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0)
119마왕의 밀담
“당신, 대체 무슨 속셈이지?”
마취에서 풀려나자마자, 나는 황제가 있는 발코니로 달려왔다. 그리고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난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처음부터 지켜봤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암살자들쯤 황제는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심지어 에반이 사용한 ‘밤의 숨결’에도 중독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황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손가락 까딱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때로는 흥미로운 눈으로, 때로는 불쾌한 눈으로, 마치 연극이라도 지켜보듯이 말이다.
“특별히 속셈이라고 할 것은 없네.”
“그걸 믿으라고?”
내 쌀쌀맞은 태도에 황제는 피식 웃으며 달을 돌아보았다. 고요한 눈으로 달을 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게만 보여, 단단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로서도,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라를 세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뭔지 아는가?”
“…글쎄글쎄.”
그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직접 ‘로드 오브 킹덤’을 세워 본 적도 있지만,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라, 딱히 명확한 해답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러한 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히 해답을 말해 주었다.
“‘진리의 탑’을 찾아가는 것이네.”
과연.
그 대답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나라도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한다면, 현명한 조언자는 필수라 할 수 있다.
물론 ‘진리의 탑’을 벗어나지 않는 현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제국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조언을 듣는 것 정도는 가능했으니까.
비록 간단한 조언 하나라 해도, 진리를 깨우쳤다는 현자의 말 한마디에는, 일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물론, 마족의 왕국으로 낙인찍힌 ‘로드 오브 킹덤’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떤 예외도 없이, 현자들에게 가장 먼저 듣는 조언은 바로 언어와 문자를 만들라는 것이지.”
“뭐?”
나는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언어와 문자의 중요성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온갖 국사를 제쳐 두고,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의문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황제는 담담히 설명을 이어 갔다.
“원래 언문은 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언어와 문자를 만들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이나마 그 안에 깃든 힘을 끌어서 사용할 수 있네.”
“…그 힘이, 바로 주술이라는 거야?”
“그러네. 신의 힘을 빌리는 권능이나, 악마의 힘을 쓰는 마법처럼, 용의 힘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주술인 것이지.”
거기까지 얘기한 황제는 숨을 돌리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한밤중임에도 선명하게 빛나는 루비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술의 힘은 권능이나 마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하네. 심지어 그 주술의 힘으로 일국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글쎄. 아무리 그래도 몇몇 개인의 힘으로 일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까?”
나는 황제의 말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주술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설사 주술사의 능력이 검자나 마술사와 같은 초인과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라 해도 한 개인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의심을 황제는 간단하게 정리해 버렸다.
“결정할 수 있네. 왜냐하면 주술은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모든 이들로부터 비롯되는 힘이니까.”
“…뭐라고?”
“간단한 이치네. 국민들이 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만큼, 그 안에 담긴 주력은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모여서 특수하게 만들어진 문자, 즉 ‘주술 문장’ 안에 응축된다는 말이지.”
나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힘을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두 명도 아닌 수백만, 수천만도 넘는 사람들에게서 끌어모은 힘을 하나에 모은다면…?
“물론 각국의 왕은 그 힘을 대체로 나라 전체를 위해 쓰기에 주술의 힘은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지. 천 명에게 모은 것을 다시 천 명에게 나눠 주면 똑같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렇게 나눠 주고 남은 아주 작은 파편만 가지고도, 세상에서 36대 기보나 28대 명검이라 불리는 보물들은 쉽게 만들어지네.”
허리에 차고 있던 ‘화룡의 채찍’을 가볍게 쓰다듬는 황제는 보며. 나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설명대로라면, 지금까지 온갖 전장을 돌아다니면서도 내가 주술사를 만나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주술에 정말 나라를 좌우할 힘이 있다면, 그것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터. 결국 주술이라는 것은 국왕 본인이나 후계자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약간 빗나간 것이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제국은 물론 대륙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이미 주술이 절전된 지 오래네.”
“…뭐?”
방금 전까지 그토록 장황하게 설명해 놓고, 직접 그 주술까지 사용한 주제에 주술의 맥이 끊겼다는 모순된 말을 하는 황제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농담한 것이 아니었다.
“주술을 잃었기에 제국의 황실은 그 힘을 잃고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고작 천박한 하인들의 모략에 놀아나야만 했고, 결국 내란으로 거의 모든 황위 계승자가 몰살되는 참사마저 벌어지고야 말았지.”
20여 년 전에 있었던, 제국의 내란에 대해서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제국만이 아니라 온 대륙을 전쟁으로 들끓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주술을 잃어버림으로써, 황실의 힘이 약해져 벌어진 사건이었다고?
“어쩌다가 주술의 맥이 끊겼던 거지?”
“빼앗겼기 때문이네.”
“…빼앗겨?”
황제의 대답은 내게서 어이를 빼앗았다. 오래도록 제국과 전쟁을 치러 왔던 만큼 누구보다도 제국의 힘을 잘 아는 내게 있어 그것은 그야말로 악마가 신을 찬양하는 소리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물론이고, 과거에도 제국을 상대로 주술을 빼앗을 수 있는 세력 따위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가정에는 하나의 예외가 존재한다는 것을, 과거 13사도라는 막대한 힘을 휘두르며 제국만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를 정복했던 하나의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마…?”
“맞네. 그들은 제국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술을 빼앗아 갔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주술만을 골라 한 권의 책 안에 담아냈네.”
순간 나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황제의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니고, 주술의 힘이라는 게 정말 작은 파편만으로도 기보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주술을 모아, 하나로 응축시킨 보물의 힘이 얼마나 막대할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으니까.
“그것이 바로 사상 최강의 악의 조직, 암흑성 최후의 유산인 《악의 서》의 정체지.”
“……!”
기보 서열 1위의 보물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기보, ‘악의 서’.
너무 허황된 소문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그 무엇 하나 믿음이 가지 않던 그 보물의 정체가, 설마 그런 것이었다니…!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내게 황제는 더없이 엄중한 표정으로 경고를 해왔다.
“짐이 그대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경고를 하기 위함이네. 《악의 서》는 단순한 기보가 아닌, 경우에 따라서 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저주받은 물건. 그것은 결코 상관해서도, 욕심내서도,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금기라는 것을 명심하게.”
기껏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고,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황제의 행태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아름답고도 섬뜩하게 빛나는 루비빛 눈동자는, 만약 이 경고를 무시할 경우,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런 기물에 욕심을 낼 일은 없을 테니까.”
“부디 그대의 말을 지킬 수 있기를 기원하겠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내가 몸을 돌렸을 때, 한 줄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게. 설령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아무리 가슴이 크고, 요리를 잘하더라도, 청혼에 실패할 수도 있는 것처럼 뜻밖의 경우는 언제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
또다시 조금 엉뚱한 내용의, 그런데도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에, 왠지 농담으로만은 들리지 않는 이야기에 내심 의아해하며 나는 그렇게 황제가 있는 발코니를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 나의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황제가 굳이 이런 상세한 설명까지 하면서 《악의 서》에 대한 경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국에서도 이미 절전됐다고 말했던 주술을 황제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대체 어디에서 주술을 배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