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7)
126영웅의 재난
“여긴 없다요! 거기에 있나요?”
“모르겠다요!”
하아….
수로를 가로지르듯 놓여 있는 커다란 돌다리, 그 밑에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길 한참. 고함이 점차 멀어져 가는 것을 들으며, 나는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어, 이제는 괜찮은 걸까요?”
“글쎄요. 일단 발각될 염려는 없을 듯싶군요.”
옆에 웅크리고 있던 흑발 녹안의 소년, 크리스 사제를 나는 살짝 돌아보았다. 예상외로 크리스 사제의 체력이 뛰어났기에, 추적을 따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추격해 온 츄리온 상인들의 숫자였다. 무려 세 자릿수의 츄리온 상인이라니, 이곳이 아무리 츄리오넬이라도 기본적으로 방랑 민족인 만큼, 츄리온 상인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돈밖에 모르는 츄리온 상인들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눈을 붉히고 크리스 사제를 쫓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츄리온 상인들이 왜 이렇게 쫓아오는 겁니까?”
“저도 모르겠는데요.”
“…….”
잠시의 망설임조차 없이 나온 즉답에, 나는 침묵했다. 암흑 교단의 사제인 게 들통났기 때문이라면 떨떠름하게나마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츄리온 상인들을 상대로 도둑질을 했다면, 좀 당황하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크리스 사제의 설명은, 나를 어처구니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냥 길거리에서 꼬치를 사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르르 달려와서, 겁이 왈칵 나서 도망치다 보니까 일행과도 떨어져 버리고…. 만약 이대로 잡히면 화형당할까 봐 무서워서 있는 대로 도망치느라 길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훌쩍.”
“…….”
암흑 교단은 사제에게 어떻게 가르치는 걸까?
시무룩하게 사정을 설명하다 이내는 울먹이기 시작하는 크리스 사제를 보며, 나는 아무래도 다른 신관을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닌지 심각한 고민에 잠겨 들었다.
아무리 성력이 절실하다고는 하지만 일개 수련 사제, 그것도 이런 소년의 성력이 과연 그분의 상세에 도움이 될지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채 고민을 마치기도 전에 크리스 사제는 느닷없이 내게 매달려 왔다.
“이대로 가면 전 잡혀서 화형당할 거예요. 흑, 스승님도 만나지 못했는데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좀 도와주세요!”
애걸복걸에도 경지가 있다면 이 소년의 경지는 검자나 마술사의 수준이리라.
자신을 버리면 십 리도 못 가 발병 난다느니, 그냥 갈 바에야 이 목을 베고 가라느니, 화형당하면 귀신이 돼서 저주를 하겠다느니 온갖 잡소리를 하는 소년을 상대하기를 한참.
결국 한숨을 내쉰 나는, 크리스 사제를 데리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크리스 사제는 틈틈이 말을 걸어왔고,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귀가 들리지 않으신다고요?”
“예. 어릴 때는 들렸는데, 크면서 약을 잘못 먹어서 귀가 전혀 안 들리게 됐어요. 대신 몸은 굉장히 튼튼해졌답니다.”
…대체 무슨 약을 먹으면 몸이 그렇게 튼튼해질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제야 소년의 반응이 가끔 늦었던 이유를, 그리고 경이적으로 튼튼한 몸의 비밀을 알고 나는 내심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몸이 튼튼한 거야 약 때문이라 쳐도, 귀머거리라 치기에는 크리스 사제의 대화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제 말을 알아들으시는 건…?”
“저한테는 스승님에게 배운 독순술이 있거든요!”
독순술…인가?
소년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한 대답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의 움직임만으로 말을 읽는 독순술이라면 이렇게 대화가 가능한 것도 이해가 갔다.
물론, 아무리 독순술을 사용하더라도 이렇게 원활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꽤나 열심히 독순술을 배우셨나 보군요.”
