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10)
109마왕의 밀회
황제를 찾아내기 위해, 굳이 세비트를 부를 필요조차 없었다.
왕궁에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발코니. 그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황제를 발견하고, 나는 주문을 외워 새로 모습을 바꾼 뒤, 하늘을 날아올라 황제의 앞에서 마법을 해제했다.
“어서 오게. 귀여운 소년.”
갑자기 눈앞에서 새가 사람이 됐음에도, 황제는 아무런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나를 맞이하는 황제의 모습에 나는 마음속에 이글거리던 분노가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언제까지 날 그렇게 부를 셈이지, 황제?”
나는 굳이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이것이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애초부터 현명했다면, 황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들끓는 열기를 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느긋하게 입을 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리트리스 D. S라고 불러 주면 만족하겠는가? 72주문을 지배하는 마왕이여?”
“……!”
마음 한구석이 쿵 하고 흔들려 온다. 내가 마족이라는 것 그녀가 알리라는 것쯤, 그 정체를 알았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마족의 생존자로 여기는 것과 마왕이라는 신분을 알고 있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막대한 차이가 있었다.
부정해야 할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나는 그대로 떨쳐 버렸다.
이제 와서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상대로 내 정체를 숨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지?”
“이상한 말을 하는군. 제국의 황제인 짐이 그대를 몰라볼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명색이 군주라는 이가 적을 몰라봐서야, 우스갯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녀를 몰라본 내가 이상한 것이다.
고작 3년 사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한 만큼, ‘로드 오브 킹덤’은 여러모로 불안정했고, 그것은 정보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보 수집 대부분을 세비트에게 의지해, 당장 눈앞의 전장을 조사하는 데 급급했으니, 황제에 대한 것까지 조사할 여유는 없었다. 내가 황제에 대해 빼낼 수 있던 정보는 고작 20여 년 전, 즉위식 때 그려진 초상화뿐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 꼬마가 이런 미녀가 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제에게 따져야만 할, 그리고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당신, 세레나의 언니라고 했지?”
“비록 의자매이기는 하지만, 짐은 분명 라바일 경의 언니가 맞네.”
“그렇다면 당장 세레나에게 했던 말을 취소해.”
“어째서 말인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나지막이 되물어 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선포하듯 사납게 그 대답을 내놓았다.
“세레나한테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것은 어쩌면 바보짓일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는 어리석은 만행일 것이다.
그냥 가만히 침묵을 지키면 행복해질 수 있다. 설령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황제에게 따져 든다고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보장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황제에게 따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연적이기에 앞서 둘밖에 없는 가족이자, 누구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이며, 가장 동경하는 영웅인 세레나가 이대로 좌절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
뭐, 라고?
나는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루비빛 눈동자가 조금의 놀람이나 동요도 없이, 요염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그 얼굴이 분명하게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당신, 설마 그걸 알면서도 세레나를…?”
나는 차마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세레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강제로 그녀를 다른 사람과 약혼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나의 의혹을 부정하지 않았다.
“트레이브 경은 좋은 사내 같더군. 15년 동안이나 한 여인을 사랑하며 순정을 지킬 수 있는 남자는 그렇게 흔치 않아. 그만한 사내라면 충분히 라바일 경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에반이라는 인간이 대체 누구인지는 모른다. 정말 황제의 말처럼 좋은 사람일지도.
세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그 약혼자로서 훌륭한 상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레나가 좋아하는 것은 그 인간이 아니었다.
“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세레나와 그 인간을 맺어 주려고 하는 건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분노를 담아 외치는 내게 황제는 웃어 보였다. 더없이 오만하고도 고고하여, 인간미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미소를.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네.”
황제의 말은 뺨을 쓰다듬는 듯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열기는 너무나 뜨거워서 듣는 것만으로도 데일 것만 같았다.
“단지 짐이 그것을 원한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지.”
나는 잠시나마 말을 잊었다.
그렇다.
이 여자에게 이유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그저 순간의 흥미나 단순한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단지 이 여자가 원한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제라는 존재였으니까.
“당신이… 원하기 때문에, 단지 당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세레나에게 약혼을 강요했단 말이야?”
“그런 셈일세.”
“그건 억지야! 아무리 당신이 황제라도, 그런 짓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그저 한 명의 의지에 의해, 누군가의 행복이 꺾여야만 한다는 그 불합리에 피를 토하듯이 소리 높여 외치는 나를 황제는 왠지 가련하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불쌍한 어린아이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짐이 해서는 안 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뭐?”
그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넋을 잃은 내게 황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왔다.
