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97)
97화 : 모두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요
“무슨 놈의 턱 힘이 뭐 이렇게 약한 거야? 고기만 씹는데도 하루 종일 걸리겠군.”
일행은 인간으로 변해 있는 동안 광장의 한구석에서 악식왕이 만들어 준 요리를 먹고 있었다. 늑대의 치악력에 익숙한 라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커다란 고기 한 조각을 한참 동안 우물거리고, 본래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닉과 아인은 평소처럼 음식을 먹었다.
사하바티와 이후프는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익숙하질 않은지, 처음엔 입 안에 넣은 뒤 씹지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턱을 움직여 씹기 시작했다.
눈썹을 이리저리 꿈틀거리던 에르는 점차 익숙해졌는지 요리를 몇 개 더 자신의 접시에 옮기기도 하고, 이목구비가 생긴 이후프는 눈웃음을 지었다.
“입 안에서 매력적인 기운이 터지는군요. 저희는 대개 온몸으로 마나를 받아들이다 보니 맛이라는 건 둘째치더라도 한 곳을 중점으로 자극이 느껴진다는 것이 낯설면서도 나쁘지 않아요. 인간종들의 폭발적인 집중력이나 잠재력이 이런 곳에서 비롯된 걸까요.”
뜨거운 음식에 손을 푹 담가 놓은 사하바티 역시 공감하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로 다른 이들을 공감할 수 있다니. 좋은 경험이야.”
“사하바티! 손! 손! 손! 손 빼요!”
“아, 이걸로 먹는 것이 아니었구나.”
뿌리를 이용해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에 익숙한 사하바티는 느릿하게 손을 빼고 다시 음식을 먹었다. 한숨을 쉬며 손수건으로 양념을 닦아 준 아인은, 체구가 작아진 채 계속해서 고기를 먹고 있는 에르를 보곤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에르는 정령이니까 음식을 따로 먹을 필요성을 못 느꼈을 텐데.”
“응. 그냥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나를 채우고 있었어. 그런데 몸이 노곤노곤해지는 것도 좋아. 좀 더 강해진 기분도 들고.”
사실 음식만 먹는다고 갑작스럽게 몸이 좋아지거나 강해지진 않을 것이다. 단순히 맛있다는 표현이겠거니 하고 있는데, 푹 익어 물러진 당근을 씹던 닉의 앞에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소유 중인 펫의 포만감이 최대치까지 올라갑니다. 능력치가 상승하며 당신의 말을 더 잘 들을 것입니다.]‘맞다. 에르가 내 펫이었지?’
처음부터 펫이었던 것도 아니고, 펫이 되었다는 것을 안 이후에도 여전히 옆에 있고 아인을 좋아하니 딱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전에 패치 보상으로 펫 관련 용품들을 줬었지….’
지금껏 잊고 있었던 아이템들이 생각나, 닉은 인벤토리를 뒤적여 보았다. 펫 전용 먹이와 인벤토리, 물약과 호루라기까지.
물약은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지만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 아이템은 당장 사용하기가 아까웠다. 시간 제한이 있는 소비형 아이템은 끝끝내 쓰지 않다가 정작 보스전에서는 잊어버리는 닉이었으니.
“에르, 이리 와 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어.”
“내가 간다, 내가 가.”
그건 또 언제 배운 거람. 닉은 투덜거리며 펫 전용 인벤토리를 한 손에 덜렁덜렁 들고 다가갔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작은 가방처럼 생겼지만,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걸어 다니는 창고 즈음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용도로는 에르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사용하려고 해 봤자 아인이 뭐라고 할 것이 뻔했다.
‘얘가 뭐라고 할 게 무서워서 안 하는 지경까지 왔나….’
닉은 새삼스레 주변인들에 대한 무게감이 높아졌다는 것을 생각하며 내적 한숨을 쉰 후, 가방을 살짝 열어 안쪽을 가리켰다.
“선물이야. 여기에 네가 담고 싶은 거 아무거나 넣어도 돼.”
“…갑자기?”
“원래 네가 내… 펫. 그거 됐을 때 바로 줬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어.”