“그럼요. 저는 수화밖에 할 줄 모르는 푼수때기 계집애랑은 다르다고요! 스승님도 제 독순술만은 칭찬해 주셨는걸요.”
“스승님을 꽤 좋아하시는가 보군요.”
“네!”
크리스 사제는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나는 얼굴로 ‘스승님’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희 스승님은요,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뭘 물어도 대답 못 하는 게 없으신 데다가, 항상 자상하시기도 하고, 또 엄청나게 강하고 대단하고 위대하고… (기타 생략) …하신 분이에요!”
“…그렇군요.”
놀라운 패활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대단한 존경심이라고 해야 할까. 쉴 새 없이 스승 자랑을 늘어놓는 크리스 사제. 그 모습은 어수룩하면서도 밝고 활기차서 보기만 해도 무심코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크리스 사제님 같은 훌륭한 제자를 두셔서, 스승님도 좋으시겠어요.”
내 말을 들은 소년은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두 손가락을 맞대고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저어, 저는 부족한 제자라서 항상 걱정만 끼쳐드리고, 매일 혼만 나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예.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아끼고 계시다는 증거니까요.”
“그, 그런 건가요?”
그것이 더없이 기쁘다는 듯 활짝 웃어 보인 크리스 사제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문뜩 한 줄기 씁쓸함을 느꼈다. 그분에게 ‘홍염의 불꽃’을 배우고도 감히 제자를 자청할 수 없는 자괴감이, 그리고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나를 도와주신 그분을 감시하고 의심해야만 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나를 갑갑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오랜 과거, 이 세계를 점령했던 하나의 조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상 최강의 조직 ‘암흑성’이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까지 했음에도, 암흑성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일부일 뿐이었다. 철저한 비밀주의로 활동하였기에 13사도라는 수뇌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빼면 그 조직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것 없었고, 특히 암흑성이 파멸한 원인에 대해서 다만 불노불사를 추구한 대가로 받은 ‘신의 저주’라고만 전해질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조부님이야말로, 암흑성 최고의 신비로 알려진 13사도 중 일좌를 맡고 계시던 ‘검의 사도’이셨기 때문이다.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선조 일검자의 시대로 올라간다.
일검자께서는 전쟁으로 기사들이 몰락하고, 기사도가 흐트러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고, 그리하여 쌍검자의 후예를 비롯해 당대의 실력 있는 기사들을 끌어모아 기사도를 수호하는 조직을 만들어 내셨으니, 그것이 기사들이 만든 지하 조직, ‘프리 나이츠’의 시초였다.
선조 일검자의 뜻은 그대로 이어져 라바일가는 ‘프리 나이츠’의 수장으로서 대대로 암중에서 대륙의 기사도를 지켜왔다.
하지만 ‘프리 나이츠’는 주군을 모시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과 기사도를 중시하는 조직이었다.
그런 ‘프리 나이츠’를 이끌기 위해 라바일가는 황가에 검을 바치는 대신, 일개 자유 기사로 남는 것을 택해왔다.
그렇기에 ‘바위의 검’이라는 검술을 가지고도 라바일가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선조의 유훈을 지키면 지킬수록 몰락하는 가문은 가주들의 고뇌거리가 되었다.
선조님들은 ‘바위의 검’을 완성함으로써, 그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누구도 ‘바위의 검’을 대성할 수 없었고 그것은 나의 조부님이신 세나드 R. 라바일께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일류의 끝에 도달하셨지만 끝내 검경의 벽을 넘지 못한 결과, 조부님께서는 깊은 갈등을 느끼게 되셨다. 그런 조부님께 접근해 왔던 것이 모든 것이 신비에 감싸여 있던 조직, ‘암흑성’의 수장이던 ‘암흑성의 총사’였다.
암흑성은 가문의 부흥을 대가로 내세웠고, 조부님은 ‘프리 나이츠’의 독립적인 존속을 조건으로 암흑성의 ‘검의 사도’가 되었다.
