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8)
목 차
107장. 악당의 대담(2)
108장. 마왕의 대담
109장. 마왕의 밀회
110장. 영웅의 밀회
111장. 악당의 밀회
112장. 악당의 역동
113장. 마왕의 역동
114장. 영웅의 역동
115장. 마왕의 격동
116장. 영웅의 격동
117장. 악당의 격동
118장. 악당의 밀담
119장. 마왕의 밀담
120장. 영웅의 밀담
121장. 객의 밀담
122장. ???
123장. 마왕의 악몽
124장. 영웅의 악몽
125장. 악당의 악몽
126장. 영웅의 재난
127장. 마왕의 재난
128장. 영웅의 당황
129장. 악당의 당황(1)
130장. 마왕의 당황
131장. 악당의 당황(2)
132장. 영웅의 축제(1)
133장. 마왕의 축제
134장. 영웅의 축제(2)
135장. 악당의 축제
136장. 마왕의 담론
137장. 영웅의 담론(1)
107악당의 대담(2)
“가출한 그대를 찾으려고 짐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는가? 카산드라 가문과 교우를 나누고, 라바일 경과 의자매를 맺고, 암흑 교단과 비밀 회담을 하고, 프리 나이츠의 잔당을 모아서 새로 기사단을 하나 만들기까지 해야 했단 말이네. 게다가 이번에 그대를 찾아 나서기 위해 황실 기사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기까지 했으니, 돌아가면 적어도 열흘 동안은 내내 잔소리를 들어야 할 판이네.”
…장난이 아니군.
듣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바짝 말라 온다. 내 행적을 이만큼이나 알고 있는 것을 볼 때, 제국의 정보력을 총동원했다는 말은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만큼 나는 신분 위장에 만전을 기해 왔으니까.
하지만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그 이유만큼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일개 집사에 지나지 않는 저를 그렇게 찾아다니신 겁니까?”
그렇다. 나는 그저 황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잠시 그 집사 노릇을 했을 뿐이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나를 찾아다닐 이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이다. 물론 황위 계승자들이 벌인 내란을 틈타, 황궁을 빈집 털이하기는 했지만, 뭐 대단한 보물도 아니고, 고작 미술품이나 책을 몇 개 훔친 좀도둑을 제국이 온 힘을 다해 추적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흐음. 일개 집사라.”
뭐야? 뭐가 그렇게 거슬리는데?
별 이상한 말을 다 들었다는 듯, 황제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짐에게 제왕학과 정치학과 경영학과 언어학 등등을 학자 수준으로 가르칠 수 있는 일개 집사라.”
움찔.
순간 내 뒤통수에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혔다. 아니, 그건 그냥 가정교사 줄 돈이 아까워서, 그거라도 대신 챙기려고 대충 가르쳤을 뿐이다.
문제가 있다면 학생이 워낙 천재라서,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알고, 알려 주지 않으면 스스로 깨닫고, 깨닫지 못해도 아는 듯 행동하는 괴물이었다는 것뿐이지.
“짐에 대한 무려 13차례나 되는 암살 시도를 단신으로 격퇴했던 일개 집사라.”
삐질삐질.
내 뒤통수의 식은땀이 두 방울로 늘어났다. 아니, 하지만 그 암살자들이 워낙 조잡해서, 반은 나에게 암살 누명을 씌우려고 했고, 나머지 반은 나까지 살인멸구하려 했으니, 도저히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황족 암살 죄를 짓고 도망치는 건, 아무리 나라도 쉽게 감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제국이 전력을 다해 찾아다녔음에도 무려 20년 동안 꼬리조차 밟기 힘들었던 일개 집사라.”
주르륵.
세 방울로 늘어난 식은땀이 하나로 합쳐져, 기어코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흐르는 가운데, 나는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한 갈등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뭐, 그건 그냥 넘어가도록 하세.”
…넘어갈 거면 일일이 꼬집지 말란 말이다아앗!
내가 무심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꿀밤을 날릴 뻔한 것은 거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결코 흥분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 겨우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는 침착하게 황제에게 예를 표해 보였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하지만, 짐의 집사이면서도 감히 짐의 허락도 없이 가출해 버린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네.”
채 감사를 표하기도 전, 툭 하니 튀어나온 말에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를 상대로 악마학적 수치의 보상금을 요구하거나, 오대 극형을 내리거나, 평생 감옥이나 노예 광산 따위에서 썩게 할 생각은 없네.”
…차라리 대놓고 협박을 하지 그러냐. 응?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제를 보며, 나는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는 순간, 그 모든 일을 모조리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신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절로 튀어나올 듯한 한탄을 씹어 삼키며, 나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무례고 뭐고 따질 판이 아니다. 여기서 기세에서 밀려나면 끝장이니까.
물론 아무리 ‘황동의 왕좌’를 사용한다 해도, 10여 살에 제국을 휘어잡은 황제를 상대로 기세 싸움을 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냥 잠자코 고개 숙이고 있다고 잘 봐줄 황제가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하아아압!! 간다, ‘황동의 왕좌’ 전력 가동!!
등을 펴고, 호흡을 가다듬어, 정신을 집중한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모은 기세를 눈에 담아 무겁게 가중돼 오는 황제의 위압감에 맞선다!
이야말로 시선과 기세만으로 생사가 오가는 치열한 기세의 전투!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 기세를 깡그리 날릴 수밖에 없었다.
“키렐, 짐의 것이 되게.”
…뭐라고요?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한 나를 지그시 보며, 황제는 위압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주겠네. 짐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당당하고도 영광스러우며, 온갖 부귀영화를 모두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아니, 잠깐, 정리 좀.
제발 내 뇌에 시간과 산소를 달라!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제안에 나는 머리에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혼란과 충격에 휩싸인 채 내심으로 비명을 질러 댔지만, 황제는 숨 쉴 틈도 없이 나를 몰아쳐 왔다.
“라바일 경에게 말했던 대로 마족 소녀를 걱정할 필요는 없네. 제아무리 신관들이 날뛴다고 해도 감히 짐의 보호를 받는 아이를 손대지는 못할 테니까. 정 불안하다면 그 아이를 황궁에 머물게 해도 상관하지 않겠네.”
이 정신 나간 제안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가 빠개지도록 뇌를 혹사한 끝에 황제의 눈을 마주한 순간, 문뜩 마른침을 삼켰다.
이 어둠 속에서조차 찬란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는 루비빛 눈동자.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투명하게 동공에 비치는 황제의 의도를…,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젠장!
“잠시 따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일단 차선책을 내놓았다.
당장은 그 의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 어떻게든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흐음… 좋네. 22년이나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금 더 못 기다릴 것은 없으니.”
휴우. 다행이로군.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의 행동에,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다급하다 보니 일단 말해 보기는 했지만, 황제의 성격상 내 요청을 그대로 씹어 버릴 가능성이 더 높았으니까.
“신 키렐 R. 서번트.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악의 서》가 들어 있는 상자를 난간에 올려놓고, 정중히 무릎을 꿇어 인사를 한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대놓고 도망칠 수야 없었던 만큼,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오히려 조금 느리게 걸음을 옮겨나갔다.
좋아. 잘만 되면 이대로 도망칠 수도….
“아, 하지만 오늘은 넘기지 않으면 좋겠네. 설사 그대가 또다시 도망친다고 해서 그 화풀이로 라바일가를 멸문시키거나 마족 아이를 처형할 생각은 없지만, 짐이 진노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네.”
…없을지도.
왠지 갑절은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이끌며, 겨우겨우 황제로부터 벗어난 후, 나는 생각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바로 바깥에 있던 왕궁 정원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