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hat's logout? RAW novel - chapter (99)
99화 : 랭킹 1위는 어떤 분인가요?
“한 번쯤은 모두에게 각각 이런 옷을 입혀 보고 싶었어요. 사이즈가 나오질 않거나 닿으면 금방 찢어질 게 뻔해서 상상만 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또 몰랐네요.”
아인은 일행을 이끌고 도합 17군데의 옷 파는 가게 및 길거리 판매상을 둘러본 뒤 두 번째로 들렀던 곳에서 옷을 사 입혔다. 체력 하나만큼은 발군이라고 할 수 있는 라칼조차 퀭한 얼굴로 대강 고개를 끄덕였고, 에르는 아인에게 들린 채 초점 없는 눈만 끔뻑였다.
라칼은 약간 해진 느낌이 있는, 닳고 닳은 용병이라는 느낌이 나는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사하바티와 이후프에게는 각각 고풍스러운 드레스와 신사복을. 키가 작아진 에르는 도련님 느낌이 나는 반바지와 멜빵, 캐주얼한 정장을 입힌 뒤였다.
목숨을 건 전투를 끝마친 뒤보다 더욱 보람찬 삶을 만끽하며 아인이 흐르지도 않는 땀을 훔칠 무렵, 상의를 입는 것이 어색한지 자꾸만 가죽을 긁던 라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닉은 어디에 간 거냐? 그 녀석 성격에 물건을 길게 볼 것 같진 않은데.”
“어라, 그러게요. 혹시 예전에 저와 같이 쇼핑한 이후로 그 맛을 깨달아 버린 걸까요?”
“그때 닉의 얼굴은 헤르도아 소굴에서 간신히 도망친 민간인 제물 같았는데.”
아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라칼을 흘겨보았다가 바람의 하급 정령 윈디를 소환해 닉을 찾아보기로 했다. 노타나 영지는 그렇게 큰 곳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 내는 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인파 때문에 길을 조금 헷갈린 정도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데, 윈디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왜 그래? 용사님 벌써 찾았어?”
“아니! 그런데 너를 찾는 사람들이 있어. 카오스의 조각들!”
“나를…?”
지금 다니는 일행 말고 자신이 알고 있는 카오스의 조각이라면, 마라 롱샤 탕 세 자매와 라폴라 영지에서 만났던 GM밖에 없었다.
전자라면 오히려 반갑겠지만 후자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기에 아인의 낯이 다소 창백해질 무렵, 라칼이 아인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으악, 왜 그러세요?!”
“가만히 있고 모른 척해. 여길 주시하는 기척이 있다. 별로 부드러운 느낌도 아니야.”
라칼의 말에 아인은 입을 꾹 닫고 가만히 선 채 괜히 일행들의 옷을 만지는 척하며 귀를 기울였다. 인간의 몸이었기에 하프엘프일 때보다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종족 특성치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의 목소리는 듣기에 무리가 아니었다.
“닉 모하지랑 같이 다니는 NPC 쟤들 아니야? 아인이라는 녀석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는데.”
“멍청아, 외형만 좀 비슷한 것뿐이야. 자료에선 정령과 하프엘프를 왔다 갔다 한다고 들었는데 귀를 보면 그냥 인간이잖아. 그리고 주변에 있는 녀석들도 다 인간이고. 드라이어드, 아랑족, 골렘, 정체불명의 정령 중에 들어맞는 게 한 명도 없잖아.”
인간으로 외형을 변화시키는 포션을 먹어서 다행이다. 아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발소리가 완전히 거두어지자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이쪽을 바라보던 시선도 사라졌는지 라칼도 혀를 한 번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그러고 보니 어떤 분에게 오해와 원한을 산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데….”
“어떤 분들이 아니라 한 명이라고? 생각보다 잘 살아왔잖아.”
“대체 용사님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신 거예요?”
그러는 자신도 처음에 닉이 상황을 말할 때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어요. 그냥 누군가가 시비를 거는 정도려나 싶었는데.”
