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9)
128영웅의 당황
너무나 어이가 없다 보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한다던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없이 차분한 상태였다.
아니, 단순히 차분한 정도를 넘어서 머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리스가 문밖에서 지키고 있던 상황에서 느닷없이 그분이 사라졌다면 창문으로 빠져나갔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이 깨어나 스스로 움직이신 거라면 굳이 창으로 도망치듯 움직이실 리가 만무하다.
더군다나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분과 함께 사라졌다는 신관의 이야기는 단 한 가지 결론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분이 신관에게 납치당했다.
이 어처구니없고도 믿기 힘든,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나에게 냉정해질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계획적인 납치로군요.”
여관방은 1층, 수로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니 창문으로 그분을 납치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미리 배를 준비해 두어야 했다.
즉, 처음부터 납치를 목적으로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목적이 무엇이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의식을 잃은 환자라고는 해도 엄연한 성인 남성인 그분보다는 여자아이인 아리스를 납치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도 굳이 그분을 납치해 갔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바로 우리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마족인 아리스를 노리는 대신, 무력해진 그분을 납치한 것을 납득할 수 있다.
우드득.
나는 무심코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약 납치자의 목적이 그분을 인질로 삼아,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납치자의 목적이 그분 자체라면….
결코 그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미안해.”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그 나지막한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부터 더없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은발 자안의 소녀에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리스의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 내 잘못이야.”
그녀의 단호한 말을 듣고 나는 더 이상 어떠한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설령 내가 아리스와 같은 처지였다고 하더라도 절대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나의 귀에 한 줄기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괜찮아요.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신께서는 용서해 주시거든요.”
크리스 사제?
문가에 멀뚱멀뚱 선 채 물끄러미 상황을 지켜보던 소년 사제의 말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왠지 너무나 평안하게 들려, 새삼 이 소년이 신의 뜻을 따르는 사제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인간이란 원래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다만 중요한 건 그 잘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치냐 하는 것뿐이에요.”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 소년 사제는 쾌활한 얼굴로 싱긋 웃어 보였다.
“아하하. 사실 이건 제가 실수했을 때마다 스승님께서 해 주신 말씀인데, 저는 정작 실수를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고생했어요.”
…어쩐지.
왠지 납득이 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복잡한 얼굴의 아리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크리스 사제의 말이 맞아요. 지금 중요한 건 그분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거지, 누구한테 잘못이 있느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응.”
우리의 말이 좀 위로가 됐던 것일까. 아리스는 겨우 기운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고, 크리스 사제 또한 그것이 더없이 기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뭐든지 말씀해 주세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건 라네스 님의 뜻이니까요.”
…악신치고는 참 성격이 좋으시군요.
사교의 사제답지 않은 말에 쓰게 웃으면서도 나는 크리스 사제의 도움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아무리 수련 사제의 신분인 데다가 조금 어벙한 기색이 있어 보이기는 해도 명색이 사제. 거북이 발이라도 빌려야 할 지금 우리의 처지에 크리스 사제의 도움은 기꺼운 것이었으니까.
일단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정리했다. 당장 상대를 추적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계획적인 납치라면, 추적의 실마리를 남겨 뒀을 리가 없는 일, 일단 납치자에 대해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어린 소녀라고요?”
“응. 아주 여우 같은 꼬마 계집애였어.”
“헤에? 여우 같은 꼬마 신관이라…?”
아리스에게 납치자에 대해 듣고, 나는 내심 어이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겨우 일고여덟 살짜리 어린아이였다면 설사 아리스가 아니라 나였다고 해도 방심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십중팔구 그 꼬마아이는 미끼일 터. 그렇다면 분명 따로 주모자가 있을 테고 안타깝게도 그 아이에 대해 조사해 봤자, 추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크리스 사제가 신기하다는 듯 툭 하니 말을 내뱉었다.
“저기요, 저 그 아이가 누군지 알 것 같은데요.”
“그 아이를 보신 적 있나요?”
“그럼요.”
내 다급한 질문에 크리스 사제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자랑스럽다는 듯 평평한 가슴을 불쑥 내밀며 말을 끝맺었다.
“제 일행인걸요.”
“…….”
“…….”
아리스와 나는 크리스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서로를 돌아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써, 크리스 사제를 무시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내리고,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제가 남긴 쪽지를 보고 찾아왔다고 했나요?”
