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6)
125악당의 악몽
“망할….”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그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기대앉은 채 나는 천천히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머릿속으로 회상해 보았다.
약 칠 일 전, 왕궁에서 온갖 사건을 겪은 뒤, 나는 녀석과 계집애를 일단 집으로 보내, 짐을 챙길 것을 지시하고 마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검자를 치료한 대가로 챙겨 둔 사례금으로 세 마리의 말을 사서 최소한의 짐만을 챙긴 채, 녀석과 계집애만을 데리고 루바젤을 떠나왔다.
이미 루바젤에서 온갖 일을 겪으며 상황의 심각함을 대략이나마 알던 만큼 계집애와 녀석은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고, 그 이후 무리하면서까지 강행군을 지속한 끝에 단 칠 주야 만에 루반 공국의 국경을 벗어나, 1차 목적지인 츄리오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츄리오넬을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다. 삼국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어느 나라의 간섭도 받지 않는 이곳에서라면 제국도 직접적으로 힘을 쓰기 힘들다.
더구나 서부 교역망의 핵심인 만큼 사방으로 강줄기와 도로가 뻗어 나가 있기에 어느 방향으로든 도주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약간의 돈만 사용하면 어떤 정보라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면 됐던 전과는 달리, 빨리 찾아내야 할 것이 있는 지금, 내게 정보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칠 주야 만에 츄리오넬에 도착함으로써 안전과 도피와 정보 획득까지,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듯싶었다.
이 낡은 몸뚱어리가, 칠 주야의 강행군을 제대로 버텨 내기만 했으면 말이다.
끄응.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10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은퇴하기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은퇴 후 체력 관리에 소홀해진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연이은 부상의 영향이 뒤늦게 터져 나온 탓이 더 컸다. 아무리 내가 숙련된 악당이라 한들 몸뚱어리까지 철로 돼 있는 건 아니다.
아니, 설령 몸이 철로 돼 있다고 해도 성물의 힘을 빌린 쥐꼬리만 한 성력으로 급한 부상만 치유하고 무리를 거듭해 온 탓에 내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찡그러진 쇳조각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츄리오넬에 도착하기 전에 뻗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수로에서 이동하던 중, 한계에 도달한 것은 최악이었다. 내 마지막 기억은 푸른 수면뿐, 아마 십중팔구는 물에 빠졌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녀석이 날 건져 냈을 것이다.
“빌어먹을.”
그렇게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면서도 나는 무심히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무엇이 찾아올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이 어둠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은 없음을 알기에 나는 아예 편안한 마음으로 뼈와 살가죽으로 된 의자에 나른히 기댄 채, 이제부터 찾아올 방문자들을 기다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영원과 같이 짧고도 찰나와 같이 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나를 배신했나. 크렉 R. 스완.”
아아, 시작은 너부터인가.
피투성이의 기사.
‘프리 나이츠’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쌍검자의 후예를 보면서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일뿐더러, 이것은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어째서 우리를 함정에 끌어들인 건가. 크레이 R. 스트라이커.”
“왜 영웅에게 검을 전수해 주었나. 케인 S. 로나드.”
‘드래곤 헌터’ 최고의 보물 사냥꾼이었던 영감과 ‘데스 쉐도우’ 최고의 검객 중 한 명이던 1교관.
그들이 기사의 좌우로부터 스르륵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선두로 하여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중 누군가는 장인이었고, 누군가는 마법사였으며, 누군가는 약술사였다.
그 외에도 상인, 시종, 용병, 도적까지 가지각색의 복장과 외모를 지닌 그들은, 의자를 빙 둘러싼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무엇 때문에 성검자에게 조직을 팔았나. 카인 R. 실드런.”
“어찌하여 나의 원대한 계획을 방해한 것이냐. 크로드 R. 스톤.”
“연구 결과를 빼돌린 이유가 뭐냐, 케스터 S. 레빈!”
“내 돈을, 우리의 염원을 돌려 다오! 칼라일 R. 슬레이브!”
