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
12삼류 악당의 여행(2)
뜻밖의 행운으로 길잡이 몸값을 굳힌 덕에 나는 상쾌한 심정으로 짐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틀 뒤 길잡이를 찾아갔다.
“준비는 끝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시간도 예산도 부족한데, 뭘 어떻게 준비한다…?”
반면 길잡이의 얼굴은 죽상 자체.
놀음판에서 전 재산을 꼬라박고, 결국 노예로 팔리게 된 도박꾼 같은 면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내게는 길잡이의 의욕을 고취해 줄 좋은 수단이 있었으니까.
“못 가겠다는 뜻인가?”
“아, 아니다. 갈 수 있다.”
크흐, 이 맛에 악당을 한다니까.
고작해야 검에 손을 올려놓으며 차갑게 한마디 했을 뿐이거늘.
죽이겠다는 협박이라도 들은 것처럼 기겁해서 바로 말을 바꾸는 길잡이를 보며 나는 흐뭇함을 느꼈다.
영웅 나리들은 이런 짓 절대 못 한다.
돈 내라면 돈 주고, 복수해 달라면 복수해 주고.
심지어 편지 배달이나, 추억을 찾아 달라는 등 온갖 부탁을 다 들어주는 게 영웅이니까.
뭐, 그 부탁 대부분이 악당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게 끔찍한 점이지만.
어쨌든 그런 악당 특전을 이용해 값싸게 고용한 길잡이를 앞장세워 나는 기분 좋게 남부 밀림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딱 반나절뿐이었다.
내가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늪인가.”
“…그렇다.”
남부 밀림을 대표하는 명물 중 명물.
바닥없는 늪에 다리를 담근 채 나는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
“몰랐나?”
“미, 미안하다. 깜빡 놓쳤다.”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라고 할 줄 알았냐 이 새끼야아아아아!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지!
내가 이러라고 네놈을 고용한 줄 알아?
옆에서 허리까지 늪에 빠진 채 사색이 된 길잡이 놈의 대답을 듣고 나는 마음속으로 울분을 토했다.
이런 사태를 피하려고 고용한 길잡이거늘, 길잡이라는 놈이 앞장서서 늪으로 들어가다니!
그 걸음걸이가 어찌나 당당하던지.
놈을 따라왔다가 같이 늪에 빠진 나로서는, 당장에라도 멱살을 붙잡고 흔들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풀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시시각각 몸이 늪에 빨려 들어가는 상황. 조금만 더 지체하면 인생 하직하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민첩하게 행동에 들어갔다.
“고객? 뭐 한다?”
시끄러, 새꺄. 닥치고 잠수나 하고 있어.
매고 있던 짐에서 밧줄을 꺼내 올가미를 만든 나는 그것을 위로 들어,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멀리 있던 나무들을 겨냥해서.
그제야 내가 하려는 일의 의도를 눈치챈 듯, 길잡이 놈은 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소용없다. 늪지의 나무, 뿌리 약하다. 금방 넘어져서 못 매달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고작 밧줄 좀 던져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남부의 늪이 그토록 악명 높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어떤 위기 상황에도 기사회생할 수 있어야 하는 법!
어깨와 팔을 이용해 밧줄을 돌려 기세를 만들고, 정교하게 방향을 조절한 끝에, 나는 이를 악물고 밧줄을 내던졌다.
피이이잉!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멀리 있던 나무에 휘감기는 밧줄.
그 겨냥은 실로 백 점짜리라고 할 만했다.
문제는 나무가 못 버틴다는 것.
밧줄이 감긴 것만으로 흔들릴 정도였으니까 나무 한 그루에 매달려 늪을 벗어나는 건 무리다.
하지만, 한 그루가 아니라면 어떨까?
타앗!
밧줄 끝이 나무에 휘감긴 순간.
