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15)
114영웅의 역동
화르르륵.
얼마나 지독한 화염에 휩싸인 것일까? 뼈도 안 남기고 불살라진 시체를 보며, 망연히 넋을 잃고 있기를 잠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불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으니까.
마음을 굳힌 나는 황제 폐하를 포위한 채, 잿더미를 보던 암살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암살자들은 내게 검을 휘둘러왔다.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는 칼날을 향해, 나는 침착하게 한 팔을 들어 올렸다.
카앙―!
팔목에 차고 있던 단단한 팔찌에 칼날이 튕겨 나가며 생겨난 잠시의 틈, 그것을 이용해 빙글 회전해, 드레스 자락을 허공에 띄우며, 허벅지에 차고 있던 가죽 검대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아 좌우에 있던 암살자에게 휘두른다.
두 암살자는 급히 단검을 막아 내며 물러났지만, 애초부터 견제가 목적이었던 만큼 나는 그들을 몰아붙이지는 않고, 대신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제 앞에 있는 암살자는 한 명뿐, 이자만 제치면…!
휘웅!
“……?!”
…피했어?
마른 체격의 암살자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며, 허공을 가른 나는 내심 놀람을 느꼈다.
하지만 검사로서 단련된 나의 본능은 이미 또 하나의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파바바밧!
좌우 합쳐 10연격. 어지간한 일류 검사라도 쉽사리 막지 못할 맹공. 하지만 암살자는 하나하나 그것을 피해 내며 오히려 날카롭게 내게 반격을 가해 왔다.
그리고 그 섬광 같은 쾌검을 본 순간, 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타앙!
다급히 몸을 비틀며 쌍검을 교차하듯 휘둘러 암살자의 일검을 튕겨 낸 후, 나는 암살자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처음부터 목적으로 삼았던 장소, 즉 황제 폐하의 앞을 막아서며 복면을 쓴 암살자를 노려보았다.
좀 전의 일 검이 위협적이어서가 아니다. 그 일검이 어떻게 휘둘러졌느냐가 문제였다.
세상에 이토록 빠르고, 날카로우며, 은밀하기 그지없는 쾌검식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데스 쉐도우’의 잔당인가?”
“…….”
10년 전 내 손으로 궤멸한 대륙 제일의 암살 조직, ‘데스 쉐도우’의 비전 검술 ‘그림자 베기’를 사용한 마른 체격의 암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복면 사이에서 드러난 서늘한 눈동자는, 내 추측이 맞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설마 데스 쉐도우의 잔당이 남아 있었다니….
독이나 함정을 쓰는 보통 암살자들과 달리 ‘그림자 베기’로 단련된 ‘데스 쉐도우’의 암살자들의 실력은 어지간한 검사 이상이었다.
하물며 여기 있는 십여 명은 모두 왕궁에 숨어들 정도의 일류.
웬만한 일류 검사라도 상대하기 힘든 적이었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검도 없는 상태에서 폐하를 보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폐하를 뒤에 두고 물러날 수는 없는 일. 입술을 꽉 깨물고, 결의를 다진 나는 암살자들에게 달려들었다.
타당! 타다닥―!
암살자들이 번갈아 뻗어 내는 쾌검을 상대로 쉴 새 없이 두 자루의 단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단검으로 암살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왕궁에 진검을 숨겨 올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에반 경은 보호대로 쓸 팔찌와 바위나무로 된 두 자루의 단검을 빌려주었다.
흉기처럼 단단하다는 바위나무로 만든 만큼, 두 단검의 강도는 상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검의 기준, 철검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홍염의 불꽃’을 제대로 펼치기 힘들었다.
그나마 무위지경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급조해 낸 쌍검술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이 상태로는 암살자들을 쓰러뜨리기는커녕, 세 명을 상대로 버티는 것이 한계였다.
특히 처음에 겨룬 마른 체격의 암살자의 경우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쾌검을 사용하며, 나를 적절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안심이 되는 사실은 이곳에 있는 게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압!”
카가강!
짧은 기합과 함께 뛰어든 에반 경과 불꽃을 쏘아 낸 아리스의 도움에 힘입어 나는 하나둘씩 암살자들을 쓰러뜨려 갔다.
그렇게 다른 암살자들이 모두 쓰러진 뒤, 마지막으로 홀로 남은 마른 체격의 암살자는 서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난간을 향해 달려갔다.
자결할 생각인가!?
배후를 묻기 위해 리더로 짐작되는 마른 체격의 암살자만큼은 생포할 생각이었기에 나는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난간을 넘어, 밑으로 떨어진 암살자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퍼억!
암살자가 난간에서 뛰어내린 잠시 후, 저 밑에서부터 흘러나온 듣기 싫은 소리에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죽은 이는 말이 없는 법.
나는 이유 모를 불길함과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폐하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자네들과 저 소녀 덕분에, 아직 특별히 다친 곳은 없네.”
역시, 아까 그 불꽃은 아리스의 마법이었을까? 나는 폐하의 시선을 따라 옆을 돌아봤다.
그리고 평소보다 유독 차가운 얼굴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아리스를 보며, 약간의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소녀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해 왔던 만큼 폐하를 도와준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리스를 달래 줄 여유가 없었다.
“폐하. 안전한 곳으로 모시도록 하겠사옵니다.”
에반 경의 말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가 대체 몇 명이나 더 있을지 모를 일, 일단 폐하를 피신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에반 경의 말을 듣고도 폐하는 난간에서 몸을 일으키시지 않았다. 다만 기묘한 눈빛으로 에반 경을 바라보고 계실 뿐이었다.
“어설프군.”
“……?”
왕실 경비가 부족하다는 뜻일까?
나는 폐하의 말씀에 의아해했고, 아리스도 이해가 안 가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당사자인 에반 경 또한 당황하여, 서둘러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폐하. 왕실의 경비가 미숙했던 점에 대해서라면….”
“경비 따위가 아니라, 그대의 연극이 너무 어설프다는 뜻이네.”
연극…?
뜻밖의 말에 얼굴을 굳히는 에반 경을 향해, 폐하는 한 줄기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너무나 요염하고도, 더없이 아름다워, 오히려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를….
“이왕 암살자까지 끌어들였으면 좀 더 제대로 된 연극을 보여 줘야 할 것 아닌가? 트레이브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