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19)
118악당의 밀담
“그래, 짐에게 대답할 준비는 되었는가?”
채 암살자들의 피조차 식지 않은 발코니에서 녀석과 계집애를 물러나게 한 후, 나는 난간에 앉아 있는 황제를 마주 보았다.
그 강인하고도 고고한 루비빛 눈동자에, 거짓을 말하는 기색 따위는 없다.
비록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황제의 성격상, 차라리 말을 하지 않으면 않았지, 결코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여기서 고개만 끄덕이면 제국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더 이상 골골거리는 몸을 이끌고, 멀건 수프로 대충 끼니를 때우면서, 노심초사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에, 내 대답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오나,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설마 거절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일까? 황제는 입가에 맺혀 있던 요염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다만 압도적인 권위만이 담긴 싸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심장을 뭉개 버릴 듯한 기세를 받고도, 나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제국조차 그대에게는 한낱 새장에 불과하다는 뜻인가?”
“날고자 하는 새에게는 이 대지조차 구속이며, 걷고자 하는 물고기에게는 바다조차 감옥이고, 밤을 살아가는 박쥐에게는 햇빛조차 장벽일 따름입니다.”
그래, 그렇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 권력, 명예, 영토, 직위…. 그중 단 한 가지만 하더라도, 다른 이에게는 평생의 목표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신에게 저주받은 악의 성지’에 적을 두었던 내게, 그런 것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설령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아니라, 대륙의 정점인 황제의 권좌라고 해도, 내게는 그저 장해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짐이 강제로 그대를 잡아 두겠다면 어쩌겠는가?”
이미 예상했던 질문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대답할 말을 생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숨을 고르고, 결의를 굳히기 위해서였다.
하여 각오를 다진 후. 천천히 눈을 뜬 나는 황제를 직시했다.
“폐하. 신에게 폐하의 악의를 받아 가게 하지 마시옵소서.”
그 순간, 무거운 정적이 허공에 내리깔렸다.
황제는 두 눈을 치켜뜬 채, 무섭도록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 또한 그런 황제를 꼿꼿하게 마주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눈싸움이 아니었다. 심신이 약한 이라면 보기만 해도 졸도할 정도로 엄청난 기세가 몰아치는 전투였으며, 피가 마르고 신경이 끊어질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전쟁이었다.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만 싶은 그 전장에서, 먼저 눈을 감은 것은 결국 황제였다.
“그래, 짐의 악의는 오직 제국을 위해서만 쓰여야지.”
좌절하듯, 한탄하듯, 그렇게 나지막이 말을 내뱉고, 황제는 나를 향해 가볍게 손짓을 해 보였다.
“가게. 옛정을 보아서라도 지금 한 번만은 그대를 놓아주겠네.”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패배 선언과도 같은 황제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특별히 기뻐하거나 안도하지 않았다.
이것은 황제의 양보를 통해 얻어 낸 성과일 뿐, 실질적으로는 무승부라고조차 하기 힘든 처참한 승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억해 두게. 제국의 눈은 항상 그대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네.”
“명심하겠습니다.”
경고성이 짙은 황제의 말에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경고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단서를 손에 넣은 이상, 제국이 아닌 그 누구라 할지라도, 내 목적을 방해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 깊은 만족감 속에 나는 그렇게 황제를 등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