나는 손목을 튕겨 그 옆에 있던 또 하나의 나무에 밧줄이 걸쳐지게 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교묘하게 꺾어 밧줄이 또 하나의 나무를 빙 돌아오게 한 뒤, 망설임 없이 밧줄을 잡아당겼다.
끼긱, 끼이익.
팽팽해진 밧줄과, 요동치는 나무들.
하지만 나무들은 흔들려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가 밧줄에 의지해 늪을 빠져나오자 길잡이는 입을 딱 벌렸다.
“…고객, 마법사다?”
“무슨 헛소리지?”
“나무, 왜 안 쓰러진다?”
왜? 도르래 처음 보냐?
밧줄만으로 이중 도르래를 만드는 건 힘들지만, 지지대와 밧줄의 방향만 잘 맞추면 여러 나무에 힘의 크기와 방향을 분산하는 것 정도는 쉽다.
“아니, 그보다 밧줄을 어떻게 그렇게 조종한다? 요술 밧줄이다?”
요술 밧줄은 뭔 놈의. 그딴 게 어디 있냐?
아, 비슷한 거로 ‘적룡의 채찍’이 있긴 하지만 이 밧줄은 그냥 평범한 채찍일 뿐이다.
중요한 건 요령과 테크닉이지.
자고로 밧줄은 악당의 필수 장비 중 하나.
함정을 설치할 때나, 인질을 묶어둘 때나, 온갖 곳에서 쓰이는 만큼, 숙련된 악당이라면 이 정도 밧줄 테크닉은 기본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미주알고주알 설명하지 않았다.
서늘한 눈으로 길잡이 놈을 봤을 뿐.
“안 나올 텐가?”
“나, 나간다! 나도 나간다!”
쓸데없이 지껄이면 그냥 버려두고 가겠다는 진심이 120%쯤 든 내 말에, 화들짝 놀란 길잡이 놈은 허겁지겁 밧줄에 매달려 늪을 빠져나왔다.
물론 진짜 버려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길잡이가 없어지면 곤란한 건 둘째 치고 반나절 만에 길잡이를 잃어버려서야, 기껏 지불한 품삯이 헛돈이 돼 버리니까.
뭐, 한 번 실수했으니 다음부터는 잘하겠지.
…그런 헛된 희망을 품을 때가, 나한테도 있었다.
부우웅!
“으아악! 하, 하르바 살려라!”
“… 그게 벌집인 걸 몰랐나?”
“열매랑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안다?!”
“남부 밀림에는 꿀 냄새가 나는 열매도 있나?”
“아?”
지나가다가 식량을 마련하겠답시고 과실 흑벌의 둥지를 따 버리는 바람에 맹독을 가진 수천 마리의 벌 떼에 쫓기다 내가 준비해 온 쑥을 불태워 벌을 쫓아냈을 때도.
“아, 아프다. 죽을 거 같다.”
“해독제는 어딨나?”
“없다….”
“…남부 밀림에 들어오려면 해독제 준비는 필수일 텐데?”
“시간과 예산이 너무 부족했다….”
기어코 과실 흑벌에 물려서 생사의 고비를 헤매는 놈 때문에 값비싼 해독제를 헛되이 소모했을 때도.
“오늘은 여기서 잔다.”
“여기서 자겠다고 했나?”
“그렇다. 문제 있다?”
“나는 상관없지만, 날씨는 문제가 있을 거 같군.”
“무슨 뜻이다?”
“오늘 밤에는 폭우가 올 거라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날이 이렇게 맑은데, 비가 왜 온다?”
“남부 밀림의 날씨는 변덕이 심한 거로 안다만.”
“나, 밀림에서 평생 살았다. 장담하는데, 오늘 밤 날 맑다!”
날씨를 두고 호언장담한 길잡이 놈 때문에 한밤중에 폭우를 고스란히 맞은 건 기본.
놈이 가지고 있던 짐과 식량을 잃어버린 탓에 아까운 비상식량을 놈과 나눠 먹어야 했을 때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쪽이다. 이쪽으로 가면, 길 나온다.”