“카오스의 조각이니 목숨의 위협 같은 것은 걱정되진 않지만. 그들끼리는 또 서로 무서운 것을 알고 있겠지. 어떡할 거냐.”
어쩌면 자신들이 가는 것이 짐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카오스의 조각끼리 일어나는 마찰에 괜히 이곳 주민들이 끼어들었다가 더 복잡하게 번질 우려도 존재했고.
닉이라면 언제나 그랬듯 대강대강 어영부영 해치우고 올 것 같았지만, 아인은 결연한 얼굴로 주먹을 꼭 쥐었다.
“구해야죠!”
합리나 효율은 생각하지 않는다. 닉에게는 때로 트롤짓이라고 여겨질 만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고집.
라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더니, 작은 코를 쫑긋이며 그들이 사라진 길을 뒤쫓았다.
“그러면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따라가자.”
“잠시만요. 이게 되나 모르겠는데….”
아인은 모두를 모으고 두 팔로 감싸더니, 입 속으로 ‘파티원 위치로 이동’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것은 실망스러운 알림창뿐이었다.
[시야 안에 있거나 일정 거리 이상 가까울 경우에만 사용 가능합니다.]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 발로 뛰어 찾는 것뿐. 아인은 자신들을 보던 이들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라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찾을 수 있나요?”
“나만으로는 무리지만.”
라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드라이어드와 골렘일 때와 달리 완연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사하바티와 이후프가 각각 돌과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팔을 들어 올렸다.
“흔적을 쫓는 것에만큼은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이후프가 팔을 들어 가볍게 땅을 손바닥으로 내리치자, 느릿하게 근방의 땅이 울렁이더니 이후프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영지 안에 있는 나무들도 사하바티의 질문에 답하듯 살랑였다.
각자 자신이 가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에게서 이어진 헤르도아의 악연을 따라가기 위해.
그동안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며 쫓아오고 있었는지 문득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아인은 마주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에르, 우리도 시작하자.”
“…찾으면 바로 말하러 올게.”
에르는 눈을 위로 했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아인의 품을 쏙 빠져나오더니 주변의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그가 가진 수많은 원소 중 어둠의 정령의 특기. 이곳을 기점으로 영지 내의 그림자는 에르의 눈과 귀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새삼스레 다들 대단하구나. 아인은 아까 소환했던 윈디를 다시 불러 그들을 쫓아가게 한 뒤, 자신도 영지의 곳곳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별일은 아닐 것이다. 그냥 자신을 찾는 데에 우리들이 이렇게나 힘을 써 준다고, 그 사실에 조금은 감동을 받아 주길 바랄 뿐.
닉을 데리고 또 다른 옷을 살까 정도의 고민만 하고 있던 중, 뒷골목 구석구석을 훑어보던 윈디가 돌아와 아인의 앞에서 손을 휘적였다.
“피이. 피이이.”
“어? 벌써 찾았어?”
***
닉은 시선이 가려지고 두 손이 포박된 채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정보 상인은 자신의 정체가 닉 모하지라는 것을 알자마자 주변에 숨어 있던 경호원들을 불렀고, 닉은 무어라 반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잡혀 버렸다.
‘와, 근데 기분이 더럽긴 한데. 이런 거 처음 당해 봐. 영화 같다.’
당장의 닉에게 커다란 위기감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통각 수치를 낮게 한 닉에게 끌려가는 아픔도 없고, 정말 기분이 별로다 싶으면 로그아웃을 하면 된다. 어딘가에 갇히더라도 긴급 탈출 명령어만 입력하면 빠져나오는 것은 금방이다.
‘이다음엔 ‘형님, 데려왔습니다.’라고 하면서 날 내동댕이치고 이상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검정 소파에 앉은 보스한테 데려갈 차례인가?’
사실 좀 흥미진진해서 기대까지 했다.
파티원 NPC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은 목숨의 위협은 없는 데다 랭킹작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닉은 경험치를 잃어버리는 정도는 별 타격도 아니었다.
