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1)
120영웅의 밀담
“원래 짐은 황제가 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네.”
폐하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발코니로 찾아온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폐하의 즉위에 관련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렇게 갑자기 말씀하시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으니까.
“황위 계승 서열 24위에 불과했던 데다가, 권력 암투에서 밀려나 허름한 별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짐의 곁에는 제대로 된 시종이나 시녀 따위는 한 명도 없었지. 그저 단지 한 명의 집사만이 있었을 뿐.”
그것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은 내란의 시대, 황위 계승권자들의 투쟁과 암투로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시기인 만큼. 황족이라도 어지간한 가주보다도 푸대접받거나, 하루아침에 암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때니까.
“하지만 짐은 결코 다른 황족들이 부러운 적은 없었네. 단 한 명의 집사라고는 해도 그는 요리나 빨래와 같은 것은 물론이고, 짐에게 황궁 예절이나 제왕학까지 완벽하게 가르쳐 줬을 정도로 유능한 이였으니까.”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시는 것일까? 약간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밤하늘을 보는 황제 폐하의 낯선 모습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폐하께서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려고 하기보다는, 단지 이야기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과거를 되새기고 싶으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십 수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에도 단신으로 짐을 보호해 내고, 황실에서 이미 맥이 끊겨 버린 비밀스러운 지식까지 가르쳐 주었지. 짐이 무사히 살아남아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집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황제의 말에 나는 내심 생각에 잠겼다. 일개 집사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황제 폐하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집사로 가장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황위 계승 서열 24위에 지나지 않더라도, 누군가 도박 삼아 폐하를 보호하기 위해, 호위를 한 명 잠입시켰던 거라면….
“하지만 짐이 황위에 오르는 날, 그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네.”
“…사라져 버렸단 말입니까?”
“그렇네.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물건 몇 가지만 가지고 도망쳐 버렸지. 즉위식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그의 빈자리를 봐야만 했던 짐이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야.”
나는 왠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고, 왠지 낯설게만은 들리지 않는 폐하의 과거가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 이후 짐은 계속해서 그를 찾아다녔지만, 약간의 흔적만 발견할 수 있었을 뿐 그 과거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지.”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그저 담담히 말씀을 이어 가시던 폐하는 이내 한 줄기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짐은 생각을 바꿔서 이 세상에 그토록 다재다능한 인물이 과연 누가 있을지 찾아보기로 했네. 뛰어나다고 할 만한 인재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만큼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것은 분명히 맞는 이야기였다. 10년 동안이나 대륙을 떠돌아다닌 나로서도, 단신으로 암살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무력과 폐하에게 황궁 예절이나 제왕학까지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인물은 오직 한 명밖에는 보지 못했으니까.
“짐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네. 줄이고 줄이다 보니, 이 드넓은 대륙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도 남은 것은 오직 단 한 명의 인물뿐이더군.”
두근.
심장이 요동치며,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눌러 온다.
때로는 너무나 알고 싶었던 사실을 지금만큼은 알고 싶지가 않았다. 만약 이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감히 폐하의 말을 막을 수 없었고, 폐하 또한 내게 그런 기회 따위는 주시지 않았다.
“과거 13사도를 이끌고 세계를 정복했던 암흑성의 성주이자, 아흔 가지 비전을 터득하여 그 누구도 당해 낼 수 없었다던 지상 최고의 악당. 당대 제일의 현자이던 ‘잔혹한 길의 노현자’로부터 온갖 지식을 빼앗은 뒤 살해하고,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추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주술을 모아 《악의 서》를 만들어 낸 대가로 신의 저주를 받아 파멸에 이른 자.”
“……!!”
두근.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나의 부정이 무색하게도, 폐하는 냉담히 말을 끝맺으셨다.
“과거 이 세상의 정점에 군림했다는 절대 악의 군주, 암흑성의 총사… 말이네.”
쿠광!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벼락이 치며,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그 새하얀 시야 속에서 폐하의 말씀만큼은 오히려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를 따라가게. 그리고 만약 그가 정말 암흑성의 총사와 관련 있다면, 그리고 그가 제국에 해악이 될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 목소리는 너무나 위압적이고도, 너무나 냉혹해서, 내가 아는 폐하의 음성 같지가 않았다. 아니, 폐하의 음성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만약 이것이 진정 폐하의 음성이라면, 나는… 결코 그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대의 검으로, 그를 죽이게.”
“……!”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이러할까? 대지가 뒤집히는 모습이 이러할까?
그저 바위처럼 굳어진 채, 그 무엇 하나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폐하는 못 박듯이 단호하게 말씀을 덧붙이셨다.
“반론은 듣지 않겠네. 이것은 황명이야.”
폐하의 말씀은 곧 절대적이다.
이것을 거역하게 된다면 나는 물론 가문마저도 눈 깜짝할 사이에 멸문하게 될 것이고, 아리스와 그분마저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것을 알기에 나는 반론을 할 수 없었다. 이 명을 제발 거두어 달라고, 다시 생각해 달라고 부탁드릴 수 없었다.
그저 처절한 심정으로, 울부짖듯 여쭙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폐하…! 왜입니까? 왜 하필 제게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겁니까!”
“그야 그대가 가장 이 임무에 적합한 인재이니까.”
나의 찢어지는 듯한 절규에, 폐하는 아름답고도 요염한 미소와 함께 나지막하게 말씀을 끝맺으셨다.
“그렇지 않은가? 과거 ‘프리 나이츠’의 수장으로서 13사도 중 일좌를 맡고 있던 ‘검의 사도’, 세나드 R. 라바일의 후예여.”
** *
“키렐. 키렐. 나 말이야, 굉장히 좋은 생각이 하나 났거든?”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이십니까, 아가씨?”
“내가 키렐하고 결혼할 수 있는 방법!”
“…죄송하지만 황실의 법도상 안 됩니다.”
“그래, 그러니까 그 법도를 팍! 날려 버리면 되는 거야! 어때, 좋은 생각이지?”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습니다만….”
“에이― 아무렴 어때. 내가 키렐하고 결혼만 할 수 있으면 되지.”
“그 전에 납작한 가슴부터 좀 키워서 오시지요.”
“키렐 당신 지금 아무렇지 않게 소녀 가슴에 못 박는 소리 하지 않았어?!”
“자자, 농담은 그만하시고 이만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씨― 두고 봐, 내가 꼭 가슴 빵빵하게 키워 가지고, 방금 전에 한 소리를 후회하게 해 줄 테니까!”
“알겠으니 식사부터 하시죠.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하고, 잘 공부하지 않으면 가슴 안 큽니다.”
“거기 공부는 또 왜 들어가는데?”
“제국의 법도를 바꾸시겠다는 분이 공부를 싫어하셔야 되겠습니까.”
“…하면 될 거 아냐. 하면!”
“장하십니다. 아가씨.”
“에잇! 지금 내가 절대 법도를 바꾸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도 엄연한 황위 계승권자니까, 황제만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흐음. 해가 서쪽에서 뜨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키렐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