에르는 요리를 먹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닉에게 별다른 꿍꿍이는 없다는 것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이내 입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삼킨 후 가방을 집어 들었다.
“정말로 뭐든 담아도 돼?”
“응. 간직하고 싶은 거라도 있냐?”
에르는 아인을 집어 들었다.
“스톱!! 스톱!!!”
“에르, 잠깐! 잠깐! 고맙지만 잠깐만!”
에르는 아인의 손을 입구에 반쯤 집어넣다가 실패했고, ‘사람은 넣으면 안 된다.’라는 말을 듣고는 살짝 시무룩해졌다.
“그러면 쓸모없어.”
“언젠가는 쓸모 있을지도 모르잖아. 소중한 게 더 생긴다든지.”
아인도 옆에서 ‘그런 게 꼭 생기게 만들 거야!’라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에르는 아인이 말하는 것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았는지 결국 시선을 내리며 같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소중한 게 생기면 여기에 영원히 옮겨 두면 되는 거야?”
“그건… 아니지? 인벤토리가 무한정하진 않으니까. 시간이 지나서 상하거나 쓸모가 없어지는 건 버리기도 해야 돼.”
에르는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에 기분이 복잡해졌는지 눈을 굴렸고, 닉은 다른 펫 전용 아이템을 살펴보았다. 개중 붉은색 호루라기를 이곳저곳 훑어보다가 입에 대자, 눈앞에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펫 ‘에르’가 소환 상태입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이거 사용하면 하루에 한 번씩 강제 소환 및 강제 역소환이었던가.’
사용하기에 따라 무척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 번 역소환이 되면 무조건적인 안전한 상태에 놓이는 곳이니, 위험 상태를 한 번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문제는 우리 중에서도 강한 축인 에르가 위험에 빠질 만한 상황이라면 이미 전멸에 가까울 거란 말이지….’
상상만 해도 싫었다. 저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쉬자, 호루라기에서 힘없는 소리가 휘로로로 하고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에르가 역소환되었다.
“으악! 으아악! 으악!”
“용사님, 에르가 사라졌어요!!”
“나, 나도 알아! 내가 한 거야!”
갑작스러운 흑막 선언에 아인이 혼란스러워하고, 닉은 부리나케 펫 창에서 에르를 찾아 재소환을 시도했다.
“에, 에르 소환! 지금 당장!”
[호루라기로 인한 강제 역소환 시에는 일정 시간 이상 소환이 불가합니다.남은 시간: 10분]
“그럴 거면 정말로 역소환하겠습니까 같은 확인 질문이라도 넣으란 말이야!!”
“용사님 설마 에르를 완전히 없애 버린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지만… 하필 쓸모없으면 사라지니 버리니 하는 대화를 하던 시점에서 역소환을 해 버렸어!! 얘 갑자기 삐뚤어지면 어떡해?!”
한참 식도락을 즐기고 있던 중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였지만, 이 정도의 소란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는 듯 라칼과 이후프, 사하바티는 여유롭게 남은 음식을 먹었고 악식왕만이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다.
“내 요리가 그렇게 맛있었나!”
“보통 이럴 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냐고! 자신감 높은 건 좋고 요리도 맛있긴 했지만!”
닉의 자초지종을 들은 악식왕은 느릿하게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펫이었군. 어떻게 그런 펫을 얻었는지는 고사하고. 어떻게 10분 뒤의 사태를 타개해야 할지 고민이란 말이지.”
“나오자마자 난 쓸모없는 녀석이니 뭐니 하면서 엇나가면 곤란해…. 엄청 곤란해진다고.”
‘정령에게 좋은 사과 방법’ 같은 걸 홈페이지에서 찾아볼까 하며 닉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데, 악식왕은 깊게 숨을 뱉더니 소매를 걷으며 중얼거렸다.
“닉, 개를 키워 본 적이 있나?”
“개… 개? 있는데. 왜?”
“그렇다면 잘 알고 있겠군. 그런 경우는 제정신이 들도록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아야 한다.”
“뭐…? 뭐?”