“…확실한가?”
“그렇다.”
“거긴 방금 우리가 지나온 길이다만.”
“무, 무슨 소리다? 증거 있다!?”
“여기 이 표식을 누가 남긴 것 같나?”
“…….”
하지만 자꾸 어설픈 모습을 보이다 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인도하는 놈을 보며, 나는 기어코 본전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대신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무, 무슨 짓이다?!”
“한 번만 묻겠다.”
거짓말을 하면 죽이겠다는 살기를 풀풀 풍기며, 나는 스산한 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네놈, 진짜 길잡이냐?”
“길잡이 맞다! 신께 맹세코 진실이다!”
“그런데 왜 길을 모르지?”
“그, 그게…….”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피던 끝에, 길잡이 놈은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
“나, 길잡이 시작한 지 석 달 됐다.”
“…….”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그렇게 날 놀려 먹고 싶냐? 엉?! 이 개 같은 새끼들아!
나는 마음속으로 한탄했다.
모처럼 헐값에 길잡이를 구했다고 좋아했건만, 하필 고른 길잡이가 생초보였을 줄이야. 그야말로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나, 초보지만 실력 있다!”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하나?”
“믿기 싫으면 다른 길잡이 구해 봐라! 다 나만큼은 헤맨다! 밀림 처음 와 놓고, 길잡이보다 익숙한 고객이 이상한 거다!”
이 새끼는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나?
아주 뻔뻔해지기로 작심을 했는지 적반하장으로 나대는 길잡이 놈을 보며,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길잡이 놈을 산 채로 묻어 버리고 갈지, 아니면 죽여서 늪에 던져 버리고 갈지.
“어쨌든 좀만 더 믿고 써 봐라! 마지막 마을까지 가려면, 길잡이 필수다!”
내 살기를 눈치챘는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길잡이 놈.
그런 놈을 차갑게 노려보던 끝에, 나는 결국 쥐고 있던 멱살을 풀었다.
“한 달이다.”
“뭐, 뭐가 말이다?”
“한 달 안에 마지막 마을까지 길을 안내해라.”
“하, 한 달?! 그건 무리….”
길잡이 놈이 기겁하며 반론하려 한 순간, 나는 허리춤의 검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걸 본 놈은 대번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른침을 꿀떡꿀떡 삼키며, 내 얼굴과 허리 품을 번갈아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못 하면 어떻게 된다?”
“듣고 싶나?”
나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최대한 싸늘한 목소리로 반문하며 지그시 길잡이 놈을 보았을 뿐.
“아, 아니. 됐다. 나, 한 달 안에 마지막 마을까지 간다. 맹세한다!”
오냐, 그 맹세 지키는 게 좋을 거다.
지키지 못하면 남부 밀림의 늪 속에 시체 하나가 늘어나게 될 테니 말이지. 흐흐흐.
* * *
멸망한 섬의 성현자가 그랬던가,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길잡이 놈은 그 말을 몸으로 실현해 보였다.
어영부영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정말 빠릿빠릿하게 밀림을 안내했으니까.
물론 초보다 보니 간혹 실수를 저지르긴 했다. 하지만 목숨을 넘나들게 했던 전에 비하면, 그럭저럭 봐줄 수 있는 범위였다.
그 덕분에 이동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라졌다.
절벽에 지어진 두 번째 마을까지, 이틀. 호수에 있는 세 번째 마을까지, 닷새. 지하에 파묻힌 네 번째 마을까지, 이레. 강가에 있는 다섯 번째 마을까지, 아흐레.
고작 두 번째 마을도 못 찾아 며칠이나 헤매던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괄목상대였다.
단,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무리하게 심신을 혹사한 탓인지, 일정을 서두르면 서두르는 만큼 길잡이 놈도 급격히 홀쭉해졌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쉬어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놈이 과로로 쓰러지든 말든 난 길만 안내받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일사천리로 나아간 지 열흘이 됐을 때였다.
