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13)
112악당의 역동
챙―!
휘둘러진 칼날을 땅을 나뒹굴어 피해 낸 나는 체면 불구하고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왕궁 정원의 풍성한 수풀에 숨을 생각이었지만, 그런 내 계획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크헉! 아따따, 아따 거!
하필 가시가 우거진 수풀에 다이빙한 덕분에, 뺨부터 귀와 팔과 손 등등,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입고, 나는 찔끔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 내며, 정원 한가운데를 달려갔다.
살기등등하게 쫓아오는 암살자들을 상대로 땅을 뒹굴고, 나무에 올라가고, 조각상 뒤에 바퀴벌레처럼 찰싹 달라붙는 등 72가지 도주술을 있는 한껏 발휘해, 겨우 추적을 따돌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응?
루반 공국이 아무리 작은 나라라지만, 명색이 일국의 왕궁 한복판에서 복면 쓴 암살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 대다니.
게다가 일개 시종으로 변장한 나를 죽일 이유가 어디 있다고, 이렇게 필사적으로 쫓아오는 건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길 잠시, 나는 이내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지금은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해 봐야 소용없다. 일단 저 암살자들을 상대로 살아남는 것, 그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될 일이니까.
당장 급한 일은 이 정원을 벗어나는 것이다. 왕실 기사가 깔려 있는 것은 이미 확인해 둔바, 왕실 기사들의 눈이 개미 눈깔이 아닌 이상, 시종을 쫓고 있는 암살자를 두고 볼 리가 없다.
물론 암살자들을 처리한 뒤에는 왜 암살자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겠지만, 그야 암살자들을 기사들에게 떠넘기고, 잽싸게 달아나기만 하면 될 일이니까.
그런데… 대체 왕실 기사라는 놈들은 죄다 어디 간 거냐고오오오오―?!
암살자들을 상대로 목숨 건 숨바꼭질을 하며, 겨우겨우 정원 외각까지 벗어났다가 다시 암살자에게 쫓겨 정원 안으로 다시 도망치기를 몇 차례, 아무리 정원이 넓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지금쯤이면 왕실 기사 한두 명과 조우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런데도 왕실 기사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암살자들이 정원 외각에서 망을 서며 이목을 차단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이곳이 일국의 왕궁인지, 무슨 암살자 소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싸울 수밖에 없나?
은밀하게 잠입을 하기 위해, 무기는커녕 성물조차 가지고 오지 않은 지금.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딸랑 팔찌 하나뿐, 이 장비로 암살자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이 정원이라는 것이다.
이 겨울철에도 이토록 수풀이 우거지도록 잘 관리한 왕실 정원사를 내심 극찬하며 나는 나뭇가지를 꺾고 잎사귀를 모으고, 여기저기에서 덩굴을 뜯어내는 등, 여러 가지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암살자들을 피해 숨은 상태로 그런 작업을 하는 게 쉽진 않았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그 어떠한 상태에서도 함정을 짜낼 수 있어야 하는 법!
무엇보다 과거 ‘데스 쉐도우’의 교관으로서, 생존 훈련까지 담당해 봤던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아슬아슬하게 암살자들의 시선을 피해,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자아, 그럼 간다!
단단히 마음의 각오를 굳힌 후, 나는 이를 악물고 수풀 속에서 뛰쳐나갔다.
후다다다닥!!
촤아악!
내가 질주를 시작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온 두 암살자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에잇! 숙련된 악당의 다리를 얕보지 마라!!
온갖 영웅들을 상대로 단련된 다리를 전력, 아니 어쩌면 기력이나 성력이나 마력까지 짜내 암살자들과의 거리를 벌려 나가던 나는 일순간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어떤 지점을 뛰어넘은 약 1초 뒤, 뒤쪽에서 몇 가지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당탕탕탕!! 퍼억! 콰직! 철퍽!
두 암살자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넝쿨에 발목이 걸려서 앞으로 나자빠지고, 적당한 위치에 있던 짱돌에 이마가 충돌하고, 넝쿨이 끊어진 반동으로 부러진 나뭇가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뒤, 나뭇가지가 떨어진 충격으로 채찍처럼 휘둘러져 온 가시넝쿨에 휘감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심 명복을 빌었다.
멍청한 자식들, 그러니까 밤에는 함부로 뛰면 안 되는 거다.
이런 밤중에 전력으로 뛰어다녀도 괜찮은 건, 신의 축복을 받은 영웅 나리나 지형을 숙지한 숙련된 악당뿐이니까 말이야.
크하하하핫!
엉? 근데 어째 목덜미가 서늘…?
‘용의 무덤’을 이용한 함정이 완벽하게 들어 먹혔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하다가 등줄기가 갑자기 오싹해진 순간, 나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촤악―!
컥! 켁, 끄억!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몸을 눕힌 덕분에 손바닥과 팔꿈치가 홀라당 까지고, 등이 얼얼할 정도로 긁힌 데다가 뒤통수까지 약간 찢어진 듯, 축축하고도 뜨끈한 무언가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딴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내 목이 있던 높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한 줄기 섬광이 만약 조금이라도 넘어지는 것을 주저했다면, 어깨 위가 허전해졌으리라는 걸 알려 줬으니까.
젠장, 한 놈이 남아 있었구나!