“황제를 키워서 우리를 몰락시킨 이유가 무엇이냐, 키렐 R. 서번트!”
“네놈, 네놈이 질병을 변이시켰기에 우리는 몰살당해야 했다! 케이브 론 사이반!”
“왜 우릴 광풍의 먹이로 던져 준 거냐! 어째서! 크레이지 루드 시크릿!”
“그 어떤 도적도 네놈처럼 비열하지는 않다! 키놀 R. 사일런트!”
병기로 세계를 지배하려 한 ‘언더 블랙스미스’, 흑마법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었던 ‘다크 스톰’.
무적의 군대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데몬 소울’, 세상의 황금을 독점하고자 암약한 ‘골든 서클’.
황실을 암중에서 조종하고 있던 ‘블랙 서번트’, 병과 약물로 생사를 지배하려던 ‘커스 블러드’.
거의 모든 용병들이 소속돼 있었던 ‘레드 스컬’, 세상의 어둠을 지배했던 조직 ‘나이트 워커’.
이제는 파멸하여 세월 속으로 사라진 그 수많은 조직의 잔해가 과거의 기억을 타고 되살아나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앉아 있는 의자를 중심으로 백 수천의 피와 시체의 산을 만들어내며 처절한 증오와 저주를 쏟아 내는 것을, 나는 담담히 지켜보았다.
굳이 태연해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내게 있어서는 그저 귀찮은 소음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꺼져라, 패배한 개들아.”
퍼엉!
내가 나지막이 입을 연 순간, 고함과 저주를 쏟아 내던 그들의 몸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와 살점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한 줄기 바람이 그 혈우를 집어삼키며, 사방을 핏빛 폭풍으로 뒤덮었다.
잠시 후, 모든 것이 사라진 그 핏빛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은 한 명의 검사뿐이었다.
한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핏빛 검을 들고, 한 손에는 반쯤 갈라진 커다란 방패를 든 채 넝마나 다름없는 망토 자락을 두르고 있던 핏빛 검사와 나의 시선이 교차했다.
“나는 네 생명의 은인이었다.”
“알고 있소. 광검자.”
40년 전 지상 최강의 인간으로 불리던 신화시대 이래 최고이자 최악의 검사.
심마지경을 깨우침으로써, 홀로 천 명의 적을 참살하는 업적을 이뤄 냈던 미친 폭풍의 광검자는, 나를 향해 그 핏빛 검을 겨눠 들었다.
“그런데도 나를 대륙의 공적으로 몰아넣은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
목에 와 닿은 싸늘한 검극을 타고, 붉디붉은 생명의 이슬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조금만 까딱해도 목이 날아갈 상황에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한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며, 피로를 담아 나지막이 입을 열었을 뿐이다.
“패배한 개는 꺼지라고 했소.”
파강!
마치 유리가 깨져 나가듯, 산산이 부서진 광검자의 육신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렇게 그 무엇도 남지 않은 어둠 속에서 이 악몽의 주인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륵.
칠흑 속에서도 선명한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짙고도 선명한 눈매 사이에 어둠마저도 삼킬 듯 깊고 음울한 묵빛 눈동자.
거기에 몸을 반쯤 휘감은 검은 옷자락 사이로 희다 못해 스스로 빛나는 듯한 하얀 살결과 늘씬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미녀.
마치 악마처럼 요사스럽고 음산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다만 묵묵히 지켜보았다.
[여전하구나…]“아아, 그렇지.”
그것은 음성이라기보다는 울림에 가까운 사악하고 음울하면서도 요사스러운 저주.
하지만 범인이라면 듣는 것만으로 미쳐 버릴 수도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 짙은 어둠 속에서 더 아름답게만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과거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숱한 조직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도 그랬듯, 나는 여전히 과거와 똑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미숙한 악당이었던 내가, 이제는 보다 숙련된 악당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스르륵.