내가 여섯 번째 마을에 도착한 것은.
* * *
…이런 젠장.
나는 내심 한탄했다.
본래는 든든한 울타리로 지켜지고 있었을, 하지만 이제 폐허처럼 망가진 마을이.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 전시하듯 널브러진 채, 벌레와 짐승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는 반쯤 썩은 시체의 냄새가 내게 마음속으로 욕을 지껄이게 했다.
물론 이런 시체쯤이야,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에 놀라서야 악당 노릇은 못 하니까.
그런데도 내가 욕설을 내뱉은 것은, 시체에 남은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부 밀림에도 도적단이 있나?”
“…도적은, 없다.”
“도적이 아닌 다른 건 있다는 거로군.”
“……!”
이 새끼, 누구 짓인지 알고 있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면서 눈을 피하는 길잡이 놈을 나는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시체들을 자세히 살펴봤을 뿐이다.
훼손이 심한지라 좀 알아보기 힘들기는 했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은 누구보다 범죄 현장에 익숙해야 하는 법.
숱한 완전범죄를 꾸며 온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추리해 냈다.
범인은 아마도 한 명.
시체에 남은 검흔을 볼 때 인간, 그것도 일류 수준의 검사의 짓이다.
거기까진 놀랄 것 없다.
양민을 학살하는 악당이야,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래,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말이지….
…왜 뜯어 먹은 흔적이 있담?
짐승의 치열과는 명확하게 다른, 인간의 것임이 분명한 흔적을 보며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흔적을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이 짓을 벌인 자는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다.
푸줏간에서 돼지를 잘라 널어놓듯.
과시하기 위해 도륙한 것이지.
그것만 해도 불길하기 그지없는 일이거늘, 마을에 남아 있는 흔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벽에 남은 칼자국이라거나, 한 치 깊이로 새겨진 발자국이나, 피가 날카롭게 흩뿌려진 자국 등등.
이건 아무리 봐도 일류 이상의 실력을 지닌 검사가, 목숨 걸고 치열한 접전을 벌인 흔적이었다.
요컨대 이 밀림에는 사람 먹는 괴물과 그런 식인귀와 적대하는 검사가 있다는 뜻이다.
“냄새가 나는군.”
안 좋은 냄새가 난다.
그것도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심한 악취가.
시체 썩는 냄새를 말하는 게 아니다.
숙련된 악당이기에 맡을 수 있는, 찜찜하고도 불길한 냄새가 내 위기 감각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거 어째 감이 안 좋은데….
지금이라도 튈까?
그럼 조직이 날 가만두지 않겠지, 끄응.
물러나자니 조직의 처벌이 무섭고, 나아가자니 감이 영 안 좋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굳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필요 없었다.
“조직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누구냐?”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쌓여 있던 시체 뒤편에서 다소곳이 나타난, 갈색 피부의 여인을 마주한 순간부터 내게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저는 아샤. 마지막 마을에서, 손님을 마중 나왔답니다.”
* * *
마지막 마을에서 마중 나왔다는 아샤라는 여인을 만난 뒤, 내 여정은 몹시 순탄해졌다.
길을 잃지도 않고.
늪에 빠지지도 않고.
끼니마다 진미를 대접받아.
들르는 마을마다 웅장하게 환대받고.
점수를 매기자면 십 점 만점에 백 점짜리의, 개업 석 달째의 초짜 길잡이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훌륭한 안내였다.
하지만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밀림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곳곳에서 느껴지는 진한 피비린내가.
그리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주민들이 웃음 뒤에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공포심이, 등을 쑤셔 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내 악당의 본능에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위험하다고.
살고 싶다면 당장 도망치라고.
그러나 어쩌겠는가, 상부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악당의 숙명.
조직에 처분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울면서 가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객, 이미 안내 있다. 길잡이 필요 없다. 그러니 나 돌아간다! 제발 돌려보내 줘라!”