닉은 지금까지 본 여러 매체의 인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순순히 잡혀가고, 그를 끌고 가던 정보원은 힘을 주어 닉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데려왔습니다.”
‘와아아앗! 정말로 그 대사 했다!’
닉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진짜로 재밌어지고 있어서.
그 형님이라고 불린 이는 닉의 앞에서 느리게 몸을 움직이는 소리를 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미친, 이게 뭐 하는 거야. 당장 풀어.”
“네?”
정보원은 당황스러운 듯 되묻다가 모종의 신호를 받았는지 급하게 닉의 포박을 풀고 눈을 가리고 있던 천도 벗겨 주었다. 시야가 드러나자 그 앞에는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는 건장한 남성 플레이어와 그 옆에서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있는 정보원이 보였다.
“리스트 님.”
“네.”
“누아르 영화 좋아하고… 그런 건 아는데요. 좀 많이 신나신 것 같아요.”
“사실 좀 신났습니다.”
“안 그래도 프로토게노이 길드 이미지 추락 중인데 이분이 사건 제보 게시판에 올리면 어떡할 거예요. NPC 아니에요. 플레이어잖아요. 게다가 좋아하는 분도 꽤 많은.”
“죄송합니다….”
생각과는 다른 풍경에 닉이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남자는 다시 닉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이분이 좀 과몰입을 하는 바람에 실례를 저질렀네요. 전 분명 ‘찾으면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게 얌전히 데려와.’라고 했는데.”
누아르에서 그런 대사 하면 죽기 직전까지 팬 다음 묶어서 데려오라는 뜻으로 통용되기도 하지. 닉은 시무룩하게 풀이 죽어 있는 정보원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 후 남자를 보았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 저, 혹시 우라노스… 님인가요?”
“네, 맞습니다. 자랑하는 것처럼 들릴진 모르는데, 제 얼굴 모르는 분 만나니까 그거대로 신기하네요.”
애초에 닉은 커뮤니티 활동은 일체 하지 않는 데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별 관심이 없기도 하다. 인게임의 우라노스 얼굴이야 온갖 곳에서 떠돌아다녔지만, 닉이 보던 정보글에선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예전에 보았던, 카오스의 유명인들을 모아 놓은 영상에서는 자신이 나올 때쯤 동영상을 꺼 버렸다.
‘아마 그 동영상의 마지막에 하이라이트처럼 우라노스가 나왔겠지.’
랭킹 1위.
다른 게임에서의 핵과금 유저들이 즐비하는 이 카오스에서도 독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플레이어이자, 대륙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의 고위층까지 올라간 존재.
그의 사명에 대해서는 플레이어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 ‘메이지’가 마법을 걸어 놓아 정보 일체를 확인할 수가 없으며, 때문에 그와 관련한 온갖 추측과 분석글까지 나도는 상황.
하지만 단순히 그는 압도적인 무력이나 힘으로 찍어 누르는 성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캐릭터의 능력이나 스킬과는 별개로 보여 주는 뛰어난 임기응변, 결단력 등이 지금을 있게 만들었으며 특유의 정치력과 상황 판단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능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왜 갑자기 절 보자고 하셔서….”
“아, 그게. 사실 저도 말씀드리기가 조금 껄끄러운데요.”
사실 대강 예상은 가고 있었다. 오시하는 눈의 레이드부터 시작해, 직간접적으로 우라노스가 속한 프로토게노이에게 크고 작은 손해를 입히곤 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위압적이거나 성격이 나쁜 것 같진 않았기에, 닉은 조금 긴장을 풀고 괜찮다는 듯 손을 살랑거렸다.
“아무래도 저희 서로에게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게 많을 테니까요. 차차 풀어 나가면서….”
“하하. 그런 것도 있죠.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면 뭔데요?”
닉이 고개를 갸웃하자, 우라노스는 부드러운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데리고 다니는 정령. 아인이라는 NPC였던가요? 떼어 놓든 버리든 죽이든.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