
아인은.
“절대로 안 해! 돈 아까워!”
닉은 팔을 교차해 X자까지 그으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아인은 닉의 손을 꽉 잡으며 애원했다.
“저 용사님이 변하는 걸 보고 싶단 말이에요!”
“대체 뭘로?!”
“귀여운… 슬라임. 가끔은 저도 그렇게 변해 보고 싶었어요. 아니면 작은 정령도 좋아요.”
“네 취향은 뭐가 문제냐? 그리고 저것도 PC한테만 적용되고 NPC한테는 안 될걸.”
결국 닉은 마지막 희망까지 꺾어 버린 뒤 매몰차게 거절했고, 아인은 눈이 쌓인 바닥에 쓰러지며 좌절했다. 악식왕은 그 소란을 지켜보더니, 조용히 캐시샵을 열더니 무언가를 이것저것 조작하고 닉에게 다가갔다.
“방금 사 봤는데, 설명 보니까 이거 NPC에게도 적용되는데.”
“무슨 희망을 주는 거야! 안 살 거예요!”
“그럼 내가 줄 테니까, 너희가 한번 먹어 봐.”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차피 제가 안 살… 에?”
닉이 벙찐 얼굴로 악식왕을 올려다보고, 그는 씩 웃으며 커다란 손에 가득 채운 엄청난 약의 포션들을 보여 줬다.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데다 세트 판매도 하더군. 안 그래도 방금 설명 듣고 보고 싶은 게 생겼는데. 닉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 먹어 볼 수 있겠나?”
그 시선은 닉을 포함한 일행 전부를 향했다. 이번에는 아인과 라칼이 눈을 크게 뜨고 이후프와 사하바티는 재밌다는 듯 웃는 소리를 냈다. 다만 ‘농담도 과하다.’라는 투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악식왕은 웃는 얼굴이긴 해도 진심이 가득했다. 다른 이들도 슬슬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인이 먼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지금 바로요?”
“물론이지. 닉에게는 랜덤한 종족으로 변화할 수 있는 포션을, 다른 이들에게는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포션을 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그런데 그걸 갑자기 왜 주고 싶으신 건데요?”
“아주 좋은 질문이군.”
악식왕은 눈을 빛내더니, 인벤토리에 두꺼운 팔을 집어넣고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커다란 손에는 냄비와 국자가 들려 있었다.
“너희들 모두에게 음식을 먹일 거다.”
“아까 주셨잖아요…?”
아인의 질문에 악식왕은 고개를 저으며 사하바티, 이후프, 에르를 가리키고 마지막으로 라칼까지 가리켰다.
“저 셋은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는 기관이라는 게 없어서 마나만 가득한 음료만 줄 수 있었다. 늑대인간 저 녀석도 대충 씹고 삼켰을 테니 스튜에 있는 고기를 어금니로 씹을 때 퍼지는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게 뻔해.”
그건 용납 못 하지! 악식왕은 잔뜩 숨을 들이켜며 가슴을 빵빵하게 만들고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휙휙 저었다.
“물론 각 종족마다 음식과 영양분을 섭취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즐기는 방법 또한 존중한다. 하지만 헤어지기 전에 인간이 음식을 즐기는 방법 또한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어. 일단은 내가 인간이라 인간에게 맞춘 요리를 하기도 하고. 장담하건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다. 아니, 후회하지 않게 내가 만들 거다.”
적어도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이라는 것은 짧은 만남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아인은 ‘어쩌죠’ 하는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았고, 닉을 제외한 이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그들이 아까 전 스튜를 먹는 것을 보고 맛이 궁금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일행은 다소 사람들이 적은 광장의 구석에 가서 포션을 마시기로 했다. 다만 그전에 수수한 옷이라도 하나씩 사서 걸칠 필요가 있었다.
“따지면 이후프랑 사하바티는 벌거벗고 있는 데다, 라칼도 항상 상의를 벗고 있으니까요.”
“변태처럼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우리 셋은 옷을 입어 봤자 금방 찢어진다고.”