그런 내게 서서히 다가와, 그녀는 시체처럼 희고 차가운 손을 뻗어왔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슴을 훑고, 목덜미를 스쳐, 목을 양팔로 끌어안으며 내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그야말로 코가 맞닿을 듯한 거리에서 먹잇감을 틀어쥐듯 나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입술을 대고 얼어붙을 듯 차가운 숨결과 함께, 음울한 목소리를 속삭여 온다.
[믿음이란 모르지…]물론.
[사랑조차 버렸고…]당연.
[슬픔조차 잊었어…]그래.
[행복이란 없었고…]맞아.
[고독조차 외면해…]아마.
그 은밀한 속삭임 끝에 귓가에서 입술을 뗀 순간, 느껴지는 것은 아릿한 전율.
날카롭고 단단한 이빨이 귓불을 깨물어 들며 통증이라기에는 너무나 은밀하고 짜릿한 감각을 전해 온다.
그렇게 고문이라기에는 너무 간지럽고, 애무라기에는 너무 차가운 감각 속에 음울한 음성은 계속해서 이어져 온다.
[다만 헛되고도 무의미한 삶 속에서, 너는 대체 무엇을 추구하느냐…?]아아, 그래. 그렇다.
그녀의 말은 분명히 옳다.
누구든 배신하고 무엇이든 행하며 살아왔지만, 그런데도 내게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나 의미 따위는 단 하나조차 없다.
단지 이 허무하고도 공허하기만 한 삶을 내가 여태까지 이어 가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
“살고 싶으니까.”
그것은 그저 순수하고도 처절한 욕망.
어떠한 이유도,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 하나로서 모든 것이 되는 집념.
이미 수십 년도 전에 녹슬고 망가져 인간의 피 대신 썩은 기름밖에는 흐르지 않는 고철 덩어리 심장을 뛰게 하고, 폐가 타는 듯한 통증 속에서도 숨을 이어 가는 유일무이한 이유.
[스스로의 죄를… 악을… 삶을 후회하지 않느냐…?]그녀의 눈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냉소이자 조소.
비탄이자 한탄이고, 애한이자 비애.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면서도 날카롭게 헤집어 오는 그 시선을 망설임 없이 마주한다.
“물론.”
후회? 그딴 것, 나는 모른다.
설령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내릴 것이며, 결코 그 선택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고작 후회라는 쓸데없는 잡념에 휘말려 나의 악의를 더럽히고, 나의 삶을 낭비할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래, 그렇기에 나는 악당.
결코 영웅은 될 수 없지만, 절대 범부에 머물지도 못할 자.
“이제 그만 꺼져라. 지옥의 망령아.”
스르르륵.
마치 어둠에 집어삼켜지는 것처럼, 혹은 녹아드는 것처럼, 흑단 같은 머리카락부터 점차 흩어져 가면서도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다만 한쪽 팔을 뻗어 칼날로 베어 내듯 차갑게 내 뺨을 쓸어 냈을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죄 많은 자여… 스스로의 악을 후회할 날을 기다리겠다…]안됐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한 줄기 음성만을 남긴 채 이제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잔재를, 나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 없고, 누구에게도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누구의 불행에도 슬퍼해 본 적 없고, 진심 어린 눈물 따위는 흘려 본 적 없다.
그 어떠한 행운조차 받아 본 적 없었고, 행복 따윈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다.
그 누구와도 함께 있을 수가 없었지만, 한 번도 고독 따위는 겪어 보지 못했다.
하여 내 삶은 헛되고 무의미할 뿐이나, 절대로 후회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며 나는 이뤄지지도 않을 약속을 기다리다 결국 죽어 버린 어리석은 바보를 조용히 마음속에 묻었다.
나는 배반자, 그러니 약속 같은 건 지키지 않는다.
나는 비겁자, 그러니 후회 같은 건 하지도 않는다.
원망하려면 원망해라, 증오하려면 증오해라.
내 생을 통틀어 오직 하나뿐이던 친우이자, 유일하게 나와 같은 것을 추구했던 동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