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1)
130마왕의 당황
“…사제장이라고? 그 여우 같은 꼬맹이가?”
“네. 맞아요.”
크리스가 한 말을 듣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비록 신전과 교단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삼대 신관과 삼대 사제의 조건은 똑같으니까.
체술이 가장 뛰어난 이는, 사제 전사가 되어 강력한 권능을 받는다.
교리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이는, 수석 사제가 되어 신기를 받는다.
신앙심이 가장 투철한 이는, 사제장이 되어서 신탁을 내려 받는다.
그것은 신화시대 이래 천년 동안 변함없이 전해 내려온 불변의 법칙이었고, 그 법칙에 성별이나 연령은 상관없는 만큼 아이라도 사제장이 못 되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암흑 교단의 사제장은, 단지 성력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본래 작은 마을 몇 개에 전해지던 암흑 교단을 수십 년 만에 폭발적으로 성장시켜 ‘겨울 신전’에 버금가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까.
특히 그 정치적 수완은 유명해서 조금이라도 사제장에 대해 아는 이들은 여우 중 불여우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나 또한 과거 암흑 교단과 동맹을 맺으며 서신을 통해서나마 연락을 한 적 있는 만큼, 그 소문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밀고 당기는 사제장의 정치적 감각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고, 그렇기에 암흑 교단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로드 오브 킹덤’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오죽하면 암흑 교단에서 전령이 올 때마다 내가 화병으로 앓아누울 뻔했겠는가.
그런데 겨우 7, 8살이나 될 듯 보이던 그 꼬마가 암흑 교단의 사제장이었다니.
최근에 사제장이 교체되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저어, 그런데 밧줄을 좀 느슨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너무 조이는 거 같은데.”
“안 돼.”
“안 됩니다.”
밧줄로 의자에 꽁꽁 묶여 있던 크리스의 부탁을 나와 세레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아무리 자수-라기에는 조금 강압적인 포획을-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단서인 납치자의 공범을 풀어 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 아이가 정말 사제장이라면, 왜 여기 있는 거지?”
암흑 교단의 활동 영역은 어디까지나 북부. 외부에서 배척당하는 사교의 특성상 일개 사제도 함부로 북부를 떠나지 않는 판에 사제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츄리오넬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막말이나마 까딱 잘못했다 붙잡히면 즉시 화형당할 수도 있는 모험이니까.
“그야 제 스승님을 만나려고요.”
“스승님?”
“네! 제 스승님은요,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뭘 물어도… (기타 생략) …하신 분이에요!”
…이 인간, 지금 자기가 무슨 처지인지 이해는 하고 있는 걸까?
의자에 꽁꽁 묶여 있는 주제에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기 ‘스승’을 자랑하는 크리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듯, 조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꿋꿋하게 심문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그 스승님이란 분은 어디 계신가요?”
“그건 저도 모르겠는데요?”
…이 바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오히려 자기가 더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흑발 녹안의 소년.
나는 그 머리를 한 대 콱 때려 주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농담한 게 아니었다.
“사제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츄리오넬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만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언제 어디서 만날지는 모르겠거든요.”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세레나를 바라보았고, 세레나 또한 힐끔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며 무시할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사제장이 언급된 것이 문제였다.
교단의 정점인 삼대 사제 중에서도 사제장은 신탁을 받아 그 의지를 대신하는 자. 신의 뜻을 받아 움직이는 경우,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탁이 있었다고는 해도 사제장이 나설 찾아 나설 정도라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라는 거지 이 바보의 스승은?
“당신의 스승님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가요?”
나와 똑같은 의문을 떠올린 듯, 세레나가 나직이 건넨 질문에 크리스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 교단의 수석 사제님이신걸요!”
암흑 교단의 수석 사제…라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제 전사가 ‘신의 힘을 대행하는 자’. 사제장이 ‘신의 의지를 대신하는 자’라면 수석 사제는 ‘신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자’다. 교리의 제일 해석자이자, 신에게 선사받은 신기로써 성력을 초월한 기적을 행사하며 설사 사제 전사나 사제장에게라 할지라도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큰 스승, 그것이 바로 수석 사제인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그 스승이 수석 사제라면 사제장이 신탁을 받아 직접 찾으러 온 것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신 같은 바보가 수석 사제의 제자라고?”
나는 무심코 그 의문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수석 사제라고 하면, 각 교단의 교리에 대해서만큼은 현자에 버금가는 이들이다. 비록 스승이 아무리 똑똑하고 걸출해도 제자까지도 뛰어나리라는 법은 없다지만, 이건 편차가 커도 너무나 컸던 것이다.
“너, 너무해요… 제가 못난 제자인 건 맞지만, 그래도, 그래도…. 흐어엉!”
자, 잠깐만. 대체 왜 우는 거야?
물론 내가 말을 좀 날카롭게 하긴 했지만!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울 필요까지는 없잖아!
훌쩍훌쩍 우는 크리스를 보며 나는 당황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렇게 큰 소년이 애처럼 눈물을 글썽이다니, 나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나와는 달리 어떤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는 철혈의 여인이 있었다.
“그래서, 당신의 스승님을 찾아왔다는 사제장님께서는 대체 왜 그분을 납치해 가신 건가요?”
다만 나지막하고도 담담하게 필요한 것만을 물어보는 세레나의 모습에 나는 잠시나마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특별히 분노를 표출하지도 협박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답을 받아 내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고문을 감수조차 감수하고라도… 말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다행스럽게도 세레나는 굳이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다.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크리스는 일단 대답을 하기는 했으니까. 단지, 그 대답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에에. 글쎄요. 확실하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