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5)
124영웅의 악몽
콰앙!
멀쩡하던 문짝이 반쯤 부서져 휭하니 날아드는 것을 보고, 장내의 이들이 입을 뻐끔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 문짝을 날려 버린 장본인이 나였으니까.
…이런. 힘 조절을 조금 잘못했나?
떡갈나무 문짝이 엉망이 되어 나뒹구는 모습은 사실 ‘조금’ 잘못한 수준을 넘어서 있었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는 대신 냉정하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여관에 신관이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초조함 때문일까. 마음을 애써 냉정하게 가라앉혔는데도, 내 목소리는 거칠고 날카롭기만 했다.
그러나 분명 내 질문을 들었는데도 스푼, 또는 빵 조각을 들고 굳어진 채 부서진 문짝만을 보는 그들의 모습이 머리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나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카운터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여관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카운터에 있던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 이게 무슨 짓…!”
콰직!
뒤늦서야 정신을 차린 듯, 버럭 고함을 지르던 여관 주인은 그 직후 꽈악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새파란 얼굴로 내 손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손과 카운터 사이에서 종잇장처럼 뭉개진 술잔을 바라보았다.
“이 여관에 신관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어, 어, 없는데요.”
“그럼 주변에는? 다른 여관에는 없습니까?”
“그건 잘….”
으득!
대답을 들은 즉시 카운터에 수리비를 던져 놓고, 나는 이를 악물며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길거리를 달려 다른 여관을 찾아 이동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뢰배 같은, 평소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하지만 의식을 차리지 못한 그분의 상세가 내게 냉정한 이성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분을 물에 구해 낸 직후, 츄리오넬에서 유명한 약술사를 찾아갔지만 그 약술사도 그분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물에 빠지신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런 약술사에게 아리스는 싸늘한 얼굴로 돌팔이라는 모욕을 서슴지 않으며, 다른 약술사를 찾아가 보자고 했지만 나는 쉽사리 소녀의 의견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 약술사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었을뿐더러 그분이 쓰러지신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 짐작 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는 모르는 나와 그분만의 비밀이었지만, 그분은 피가 썩는 병을 앓고 계신 상태였다. 고된 여행으로 그 병이 발작을 일으켰다면?
1년밖에 안 남은 수명이 더 줄어들었다면? 이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게 되신다면…?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짝 메말라 있던 입술이 찢어져 주르륵 흘러나온 비릿한 피로 목을 적시며 나는 흔들리던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괜찮다. 아직은 괜찮을 것이다.
뛰어난 약술사이자 전투 사제이신 그분이 스스로의 병세조차 모르실 리가 없다. 그분에 대한 믿음에 의지해 침착함을 되찾고, 나는 계속해서 다른 여관을 돌아다녔다.
츄리오넬에서 가장 유명한 약술사조차 그분의 병세를 짚어 내지 못한 이상, 이제 기댈 수 있는 것은 신관의 성력뿐이었다.
하지만 츄리오넬에는 원래 신전이 없었고, 가장 가까운 신전마저도 며칠 거리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그분을 아리스에게 맡겨 놓은 채 여관을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츄리오넬은 큰 도시였고 축제 중인만큼 다양한 방문객이 있었다.
운이 좋다면 여행자 중에 한두 명 정도는 신관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벌써 일곱 군데의 여관을 뒤졌음에도 신관은커녕 신관을 봤다는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렇게 여덟 번째 여관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가까스로 한 줄기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있습니다. 있어요!”
“……!”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대가를 치르라며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던 중년인, 그 앞에 놓여 있던 테이블을 일격에 16조각으로 분쇄해 버린 후,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중년인이 덜덜 떨면서 토해 낸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화,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관인 듯한 두 일행이 머물고 있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둘 모두 밖에 나가서 지금은….”
“모른다는 겁니까?”
“그, 그게 아니라… 아, 나, 남쪽에 있는 은화 거리로 구경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 틀림없습니다!”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당장 16조각이 돼 버릴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두 배쯤 과장된 공포심으로 바지를 적신 채 필사적으로 외치는 중년인을 다그쳐 두 신관의 외모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하나의 쪽지를 전해 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는 여관을 뛰쳐나와 남쪽으로 달려 나왔다.
이 넓은 도시에서 신관 두 명을 찾겠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관에서 넋 놓고 신관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여유가, 지금의 내게는 없었다.
그렇게 도시를 뛰어다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거리를 헤매던 나의 귀에 한 줄기 시끌벅적한 소란이 들려온 것은 은화 거리를 비롯해 남쪽에 있는 주화 거리의 대부분을 훑어봤을 때쯤의 일이었다.
“우와아아아!”
뭐지…?
뭔가 요란한 고함과 함께 동화 거리를 달려오는 인영을 힐끔 돌아본 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당장 신관을 찾는 것이 급한 내게,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일에는, 그런 나조차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턱―! 쿠당타다다당!! 퍼억!
“…….”
달리던 인영의 발이 돌부리에 걸린 순간 그 속도 그대로 튕겨지듯 허공을 부웅 날아, 거리에 쌓여 있던 상자에 틀어박히는 것을 보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을까?
깨어진 상자의 틈으로 얼핏 보이는 물건은, 다름 아니라 공사용 벽돌.