“제국을 뒤흔들 수 있는 향락과 사치라도, 수십만의 백성을 학살하는 만행이라도, 충성스러운 신하를 내치는 우행이라도, 종교를 탄압하는 비행이라도, 도덕과 법도를 무시하는 자행이라도, 그중에 짐이 ‘해서는 안 되는 일’ 따위는 없고 ‘할 수 없는 일’ 또한 없다는 말이네.”
폭군이나 저지를 짓거리를 입에 담는 황제, 그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해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는 듯만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단지 잠시만의 변덕만으로도 그녀는 그 모든 일을 진짜 저지르리라는 것을.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수가…!”
“잊지 말게, 마왕이여. 짐은 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그래, 그것은 분명 황제이기에 허용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드 오브 킹덤’의 군주였던 내게 그것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황제이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제국을 지키고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잖아?!”
그런데도 그런 짓을 벌여도 되는 거냐고, 분노를 담아 반박하려던 나의 말을 황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끊었다.
“그런 것 따윈 없네.”
“…뭐?”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권리와 의무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닐세.”
할 말을 잃은 나를 앞두고, 황제는 왠지 그리운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반복하듯, 나지막이 설명을 이어 갔다.
“지배자는 피지배자가 지배를 받기 원하기에 성립될 수 있는 존재야. 그리고 지배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순간부터, 피지배자는 지배자에게 자신의 생사 여탈권을 비롯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선사하는 셈이지.”
나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말을 이어 가고 있는 황제. 그녀에게, 왠지 그 말을 끊게 만들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피지배자에게도 권리란 있어. 지배자를 질책하여 지배의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권리가 말이네. 바로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위해 일할 것을 강요받고, 그것을 의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뿐이지.”
그 말에 정리 따위는 없었다.
다만 철저한 논리와 이해득실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권리와 의무를 단조롭게 분석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반박을 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그 말에는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짐의 지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병사들을 죽이고 황궁에 불을 지르고 짐을 황좌에서 끌어내려도 되네. 그것은 그들의 권리니까. 마찬가지로 황제로서 군림하는 한, 짐에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있을지언정 해서는 안 될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그것이 바로 짐의 권리니까.”
말을 끝맺은 황제의 서늘한 미소를 본 순간, 한 줄기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스쳐 지나간다.
그 논리가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제국의 정점에 있는 지배자가 철저하게 그 논리를 믿고 있다는 사실임을.
그 여유롭고 요염한 미소에 숨겨진 압도적인 위압감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새삼 자각했다. 이 여인이야말로 바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아무리 아름답고 가녀리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은 단 한 마디 말로 수천수만 명의 삶과 죽음을 뒤바꿀 수 있는 지배자라는 것을.
우리들, ‘로드 오브 킹덤’은…, 이런 괴물과 싸워 왔단 건가?
나는 알 수 있었다. 설사 빙설관 레닌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노력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세계의 반 이상은 손에 넣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아니, 이런 괴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대륙을 반이나 빼앗을 수 있었던 것마저 기적. 혹은 그녀의 유희일 뿐이었으리라는 사실을.
하지만 황제의 힘과 권세를 느끼면서도 나는 도저히 그 논리를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나는 그런 식으로 ‘로드 오브 킹덤’을 다스리지 않았어! 고작 나 자신의 권리만을 위해 싸워 온 게 아니었다고!”
내가 피를 토하듯 내지른 외침을 듣고, 황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비웃는 듯한, 혹은 동정하는 듯한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마왕이여.”
등골이 오싹해지고 심장이 조여 온다. 웅크리고 있다가 이빨을 드러낸 잔혹한 사자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섬뜩하기 그지없는 예감이 알려 준다.
더 이상 황제의 말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그것을 느꼈을 때, 황제의 말은 이미 나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나라는 멸망했다는 것을?”
두근―!
심장이 터질 듯한 느낌을 받으며, 얼어붙은 나를 향해 황제는 느긋하게 말을 이어 왔다.
“그대가 조금만 타협했다면 ‘로드 오브 킹덤’은 아직도 존속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대는 너무나 고고한 이상을 품고 있었고, 그 이상이 어디까지나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기에 ‘로드 오브 킹덤’이 멸망하는 그날까지도 결코 그것을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았겠지.”
입이 벌려지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 선택은 정말 옳았던 걸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왕국을 세우고, 전 대륙을 상대로 피 흘리며 싸웠던 것이 정말 마족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이란, 결국 자기 자신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네.”
“……!”
그 순간, 나의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비록 멸망했을망정 일국의 군주로서, 그들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긍지가 무너지며, ‘로드 오브 킹덤’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크고도 깊은 절망에,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것은 뜨거운 분노. 오만한 눈으로 나를 보는 루비빛 눈동자가, 언어의 칼로 난도질된 상처의 고통이 나에게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분노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그 분노를 참아 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