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2)
101영웅의 독대
트레이브 가문과 라바일 가문.
두 가문의 연은 일검자 시대로부터 올라간다.
일검자께서는 ‘바위의 검’을 버틸 검이 필요했고, 대륙 제일의 대장장이였던 트레이브 가주는 그런 선조께 하나의 검을 만들어 주셨으니, 그것이 대륙 28대 명검 중 ‘참암검’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선대에까지 이어졌고, 라바일 가문의 몰락을 염려하시던, 아버지께서는 고심 끝에 트레이브 가문과 약혼을 진행하셨다.
“차 맛은 좀 어떠십니까?”
“…좋군요.”
그렇게 15년 만에 만나게 된 약혼자. 에반 경을 상대로 나는 어색함을 느꼈다.
그분의 뜻대로 헤일 가주님의 침소를 지키면서, 내가 이렇게 에반 경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데는 꽤나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헤일 가주님이 진료를 받는 중이시며, 내가 그 호위를 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반 경은 내가 그럴 일을 할 필요는 없다며, 가문의 경비병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분을 지키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
내가 극구 사양하고, 에반 경이 애써 설득하는 실랑이 끝에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에반 경이었지만, 나 또한 약간의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취하게 된 양보가 바로 이것. 에반 경이 직접 침소 앞까지 가져온, 두 개의 따스한 찻잔이었다. 물론 대륙을 떠돌며 온갖 경험은 다 해 본 만큼, 이제 와서 선 채로 차를 마시는 것 정도에 어색함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보는 시선은, 내게 있어 너무나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도움을 주러 찾아와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껄끄러운 심정을 애써 누르며, 나는 침착하게 에반 경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중요한 질문을 건넸다.
“에반 경. 경께서는 가주님께서 앓고 계시는 병환의 정체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에게 쓸 약을 찾고 있었다면, 필요한 게 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해독제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가주님이 중독됐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 부분을 하인들에게 함구했을 뿐일 터.
문제는 움직이는 요새 성검자라 불리며, 숱한 경험을 쌓아 온 헤일 가주님이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중독되었느냐 하는 사실이었다.
“사정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원래 언급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만… 다른 분도 아니고 세레나 양이니,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검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옅은 미소를 짓기도 잠시, 에반 경은 살짝 얼굴을 굳힌 채,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 *
루반 공국은 정보력을 상당 부분을 국내, 그것도 영지를 맡고 있는 영주나 권세 높은 명가를 감시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전의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덕분에 루반 공국에서 내전의 불씨는 이제 거의 완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정보망에 수상한 움직임이 잡혔다. 딱 꼬집어 말할 정도로 분명하지는 않은, 단지 뭔가 미심쩍다고밖에 할 수 없는 정보.
그러나 젊을 때 한 차례 내란을 겪어 본 만큼, 루반 공왕은 그것이 혹시 내란의 징조가 아닐지 우려했고,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신하이자 일당백의 무력을 갖춘 최고의 검사, 헤일 가주님께 조사를 부탁하였다.
강인한 무력과 깊은 경험을 바탕으로 가주님은 은밀하게 그 움직임을 조사해 갔고, 결국 어떤 비밀 조직이 있음을 밝혀내셨다. 하지만 비밀 조직의 세력은 상상 이상이었고, 덕분에 그 조직의 실체에 닿기 전에, 헤일 가주님이 중독당해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다.
** *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에반 경의 이야기를 들고,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겨 들었다. 헤일 가주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성검자로서 위명을 떨치신 검사였다. ‘홍염의 불꽃’이라는 절세의 검술을 배운 나조차 감히 승패를 자신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연세가 있으신 만큼 육체는 약해지셨지만, 다른 검경도 아니고 무아지경을 깨우친 그분에게, 육체의 쇠잔함은 큰 단점이 아니었다.
더구나 루반 공국의 내란부터 비밀 조직 토벌과 같은 업적에 이르기까지 ‘움직이는 요새’라고 불릴 만큼 온갖 경험을 쌓아 온 헤일 가주님이다. 웬만한 비밀 조직은 감히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오히려 헤일 가주님을 중독시키다니…?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아는 만큼,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조직에 대해 아시는 바는 없습니까?”
“아직은 확실하게 알아낸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의외로 오래전부터 암약해 온 조직이라는 것, 그리고… 내일 있는 왕궁 무도회 도중, 왕실에 진상될 어떤 보물을 노리고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왕실에 진상될 보물을…? 아무리 루반 공국이 작은 나라라도, 명색이 일국의 왕궁에 진상될 보물을 노리다니.
문제는 헤일 가주님까지 쓰러트린 이상 그 조직에게 정말로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실행할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서 왕궁의 경계를 평소보다 배 이상으로 강화하고 있지만, 아직 적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안전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거기까지 설명을 끝낸 후 에반 경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이 어떨 때 그런 얼굴을 보이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무척 실례되는 말씀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얼마나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지 몇 차례나 말꼬리를 흐리던 끝에 에반 경은 결국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단호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끝맺었다.
“저와 함께 왕궁 무도회에 참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기껏해야 왕궁의 경비를 도와 달라거나 헤일 가주님을 지켜 달라는 것을 예상했을 뿐, 이런 부탁은 상상도 못 했던 나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에반 경은 농담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이번 기회에 그 조직을 끌어들여서 완전히 소탕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왕궁에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레나 양께서 드러나지 않는 검이 돼서 이번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하늘의 검이라는 칭호를 받은 천검자. 능히 일당백의 무력을 지닌 검사인 데다가, 여성인 만큼 무도회에 잠입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이 일에 끼어들어도 되느냐는 것.
정체를 숨기고 도피행을 하고 있는 지금 섣불리 왕궁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트레이브 가문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이 부탁을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여러 비밀 조직을 상대해 본 만큼 나는 그들을 확실하게 물리치지 않는 이상, 헤일 가주님을 치료하기 찾아온 그분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깊은 고민 끝에,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제 신분을 비밀로 해 주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