그런데 거기에 전력으로 몸을 부딪친 데다, 무너진 상자에 깔리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중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목숨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내 머릿속에 문뜩 한 줄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신관이 이 근처에 있다면, 이 광경을 보고 도와주러 오지 않을까?
그것은 더없이 교활하고 비겁한 생각이었지만 이미 초조함으로 한계까지 도달해 있던 내게는 이것저것을 가릴 틈이 없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일단 부상자를 꺼내기 위해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다가가 엉망으로 무너진 상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자 사이에서 끙끙대며 몸을 일으킨 인물을 본 순간, 나는 그 모든 속셈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야야야….”
“…….”
이런….
아마도 남부 출신의 여행객인 것일까. 남부인 특유의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와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 흑갈색 단발머리. 거기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두색 눈동자에 반듯한 오관과 갸름한 얼굴선이 잘 어우러져 귀엽고 활기차게만 보이는 소년을 나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조금 큰 소년처럼, 어떻게 보면 어린 청년처럼 보이는 묘하게 중성적인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추운 겨울날에도 다리가 환히 드러나는 반바지 차림에, 방금 그토록 큰 사고에 휘말렸음에도 어딘가 부러지거나 피투성이가 되기는커녕 작은 찰과상 하나 없는 그 멀쩡한 모습이, 나를 어처구니없게 만들고 있었다.
“아우, 머리에 혹 났네.”
…겨우 혹 하나 말인가요?
설령 나라도 부상을 입었을 충격을 받고도 고작 작은 혹이 나 있을 뿐인 소년의 모습을 할 말을 잃고 바라보길 잠시, 나는 문뜩 눈을 크게 떴다.
여관 주인으로부터 들은 두 신관.
그중 한 명의 인상착의가, 이 소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만은 아니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소년, 그 팔목에서 얼핏 드러난 초승달 모양의 검은 팔찌가 내 이목을 끌었다.
저 팔찌는…?
“아,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그제야 나의 존재를 깨달은 것일까. 초식동물을 연상시키는 순진한 미소와 함께 허리를 꾸벅 숙인 소년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마주 허리를 숙였다.
내 추측이 틀렸다면 문제가 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저 팔찌가 그 물건이라면….
“모든 고통을 잠재우는 밤의 가호를. 저는 세레나라고 합니다.”
“어둠이 빚어내는 평안에 감사를. 저는 크리스라고 해요.”
자동 반사적으로 초승달 모양의 성호를 그리며 인사말을 받은 소년을 보며, 나는 확신을 굳혔다.
북부라면 몰라도 서부인 이곳에서 이 인사말을 아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더구나 초승달 모양의 성표까지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를 크리스라고 밝힌 이 소년의 신분은,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암흑 교단의 사제이십니까?”
“헤에. 저는 아직 수련 사제밖에…”
정식 사제가 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던 소년의 손이 일순 우뚝 멈춰졌다. 그리고 차츰차츰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점차 새파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아, 저어. 그러니까 저는… 예! 천재는 못 되더라도 수재는 되려고 수련하는 사부님의 제자, 그러니까 줄여서 수련 사제라고요!”
“…….”
“바, 방금 그 인사요? 그, 그러니까… 저의 고향에서 꼬치를 팔고 있는 아저씨의 아는 사람의 친구라는 분에게 들은 인사말이에요! 아하하하!”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식은땀,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 슬금슬금 옆을 향하는 시선, 더듬거리는 말까지. 나도 거짓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너무 뻔히 들여다보이다 못해서 차라리 속아 주고만 싶은 변명을 늘어놓는 소년을 보니, 차마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흐윽,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화형은 싫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거짓말이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아예 내 발치에 매달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해 오는 소년을, 나는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암흑 교단은 악신을 모시는 사교로, 암흑 교단의 사제를 화형 시키는 나라도 있다. 그렇기에 암흑 교단의 사제라는 신분이 밝혀진 소년이 이렇게 애걸복걸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 원하시면 개종이라도 할게요. 네? 그러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우와앙!”
“…하아.”
아무리 사교의 수련 사제라도 명색이 신을 모신다는 사제가 개종하겠다며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소년은 엄연한 사제였고, 아무리 미약한 성력이라도 지금의 내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다.
바로 그때, 한 줄기 외침이 울려 퍼졌다.
“저기 있다요!”
“잡으라요!”
츄리온 상인?
저들이 무슨 일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골목 저편에서 우르르 나타난 무리를 보고,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물론 이곳은 츄리오넬, 츄리온 상인들이 널리고 널린 도시다.
하지만 장사도 아닌 일로 츄리온 상인들이 저렇게 몰려다니는 것은 아무리 츄리오넬이라도 드문 일이었다. 내가 그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흐이익!”
츄리온 상인들이 나타나는 것을 본 순간, 기겁하며 도망치는 크리스 사제의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크리스 사제가 츄리온 상인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지금 크리스 사제를 도와주게 된다면 이 츄리오넬에서 활동하는 데, 여러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교라고는 하지만 그분이 전투 사제로서 계신 암흑 교단의 사제가 쫓기고 있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는 츄리오넬만이 아니라 모든 츄리온 상인들을 적으로 돌린다 할지라도, 단 한 명의 사제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렇게 결심을 굳힌 채, 나는 크리스 사제를 쫓아 거리를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