“마지막 마을까지 간다고 맹세하지 않았나?”
“그거랑 이건 다른 얘기 아니다!?”
“맹세는 맹세다.”
이 새끼가 어딜 혼자 튀려고!
숙련된 악당은 억울한 일은 혼자 당하지 않는 법.
지푸라기가 없으면 아름드리나무라도 물속에 끌어들이는 물귀신의 심정으로 나는 길잡이 놈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냥 억울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필요할 때 희생양으로 던져 버리기 위해서지.
목숨이 위험한 찰나에는 미끼의 유무가 큰 차이를 낳으니까.
물론 위기가 아예 안 닥치는 게 제일이지만….
…그건 지금부터 두고 봐야겠지.
* * *
“어서 오시게. 조직의 사자여.”
열한 개의 마을을 거쳐 마침내 도착한 마지막 마을.
그 안쪽에 마련된 남루한 모옥에서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맞이한 것은, 쥐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빼빼 마른 영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겉모습만 보고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감을 곤두세우며, 최대한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을 뿐.
“그대가 마지막 밀림의 주인인가?”
“사자여. 남의 이름을 물을 때는 스스로의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일세.”
“내가 용건이 있는 건 밀림의 주인뿐. 다른 이들에게는 볼일 없다.”
나는 냉담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감은 그제야 혀를 차며 내 질문에 답했다.
“허허, 사자께서는 의외로 성급하시군…. 맞네, 내가 자네가 찾던 이일세.”
칫, 눈치 빠른 영감탱이 같으니.
좀만 더 미적거렸으면 이 길로 돌아갔을 텐데.
하지만 상대가 표적임을 스스로 인정한 이상 여기서 임무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아쉬움을 접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중히 예를 갖춰 말했다.
“만나서 반갑소. 남부 밀림의 지배자여.”
“지배자라고 할 정도는 아닐세. 그저 조금 영향력이 있을 뿐이지.”
흥,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기는.
노인의 말을 들은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 조금의 영향력으로 남부 밀림을 휘두르는 남부 밀림 열두 마을의 절대적인 지배자.
그것이 바로 이 늙은이라는 것을, 내 조직에서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곳에 파견된 것도 그래서고.
“그래, 사자께서는 예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가?”
“용건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오만.”
“아쉽게도 내게 마음을 읽는 재주 같은 건 없어서 말일세.”
칫,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 같으니.
이미 윗선에서 얘기가 오간 게 몇 번이거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하는 꼴이라니.
그 교활함에 내심 혀를 차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냉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내가 받은 임무는 그대들을 영입하는 것이오.”
젠장, 무슨 인사 담당도 아니고.
신참인 내가 왜 영입까지 해야 하느냐고!
그것도 이런 오지 중 오지까지 와서!
“흠…. 요컨대, 우리보고 그대들 밑에 들어오라는 말인가?”
“내키지 않는다면 협약만 맺어도 상관없소. 그럼 우리 조직은 영원히 그대들의 우방이 될 것이오.”
“호오, 그것참 고마운 배려일세.”
고마울 거야 있나? 다 우리 좋자고 하는 짓인데.
나는 마음속 깊이 냉소했다.
말이 좋아서 협약이니, 우방이지.
요점은 남부 밀림을 바치고, 시키는 대로 하는 하청 조직이 되라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이니.
악의 조직끼리의 연계란 그런 것이다.
상부 아니면 하부만 있을 뿐, 대등한 동맹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움직이며 속임수와 거짓과 배신을 일삼는 악당들이 서로를 신뢰하며 사이좋게 협력하는 일 따위, 절대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그 배려를 받아들여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점에서 볼 때.
늙은이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이해득실을 따지면 따질수록 이들이 협약을 맺을 이유는 없어지니까.
그리고 이럴 때, 악의 조직이 제시할 수 있는 이득은 정해져 있었다.
“살아남을 기회요.”