“응.”
“그렇다면 일단 여관으로 가서 누가 쪽지를 받아 갔는지 확인해 봐야겠군요.”
“알았어. 그럼 나는 마법으로 코드를 찾아볼게.”
나와 아리스는 각자 목표를 세웠다. 얼마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저기, 저기요? 네? 제 일행이라니까요?”
“하아….”
뒤늦게야 무시당한 것을 깨달은 것일까.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크리스 사제의 말에 나와 아리스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크리스 사제를 보며, 번갈아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이 그 납치자의 일행이라고?”
“예!”
“그렇다면 납치의 요구 조건을 말씀하시기 위해 일부러 저에게 접근해 왔던 건가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우연히 세레나를 만났을 뿐이라고?”
“그럼요!”
“그런데 저를 졸졸 따라와 보니, 놀랍게도 크리스 사제님의 일행께서 납치극을 벌이신 거 같다 이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그러면 당신은 자기 일행이 철저한 준비 끝에 납치극을 펼치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팔푼이라는 거야?”
“팔푼이라니, 너무해요!”
“게다가 그걸 알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납치자가 자기 일행 같다고 고백했다는 말씀이시고요?”
“아, 아무 생각 없는 건 아니에요. 저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고요!”
글쎄요. 생각이 있으신 걸로는 안 보이는데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과 같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머릿속이 비었음을 열렬히 긍정하고 있는 크리스 사제를 보며, 우리는 그저 설레설레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벙해 보인다고 해도 정말 납치자의 공범이라면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을 테고, 그분이 납치돼 이성이 박살 난 우리 앞에서 태연히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도, 모를 리 없었으니까.
“우우… 즈, 증거도 있어요!”
“무슨 증거 말인가요?”
우리가 자신을 믿지 않자 삐친 것인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크리스 사제는 당당하게 그 ‘증거’를 알려 주었다.
“그 어린아이 말인데요. 남색 머리카락을 아홉 갈래로 묶은 데다, 여우 눈에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죠? 그렇죠?”
“…아리스, 사실인가요?”
“…응.”
크리스 사제의 당당한 말과 아리스의 몹시 떨떠름한 대답에, 나는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납치범이 정말 여우 눈의 아이라면 아까 여관 주인에게 설명을 들은 크리스 사제의 일행이 틀림없었으니까.
아리스 역시 너무나 명확한 증언에 뭔가 미심쩍은 것을 느낀 듯, 힐끔 나를 돌아보며 의견을 구해 왔다.
“…어떻게 생각해?”
“아무래도 단순한 착각이나 오해는 아닌 듯싶군요.”
“헤헤. 이제 아셨죠?”
자신의 말이 사실로 증명돼서 만족한 듯 우쭐한 표정으로 으쓱거리는 소년을 향해,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크리스 사제님의 말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요.”
시원하게 내 사과를 받아들이는 크리스 사제, 그 모습은 비록 둔한 데다가 울보이기는 해도 과연 사제답게 정직하고도 순수하게 보였다.
그런 크리스 사제를 향해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범할 무례를 미리 사과드립니다.”
“아하하. 괜찮다니까요. 그 정도야… 에? 앞으로 범할 무례요?”
헤실헤실 웃던 도중, 고개를 갸웃거리는 크리스 사제를 향해 나는 조용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듯, 움찔한 크리스 사제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문가에 버티고 선 나와 내가 사과하는 사이 창문까지 단단히 틀어막은 아리스에 의해 퇴로는 이미 철저하게 봉쇄돼 있었다.
“납치범의 공범으로서, 잠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아…? 그, 어, 에?”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어버버하는 크리스 사제를 앞두고 나는 싸늘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고, 아리스는 가방에서 꺼낸 밧줄을 팽팽히 당겼다. 그리고 이성이 반쯤 돌아간 만큼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우리 앞에서 용감무쌍하게도 자신이 납치범의 공범이라는 것을 고백한 소년을 싸늘한 눈으로 보았다.
“저, 저어. 이만 가 보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안 돼.”
크리스 사제가 눈을 굴리다 어색하게 웃으며 꺼낸 질문에 나와 아리스는 참으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미리 양해를 구한 대로, 크리스 사제에게 협조를 구하기 시작했다.
다만, 조금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그럼 일단 대화부터… 우와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