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7)
106악당의 대담(1)
그야말로 첩첩산중.
엎친 데 덮친 격, 불난 데 부채질하고, 홍수 난 데 물 뿌리고, 가뭄 난 데 불 지르는 꼴이랄까?
앞으로는 황제를, 뒤로는 영웅 녀석을 둔 이 최악의 상황에 나는 식은땀으로 등이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나마 변장을 해 뒀기에 다행이지. 정체를 들키면 그 순간 내 목숨은 끝이다.
내가 아무리 숙련된 악당이라도 그렇지. 차라리 마법사와 검자와 신관 전사와 태그 매치를 벌이는 게 안심될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는 도저히 묘안을 짜낼 수 없었다.
“흐음. 우리 사이에 꼭 그런 말을 써야 하는가?”
“황실의 법도가 지엄한데, 어찌 신이 폐하께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는 녀석을 보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물론 그것은 이치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앞에서는 실수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 예상대로, 황제는 녀석의 말을 그냥 묵과하지 않았다.
“라바일 경. 그대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네.”
서서히 퍼져 나오는 위압감.
일개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압도적인 기세에 어깨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명심하게. 짐이야말로 바로 제국의 황제이며, 그리고 그 어떠한 법도로도 짐을 감히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 그 어떤 법도 황제를 제약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20년 전, 이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내린 칙령이니까.
제국의 많은 신하가 전통과 법도를 내세우며, 그 칙령을 물러 달라 목숨 걸고 울부짖었지만, 황제는 결코 뜻을 바꾸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신하가 자신 앞에서 자결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감히 자신의 앞에서 피를 보였다는 이유로 그들의 일가친척을 감옥에 처넣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제국의 정치적 분위기는 거의 반란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지만, 막 내란 끝에 황위 계승이 끝나, 모든 군권이 황제에게 몰려 있던 시점인 만큼, 감히 그것을 시도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있어도 시작하기도 전에 박살 났고, 결국 제국 공신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칙령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그것이 역사상 그 어떤 황제도 이루지 못했던 절대 황권의 탄생이었다.
뭐, 덕분에 배후에서 암약하며, 제국 공신들에게 뇌물을 먹이거나, 가족들을 인질로 이용하며, 전통과 법도에 의지해 황실을 좌지우지하던 비밀 조직, ‘블랙 서번트’까지 홀라당 날아갔지만.
“…명심하겠습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얼어붙은 듯, 몸을 떨던 녀석이 고개를 조아리자, 나는 힐끔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뜻밖에도 황제는 싱긋 웃고 있었다.
“흠, 알았다면 됐네. 그런 고지식한 면이 경의 매력이기도 하니, 그대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겠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흐음. 어지간한 상대라면 목을 날렸을 텐데…, 황제 성격이 옛날보다 좋아진 건가?
아니면 그만큼 녀석을 총애하고 있는 건가?
뜻밖의 반응에 내가 의아해할 때, 황제는 문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네.”
“황공하오나, 신이 불충하여 어떤 소식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트레이브 가문의 소가주와 약혼을 했다고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
얼레?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야 명가에서 혼약을 맺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검밖에 모르는 녀석에게도 약혼자가 있었다니, 솔직히 뜻밖의 이야기였다.
“흐음. 과연 그랬던가? 경이 먼 방계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아 검을 물려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싶었네만, 이제 보니 애초부터 트레이브가와의 약혼을 마음에 두고 있었군그래.”
과연, 일리가 있군. 성검자와 천검자가 한집안이 된다면, 대륙 제일의 검가를 이루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위세를 적절히 이용하기만 해도, 라바일가는 단숨에 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경이 트레이브 가문과 같은 명가와 맺어졌으니, 진심으로 축하해야 할 경사로고.”
저건 아마 진심이겠지.
제국으로서도 유서 깊은 검가의 몰락은 탐탁지 않은 일일 터, 더구나 라바일가와 트레이브가 결합하면, 그 후손 또한 뛰어난 검사일 것은 물론, 영웅이 될 가능성 또한 높은 법.
더불어 서쪽 끝에 있는 루반 공국에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검자를 박아 둠으로써, 서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으니,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황제로서는 이 약혼을 축하할 만했다.
“폐하. 그것은….”
“그래, 경의 약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이걸 주도록 하겠네.”
“……!”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녀석의 말을 가로막으며, 황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물건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황제가 선물로 주겠다는 것은 방금 공왕에게 빼앗듯이 받아 온 《악의 서》였으니까.
“신에게는 과분한 물건이옵니다.”
“사양할 필요 없네. 경은 짐의 의매가 아니던가? 그러니 적어도 이 정도 선물은 주어야 짐도 체면이 서는 법이네.”
“하오나…!”
웃기는 소리!
아무리 온갖 보물을 가진 황제라지만, 설사 의자매가 아니라 친혈육에게라도, 절대 내줄 수 없는 것이 대륙 36대 기보다.