“…살아남을 기회?”
“우리 조직과 적대한다면, 그대들은 당장 그 기회를 잃게 될 테니까.”
“그건, 협박인가?”
“단순한 충고일 뿐이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협박 맞다.
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조져 버리겠다는 거지.
뭐 이딴 협상 방식이 다 있냐 싶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악의 조직의 방식인 것을.
실제로 이렇게 병합되는 악의 조직도 꽤 많고.
…협상이 파탄 나서 사자부터 죽이고 보는 경우는 더 많지만.
그렇기에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긴장감을 바싹 곤두세웠다.
협상이 파탄 나면 즉시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기 위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던 끝에 늙은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고라…. 그렇다면 고맙게 받아들여야겠지.”
“그 대답은 승낙이라고 봐도 되겠소?”
“적을 만드는 것보다는 친구를 만드는 것이 낫잖나. 조건만 맞는다면, 협약을 맺는 것 정도는 어렵지도 않고 말일세.”
후우… 살았군.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만약 늙은이가 협상을 파탄 냈다면 아무리 내가 숙련된 악당이라도 이곳에서 무사히 도망치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협상이 타결됐다면 걱정할 건 없다.
늙은이가 어떤 깐깐한 조건을 내세우든 나는 돌아가서 보고하기만 하면 된다.
그 뒤에는 상부에서 알아서 하겠지. 뭐
“그런데 사자여. 혹시 알고 계시는가?”
“무엇을 말이오?”
“얼마 전, 이 남부 밀림에 맹수 한 마리가 들어왔다네.”
“남부 밀림에 맹수는 흔한 거로 아오만.”
“그래서 우리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말일세, 그 맹수의 발톱이 제법 매섭더군. 자칫하면 우리까지 베일 뻔했을 정도로 말일세.”
… 뭐? 이 늙은이를 위협할 정도라고?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겉모습은 비루먹은 나귀처럼 보인다고는 해도 이 늙은이는 남부 밀림을 지배하는 이들의 일원.
그 힘은 어느 악의 조직 못지않다.
당장 우리 조직에서 몇 번이나 협상을 제안했다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은 명백하다.
만약 이들의 힘이 만만했다면 조직에서는 나 같은 사자를 파견하는 대신 정예 조직원들에게 칼을 쥐어 보냈을 테니까.
그런 이들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드물다.
신의 가호를 받은 영웅들이거나,
“그대들과 협상을 진행하는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참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혹은 같은 악의 조직이거나.
씨발, X 됐다!
마음속으로는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냉담하게 응수했다.
“그것참 불우한 우연이요.”
“그렇다네, 불운한 일이지.”
어이, 늙은이? 우연은 왜 빼는데?!
이건 우연이야, 우연! 난 상관없다고!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러나 눈빛만은 번들거리는 늙은이를 보며 나는 내심 머리를 싸매 쥘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들을 공격했다는 그 맹수는 십중팔구는 우리 쪽 조직원일 테니까.
협상이 흐지부지해서 진행이 잘 안될 경우, 무력시위로 위협하는 건 악당들의 상식이니까.
그 방법 자체는 분명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은데 말이지….
이 XXX 같은 상부 놈들아!
일을 저지를 거면 나한테도 알려 줬어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협상하러 온 결과, 졸지에 성난 요마의 둥지에 제 발로 들어온 꼴이 된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뭘 바라시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은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 법!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냉정하게 물음을 건넨 나를 보며, 늙은이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많은 걸 바라진 않네. 그저 든든한 우방의 사자님이라면, 맹수 한 마리 정도는 대신 처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일세.”
“…그것이 협약의 조건이오?”
“그런 셈이라네.”
이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나보고 직접 우리 조직원을 처리하라니 극악무도한 악당이나 할 뻔뻔한 말이다.
“좋소. 그 조건, 받아들이리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살아야 하는 것을.
어차피 조직의 명으로 죽는 것은 악당의 숙명.