그대로 땅을 굴러 몸을 일으킨 즉시,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자루 검을 겨눠 든 냉혹한 눈의 자객을 마주 보다가…, 냅다 도망쳤다.
으아아아! 걸음아, 날 살려라!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방금 놈이 사용한 검식은 ‘그림자 베기’다.
‘데스 쉐도우’가 망한 게 벌써 10년이거늘, 어떻게 비전 검술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진짜 ‘데스 쉐도우’의 암살자라면, 병기는커녕 함정마저 모조리 소진해 버린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타다다닷!
뒤에서 들려오는 달리기 소리를 촉매 삼아 가속에 가속을 더하길 한참. 그렇게 정원을 뛰쳐나온 직후, 나는 왕궁의 벽에 철퍼덕 달라붙었다.
그리고 벽에 장식돼 있는 조각상을 발판 삼아, 후다닥 벽을 기어 올라갔다. 이것이야말로 숙련된 악당의 72가지 도주술 중 하나인 거미 벽타기!
제 놈이 아무리 ‘데스 쉐도우’의 망령이라도, 벽을 타는 기술을 익히고 있지 않은 이상 절대 나를 쫓아올 수 없을 것이다.
크하하하핫!
촹―!
…아니, 그런데 갈고리는 좀 반칙 아닐까? 응?
왕궁의 성벽을 넘어올 때 사용했던 것인지, 밧줄이 매달린 갈고리를 휙 하니 던져 그것을 잡고 벽을 달려오는 암살자를 보고, 나는 기겁하며 옆에 있던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와장창!!
유리창을 산산이 깨뜨리며 바닥을 뒹군 대가로, 내 몸 곳곳에 유리 조각이 박혔다. 하지만 피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고통을 애써 눌러 참으며, 급히 도주로를 확인했다.
왼쪽 이상 무, 정면 암살자, 오른쪽 시체!
…잠깐, 잠깐만.
지금 뭔가 이상한 걸 보지 않았던가? 나는 좀 전에 봤던 것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왼쪽에 길게 뻗어 있는 복도, 정면에서 검을 휘둘러 오는 암살자, 오른쪽에 내팽개쳐져 있는 두 왕실….
케엑! 주, 죽을 뻔했다.
잔영을 일으키는 ‘전장의 환염’을 사용해 가까스로 암살자의 검을 피해 낸 후, 나는 암살자가 끌고 가던 두 시체의 검을 뽑아, 양손에 나눠 들고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면에는 방금 기사들을 습격한 듯한 암살자를, 후면에는 정원에서 날 따라온 암살자를 두고 나는 심각한 갈등에 잠겼다.
일단 검은 손에 넣었지만, 이렇게 앞뒤로 포위된 채 싸우는 건 불리하다.
그렇다면…!
상황을 파악하고, 지형을 확인하고, 정보를 분석하여 계획을 짜내는 데 걸린 시간은 총 0.6초.
나는 이를 악물고 왼쪽에 있던 암살자를 향해 두 자루의 검을 교차하듯 휘둘렀다.
채재재재쟁!
교묘한 각도와 시간 차로 뻗어 나가, 마치 노래를 부르듯, 끊임없이 금속음을 토하는 두 자루의 검으로, 왼쪽에 있던 암살자를 쉴 틈 없이 몰아쳐 간다. 그리고 곤두서 있던 감각을 통해,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이 전해진 순간, 두 자루의 검을 앞뒤로 힘차게 내던진다.
타닷!
설마 검을 던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갑작스러운 회피로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두 암살자의 손목을 잡아당긴다. 그리고 균형을 잃은 두 암살자의 발목을 제자리에서 빙글 회전해, 체중에 원심력을 더해 스치듯 후려갈긴다!
퍼억!
손목이 당겨지는 힘이 저항하던 상태에서 체중이 실린 발차기에 발목을 강타당한 덕분에 그대로 허공을 한 바퀴 빙글 회전하여 뒤통수부터 바닥에 머리를 찧은 뒤 몸을 부르르 떨다가 늘어진 두 암살자를 보며,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일단 한고비는 넘겼군.
내가 아무리 숙련된 악당이라도, ‘그림자 베기’를 배운 암살자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기습적인 연검술과 돌발적인 비검술, 거기에 체술의 연계로 빈틈을 만들지 못했다면 쓰러지는 것은 내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군.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 그림자 베기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소동은 ‘데스 쉐도우’의 암살 방식이 아니다. 아니, 단지 데스 쉐도우를 떠나 이들의 행동 자체에는 뭔가 괴리감이 있다.
머릿속의 정보를 바탕으로 차례차례 그 괴리감을 짚어 가던 도중, 나는 문득 옆에 시체에 눈을 향했다.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는지 바닥에 기다란 핏자국을 남긴 채, 널브러져 있는 두 왕실 기사의 시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중, 나는 모든 것이 환하게 밝혀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그런 거였나?
땅이 꺼져라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두 자루의 검을 집어 들어 하나를 오른손에 들고 하나를 허리에 찼다.
그리고 벽에 걸린 장식품을 살펴본 뒤, 그중에서 두 개의 둥근 방패를 빼내서, 하나는 왼손에 들고 다른 하나는 등에 짊어졌다.
그렇게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나는 익숙한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