하지만 13사도의 하나셨던 조부님조차도 암흑성은 물론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조차,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계시지는 못했다.
단 몇 가지 추측하신 것은 있었다.
암흑성의 13 사도는 원래 조부님같이 외부에서 회유된 비밀 조직의 수장들이리라는 것. 세간에 알려진 암흑성이란 껍데기일 뿐이며 진정한 암흑성의 실체는 따로 있다는 믿기 힘든 진실을 말이다.
그렇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암흑성이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때문에 암흑성의 총사라는 구심점을 잃은 후 13사도는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 조부님께서 남기신 이야기의 전부였다.
조부님께서는 암흑성의 해체 후 ‘프리 나이츠’라는 짐을 내려놓으셨지만, 그것은 너무 뒤늦은 결단이었다. ‘프리 나이츠’를 떼어 놓기 위해 라바일가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가문은 더 몰락했으니까.
그런데도 조부님은 결정을 번복하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프리 나이츠’를 비롯한 암흑성의 13사도와는 관련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셨고. 그렇기에 나는 여태껏 암흑성의 13사도는 물론, ‘프리 나이츠’와도 인연을 끊고 살아왔다. 아니, 오히려 기피해 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벌써 수십 년이나 지난 지금, 황제 폐하로부터 받은 밀명은 나를 더없이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게. 그리고 만약 그가 정말 암흑성의 총사와 관련 있다면, 그리고 그가 제국에 해악이 될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대의 검으로, 그를 죽이게.’
꽈악.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지나치게 다재다능하다는 점에서 그분과 암흑성의 총사 사이에 공통점이 있어도, 이미 수십 년도 전에 죽은 암흑성의 총사와 그분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억측에 가깝다.
하지만… 암흑성의 총사는 정말 죽은 것일까?
암흑성의 최후에 대해서는 조부님조차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다만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무실 뿐.
그렇기에 나는 어린 나이에도 감히 자세한 이야기를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암흑성의 총사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암흑성이 무너진 뒤에도 살아남았던 것이라면? 그리고 《악의 서》의 힘으로 불노불사를 이뤘다면? 샘솟는 의심과 의혹을 헤매길 한참, 나는 고개를 내저어 잡념을 떨쳤다. 의심은 하면 알수록 깊어질 뿐, 지금은 그분의 상세를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크리스 사제와 골목을 걷기를 한참, 돌아오느라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덕분에 츄리온 상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무사히 여관까지 도착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운 은발을 가진 인형 같은 소녀, 그분을 간호하고 있어야 할 아리스가 불안한 얼굴로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 무슨 일이죠?”
“아, 세레나.”
그제서야 나를 본 듯, 아리스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힐끔 문을 바라보며, 자신이 밖에 나와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세레나가 준 쪽지를 보고 찾아왔다는 신관이 지금 코드를 진료하고 있어.”
“하아. 그랬군요.”
나는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엇갈릴 것을 대비해서 남겨 둔 쪽지가 제 역할을 했다니,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보다 세레나. 뒤에 있는 건 누구야?”
“아, 이분은 암흑 교단의 크리스 사제님이세요.”
“암흑 교단?”
크리스 사제의 소개를 듣고 아리스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기야 이런 서부에, 그분 외에 암흑 교단의 사제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놀라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소개를 받고도 크리스 사제는 아리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다만 뭔가 이상하다는 듯, ‘어라? 내가 뭔가 잊고 있었던 거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잠시간 나눈 약간의 대화를 통해 그런 크리스 사제의 모습에 익숙해진 만큼, 나는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는 대신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보다 왜 나와 계신 거죠?”
“…진료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뭔가 거슬리는 게 있는 듯,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아리스의 말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때때로는 환자와 단둘이 있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까요?”
“글쎄. 지금쯤이면 될 거 같은데.”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 것일까.
왠지 초조한 듯이 문을 바라보는 아리스. 그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충격과 함께, 그대로 얼어 버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