라칼은 투덜거리면서 커다란 상의를 걸치고, 이후프와 사하바티도 이런 건 처음 해 본다며 웃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조금은 긴장한 얼굴의 아인을 시작으로 모두가 포션을 마셨다. (이후프와 사하바티는 직접 뿌려 스며드는 방식으로 흡수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사하바티는 몸에 둘러져 있던 나뭇잎이나 나무 덩굴이 모두 사라지며 갈색 눈과 검은색 머리를 지닌 여성으로, 라칼은 회색 머리카락에 금색 눈을 가진, 온몸에 흉터가 새겨진 탄탄한 몸매의 여성이 되었다.
이후프는 다소 중성적인 모습으로 변했는데, 백발에 하얀 눈동자를 가진 짧은 머리의 인간이었다. 에르는 큰 변화는 없었지만, 설정상 태어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키가 꽤 줄어든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 아인이 짧게 소리를 질렀다.
아인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하프엘프와 인간의 차이는 귀가 살짝 뾰족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것도 없었으니까.
키나 근육량도 그대로. 달라진 것은 귀 하나뿐. 아인은 작은 거울로 그것을 보다가, 별반 다르지도 않은 모습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갑작스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살짝 둥글해졌을 뿐인 귀. 저것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치러 온 수많은 고역들이 순식간에 상기되면서 동시에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귀 하나뿐인데. 그것 말곤 다른 것도 없는데.
당황한 에르가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다가왔으나 평소와는 눈높이가 달라 당황하고, 아인은 알아서 눈가를 훔치며 헤실헤실 웃고 에르를 꽉 들어 끌어안았다.
“저희 이제 밥 먹어요?”
“아직 한 명이 포션을 안 먹어서 말이지.”
“제기랄. 이대로 훈훈하게 지나갈 뻔했는데.”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닉 쪽으로 향했다. 닉이 마시는 것은 랜덤하게 종족을 변화시키는 것. 드라이어드, 골렘, 늑대인간부터 시작해서 대륙에 존재하는 수백 개의 종족 중 무엇으로라도 변할 수 있었다.
이 포션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미발견된 종족으로 변하는 이들도 있어, 의외로 단순한 커스터마이징이나 일회성 스샷용 포션이 아닌 은근히 정보 차원으로도 쓰일 일이 많았다.
“용사님은 뭐로 변하고 싶으세요?”
“어지간한 건 다 괜찮은데.”
“버그족도요?”
“지금부터 그것만 제외할게.”
작지만 무리 지어 다니며 뛰어난 지성을 가진 버그족은 설정상으로만 존재할 뿐 아직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록상에 존재하는 땅속의 ‘망궁’같은 경우는 그들이 열쇠를 쥐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다만 모습만 보면 단순히 벌레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에, 트레저 헌터 사이에서도 다소 기피되는 탐사 목표 중 하나였다.
“용사님은 사마귀가 어울려요.”
“벌써부터 단정 짓지 마.”
“고양이 귀 보고 싶어요.”
“욕망에 찬 희망만 분출하지도 마.”
“고양이 귀를 한 사마귀?”
“너 조만간 나랑 상담 한번 하자.”
결국 닉은 포션을 뚫어져라 보다가 한숨을 쉬곤 벌컥벌컥 들이켰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나는 편이라 모든 이들이 닉의 변화를 좇으려 했지만,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설마 그 많고 많은 종족 중에 인간으로 변한 건가 싶어 실망의 목소리가 이는 찰나, 아인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귀요.”
“귀?”
아인의 말에 닉은 자신의 귀를 만져 보았다.
길이는 비슷해도 살짝 뾰족한 감이 느껴졌다.
“하프엘프로 변했나 봐요.”
아인이 묘한 기분으로 변한 종족을 알려 주자, 닉은 눈을 굴리며 귀를 몇 번 만져 보더니 심드렁한 소감을 말했다.
“똑같네, 그냥.”
밥 먹자. 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고, 아인은 그런 닉을 가만 보다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