그런데 그걸 고작 약혼 선물로 준다고? 그것도 기보 서열 1위의 보물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은 내 귀에 연이어 충격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대와 함께 살고 있는 마족 소녀 때문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경이 약혼식을 올리게 되면, 그 소녀를 짐의 이름으로 보호해 줄 터이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국의 정보력을 고려하면, 황제가 녀석과 계집애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마족인 계집애를 보호해 주겠다니?
그렇게 혼란에 빠진 나와 굳어진 녀석을 두고, 황제는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짐의 보호라면 더 이상 그 소녀가 세상의 눈을 피해 쫓겨 다녀야 할 필요는 없을 터, 어딘가의 외딴 마을에서 조용히 살 수도 있을 테고, 원한다면 영지가 딸린 가문을 하나 내줄 수도 있네.”
그 파격적인 제안에 나는 내심 혀를 휘둘렀다.
아무리 녀석이 명성 높은 영웅이라도, 이 정도면 영웅이 아니라, 영웅 할아버지라도 받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였으니까.
“이 정도면 경의 약혼 선물로는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부족할 리가 있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힐끔 녀석을 봤다.
그리고 눈이 튀어나올 만큼 경악했다.
당장 성은이 망극을 외쳐야 할 녀석이, 어째서인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 응?
빨리 눈 깔아라. 어서!
황제는 결코 거역을 용납지 않는다.
황제가 이토록 배려를 했는데도, 여기서 녀석이 그것을 거부한다면, 아무리 총애를 받아도 넘어가지 못할 것이고, 이미 낱낱이 소재가 파악돼 있는 계집애는 물론, 나까지 덤으로 즉시 목이 날아가거나, 하다못해 감옥에 잡혀 들어갈 것이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경이 만족했다니, 짐 또한 무척이나 기쁘도다.”
후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내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것인지, 녀석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고, 그 대답이 황제를 만족시켰기에, 나는 죽다 살아난 듯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라.”
“…신 세레나 R. 라바일.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황제의 간단한 손짓과 함께 녀석이 물러가자,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걸로 황제 앞에서 내 정체가 들키는 최악의 사태는 피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내 안도는 좀 이른 감이 있었다.
“참으로 귀여운 아이야.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대화에 재미가 붙은 듯, 지금까지는 나를 없는 듯 취급하다가 황제가 갑자기 건넨 질문에, 나는 급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신과 같이 비천한 이가 어찌 감히 라바일가의 가주님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급박한 동작치고는 더없이 매끄러운 자세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온 대답에 나는 내심 만족했다.
‘블랙 서번트’와 ‘골든 서클’의 비전, ‘황동의 왕좌’와 ‘악마의 황금률’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완벽한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바로 그것이 나의 실책이었다.
“흠. 짐은 그대가 라바일 경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귀엽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네.”
덜컹.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린 거 같다. 그것도 아마 절벽 위쯤에서.
방금 황제가 꺼낸 그 말은 평범한 시종에게 할 것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내가 코드 렐 스핀이라는 이름으로, 그 녀석과 함께 다니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말이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저 황제가 그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 키렐 R. 서번트?”
…분명, 내 다른 이름도 알고 있다는 뜻일 터,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오만 도도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던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목이 잘릴 대역죄였지만, 나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 또한 새삼스럽게 나의 무례를 탓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기껍다는 듯,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국의 정통 예법을 제대로 아는 시종은 황궁에조차 손에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네. 그런데 설마 루반 공국 따위에 제국 정통 예절을 ‘완벽하게’ 알고 실행할 수 있는 시종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제국의 정통 예법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 머리카락 하나는 물론, 호흡과 박동을 넘어 분위기마저 절도에 맞추는 예절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합이지.
바로 그 때문에 ‘블랙 서번트’ 는 오직 예절과 법도만을 이용해 황궁을 지배할 수 있었고, 그 예절과 법도가 무너지자 쓸려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10여 살의 어린 나이에도, 즉위하자마자 기존의 법도를 날려버려, ‘블랙 서번트’를 일망타진하고, 절대 황권을 세운 장본인이자, 내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위험 인물 베스트 2위’에 해당하는 무시무시한 상대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황제였다.
그야말로 생사의 위기나 다름없는 상황에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굴리는 내게 황제는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무려 20년일세.”
“정확히는 22년입니다.”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애써 담담하게 그 말을 받아 냈다.
여기서 동요를 드러내 봐야 좋을 것 없었으니까.
젠장. 그동안 잘 도망 다녀서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더니만….
설마 22년이나 지나서 정체가 발각될 줄이야. 내가 내심 스스로의 불행을 탓할 때, 황제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가 떠난 날이 아니라, 제국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그대를 찾아다닌 시간이, 말이네.”
“…!”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국의 정보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비록 최근 들어 그 이름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륙에서 제국을 따라갈 정보 조직은 흔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국의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20년 동안이나 나를 찾아다녔다고?
영웅&마왕&악당 [5권]
지은이 무영자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펴낸곳 (주)코핀 커뮤니케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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