악식왕은 그 말을 하며 전에 없는 가라앉은 얼굴로 손을 몇 번 풀었다. 동시에 닉과 아인은 지금껏 그에게서 본 적 없는 투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수십 명에 이를지도 모르는 헤르도아의 사제들을 순식간에 토벌해 버린 그 힘은 절대로 만만히 볼 것이 아니다.
싱싱한 몬스터라는 식재료는 직접 손으로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 더군다나 파티가 아닌 홀로 다닌다는 것은 여러 명이 합심해야 간신히 넘을 수 있는 수많은 위험을 홀로 부숴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어쩌면 다소 약화된 지금의 에르와도 충분히 비견될지도 모를 만한 강함.
악식왕은 닉의 호루라기를 힐끔 바라보고 천천히 다가오며 주먹을 꽉 쥐더니-
그대로 닉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악.”
“강제성 있는 뭔가를 다룰 때는 조심성 있게 좀 사용해라.”
“버릇 단단히 고쳐 놓는 게 내 쪽이냐고….”
“그럼 그 녀석을 혼내리? 개 키울 때도 문제 생기면 대부분은 보호자 쪽의 잘못이야.”
닉은 맞은 곳을 한 대 더 맞은 후 짧은 시간 동안 [뇌진탕] 상태 이상과 함께 스탯이 쭈욱 상승했으며, 소환 가능한 시간까지 내리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나도 강해질 만큼 강해졌는데 그래도 스탯이 오르고 있어….’
역시 혼자 대륙을 돌아다니며 명성을 얻으려면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걸까. 닉은 어쩌면 그가 아니었다면 헤르도아의 습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겠다는 섬뜩함이 이는 한편, 동시에 플레이어가 있었다면 또 한바탕 소문이 퍼지겠다는 피곤함을 동시에 느꼈다.
“10분 지났다. 소환해 봐.”
“알았어…. 에르 소환.”
닉이 명령어를 읊조리는 동시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응집되더니, 아직 어린 인간 상태에서 해제되지 않은 에르가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안. 놀랐지.”
닉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악식왕이 시킨 대로 변명 없이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에르는 그런 닉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표정의 변화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리.”
“응?”
“아까 먹던 거. 다시 줘.”
“어…, 잠깐만. 아까 건 떨어트려서.”
에르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닉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새 요리를 가져다주었고, 에르는 앉은 자세 그대로 마저 음식을 먹었다.
닉은 에르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어 삐진 것인지 괜찮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눈치를 보다가 괜찮냐고 물어보자, 에르는 고개를 갸웃하곤 닉의 생각을 한 번 읽은 뒤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신경 안 써. 닉이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
“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만.”
처음에 보였던, 마냥 불안정하고 의기소침한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어찌 됐든 나쁠 건 없었으니 닉이 애매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음식을 모두 먹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사하바티와 이후프는 옅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동안 에르도 조금 자랐을 테니까.”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것을 수행한다.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의문을 품고 불안해하던 정령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러운 하나의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또한 같이 다니는 동안 자신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은 있을지언정 불안하거나 껄끄럽게 여기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으며 에르 역시 그것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구 하나라도 비스름한 감정을 품었다면 에르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불안을 조금씩 키워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은 동료들이군!”
에르가 마지막 한 접시를 비우고 그것을 흐뭇하게 보던 악식왕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요리를 해 주었던 냄비와 접시에 클린즈 마법을 사용하고는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럼 나도 슬슬 가 볼까. 외형 변화 포션는 처음엔 나도 룩딸용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쓰임이 있군. 좋은 정보를 얻고 간다.”
“아. 잘 가요. 헤르도아 막아 준 것도 고맙고 음식도 맛있었어요.”
“밥 먹는데 건들려고 한 놈들 치우는 건 당연하지! 오히려 내가 고맙다.”
악식왕은 호탕하게 웃은 후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발을 끽 멈추고 닉을 보았다.
“말할까 말까 했는데. 얻은 게 있으니 돌려줄 게 있어야겠지.”
“뭔데요?”
악식왕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닉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우라노스가 곧 이곳에 온다. 너희는 자리를 피하는 걸 추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