자신의 죽음으로 조직의 세가 불어난다면, 누군지를 모를 조직원도 기꺼이 희생하리라.
희생할 생각이 없으면?
희생하게 만들어 줘야지, 암.
“호오, 사자님은 참으로 화통하시군.”
“우방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오.”
“그것참 옳은 말이기는 한데…. 사자님이 맹수를 잡으려면, 먼저 알아 두셔야 할 게 있다네.”
“뭘 말이오?”
갑자기 덧붙여진 말에 불길한 느낌을 받고 얼굴을 굳힌 내게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늙은이는 한마디를 더했다.
“우리는 눈이 어두워서 말일세. 숲에 잘못 들어가면, 맹수와 사자님을 구분 못 할지도 모른다네.”
“…….”
…악당을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들이시여.
어찌하여 이런 악종을 낳으셨나이까.
이 나이까지 악당질했으면 좀 데려가든지!
인종 차별이냐?! 재력 차별이야?! 이 XX 같은 악마 새끼들 같으니!
나는 내심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영감탱이가 한 말의 요점은 하나.
적극적으로 나를 방해하겠다는 말이다.
내가 조직원을 처리하면 협약을 맺겠다는 건 내가 실패하면 협약을 안 하겠다는 말이 되니까.
그리고 나를 방해할 가장 좋은 방법은, 날 끝장내는 것이고.
요컨대, 나는 이제부터 남부 밀림에서 필사의 도주극을 펼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조직원을 처리하거나, 놈들이 먼저 조직원을 사냥하거나, 아니면 내가 놈들에게 뒈질 때까지 말이다.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해, 이것들아!
왜 엄한 날 죽여서 경고를 하려고 해?!
“어떤가? 괜찮은가?”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는 듯.
얼핏 자비롭게 말하는 늙은이.
하지만 이건 독이 든 술잔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포기하겠다고 하면, 이 영감탱이는 협상이 파탄 난 책임을 다 나한테 떠넘길 테니까.
그 경우 조직이 어떻게 나설지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상관없소.”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늙은이를 쏘아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 그대들 또한 검에는 눈이 없다는 걸 명심해 두시오.”
내가 잠자코 당해 줄 거 같냐?!
덤빌 거면 네놈들도 죽을 각오로 덤벼!
이왕이면 아예 안 던져 주면 좋고!
“허허허, 나도 상관없다네. 일방적으로 쫓기만 하는 사냥… 이 아니라 싸움만큼 시시한 것도 없으니 말일세.”
어이, 영감!?
댁 방금 사냥이라고 했지?!?! 엉?!
고의인지, 아니면 단순한 말실수인지 말 한마디로 공포심을 퍽퍽 풀어놓으며 늙은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오늘 밤은 연회를 즐기게나, 사자여. 내일부터는 서로 바빠질 테니 말일세.”
마지막 만찬이라도 베풀어 주겠다는 듯, 영감탱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 연회에 참가할 일은 없었다.
왜냐고?
채 연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마지막 마을에서 내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내가 미쳤냐?! 놈들이 날 사냥할 준비를 끝낼 때까지 놀고 있게!
밀림에 있는 조직원을 내가 먼저 잡든, 아니면 나 몰라라 쌩까고 밀림에서 도망치든 일분일초라도 빨리 여기서 멀어져야 한다.
여기서 미적거리다 잘못하면….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손님. 적어도 연회 정도는 즐기고 가실 줄 알았는데요.”
…이런 망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앞길에서 나타난 갈색 피부의 여인.
아샤를 보며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좋아하지 않소.”
“그거 우연이군요. 저도 빠른 걸 좋아한답니다.”
참 기쁘다는 듯.
만면에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는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시작하도록 할까요?”
차르릉.
무슨 짓을 하다 온 건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슬낫.
그 칼날에 묻은 피를 스르륵 핥으며 요염한 미소를 짓는 미친년을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씨X, X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