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2)
131악당의 당황(2)
“그야 치료에 방해가 될 거 같아서요.”
…아니, 보통 그렇다고 환자를 납치합니까?
사제장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한 대답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죽하면 왜 이런 곳에 단둘이 있는 건지 이유를 물어본 게 급격히 후회될 정도였겠는가.
하지만 내가 두통을 앓든 말든, 사제장은 꿋꿋하다 못해 감탄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요. 오라버니를 치료하려다가, 같이 있던 아이한테 옷을 벗기면 안 되느니 뭐느니 하면서 몇 번이나 방해를 받았으니까요. 참 까탈스러운 아이였다니까요.”
“사제장님의 치료 방법이 워낙 특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라어라. 그런가요?”
그야 당연하지!
알몸으로 안아서 상대를 치료하는 방법이 정상일 리가 있나!
아무리 암흑 교단의 비전 치료법이라고는 해도 상식적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싱글거리는 사제장에게, 나는 내심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물론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차마 그것을 밖으로 토해 낼 수야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때마침 창밖을 지나가던 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사공의 도움을 받아서 냉큼 오라버니를 옮겨 실었지요.”
“…그걸 순순히 도와주덥니까?”
“네. 오라버니가 위급해서, 치료하기 위해 급히 옮겨야 한다고 하니 얼른 도와주던데요.”
기껏해야 7, 8살짜리 꼬마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사제장의 얼굴을 보며 나는 상황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골골대는 환자 하나를 옆에 두고 이 얼굴을 한 어린애가 도와 달라고 했으니,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도와줬겠지. 설마 누가 이런 어린애가 납치극을 벌이고 있다고 상상이나 했으랴.
“더구나 요금으로 딸랑 금 한 조각만 받고, 이 배까지 통째로 선물해 주셨답니다. 참 좋은 사공분이셨어요.”
…과연.
해적 같은 장정이 꽃 같은 처녀를 납치할 테니 배를 빌려 달라고 했어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이런 곤돌라 수십 개도 사고 남을 금덩이를 날름 받아먹고 날라 버린 사공에 대한 끈적끈적한 동질감과 부러움 속에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돈은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라어라. 함부로 쓰다니요. 오라버니를 치료하는 데 쓴 돈이 어떻게 함부로가 될 수 있겠어요?”
내가 한숨 쉬듯 내놓은 말에도 사제장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오히려 싱긋 웃으며 반짝거리는 금빛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애초부터 오라버니가 몸 관리만 제대로 하셨어도 소녀가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올 이유 자체가 없었을 텐데요.”
끄응. 할 말이 없군.
사제장의 말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 과격한 수준을 넘어서 몰상식하기까지 한 조치가 아니었다면 아직 생사의 고비를 헤매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오라버니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시다는 건 다 이해하고 있어요. 분명 뭔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어디선가 영웅에게 박 터지게 두들겨 맞으셨다든가, 복수하러 온 누군가에게 조금 난도질당하셨다든가, 절벽에서 자유 낙하를 실험해 보셨다든가, 삐걱거리는 몸으로 되지도 않는 강행군을 했다든가 하셨겠죠.”
혹시 몰래 보고 있었습니까?
잠시 의심 어린 눈으로 사제장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눈빛을 거뒀다. 내가 그러고 산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 만큼 새삼 감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조금은 쉬엄쉬엄 지내시면 안 될까요?”
아니, 나라고 해서 딱히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아무리 정신 나간 인간이 많아도 그렇지, 누가 그런 자살행위를 원해서 해 대겠습니까.
그저 살려고 발악하다가 그렇게 됐을 뿐….
머릿속에 맴도는 변명이야 많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변명을 할 상황도 아니었을뿐더러, 무슨 변명이라도 제대로 통할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다른 걸 다 떠나서, 명색이 수석 사제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그렇게 몸을 험하게 굴리시는 걸 알면 다른 교도들도 불안해할 테고 말이죠.”
끄으응.
수석 사제라는 공적인 신분을 내세워, 은근슬쩍 압박하고 들어오는 사제장의 말에 나는 겨우겨우 신음을 참아 냈다. 아니, 도대체 신앙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우째서 수석 사제냔 말입니다!
그 덕분에 교단에서도 골칫거리로만 불리던 그 바보 자식을 제자로 맡아야 했던 데다가, 반강제적으로 빙설관 그 괴물 새끼 앞에 내던져지기까지 했던 만큼 내게 수석 사제라는 신분은 거북할 뿐이었다.
“어라어라. 혹시 수석 사제직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귀신같은 눈치를 가진 사제장의 질문에 나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삼대 사제의 직위는 내가 싫다고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거북하다 해도 내게는 해직당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혹시 수석 사제직이 부담스러우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성물하고 신기만 반납하시면, 즉시 다른 직위로 바꿔 드릴 테니까요.”
“…사제로서 받은 영광된 임무를 어찌 개인의 사사로운 이유로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문제는 바로 성물과 신기다.
쥐꼬리만 한 성력을 쓸 수 있는 성물이야, 솔직히 있든 말든 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수석 사제로서 받은 신기는 쉽사리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칠대 신기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 칠대 신기 이상으로 절실한 것이 그 신기였으니까.
그 때문에 내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진 셈이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을 강요한 사제장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 먼길을 떠나 찾아온 귀여운 여동생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지 않나요?”
“고생하셨겠습니다.”
“아뇨. 그거 말고요.”
“…도움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고요?”
“…이렇게 다시 만나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오라버니.”
그제야 원하던 먹잇감을 얻은 여우처럼 만족스럽게 싱긋 웃어 보이는 사제장을 보며,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사제장과 이런 곳에 단둘이 있는 상황은, 내게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어라. 혹시 소녀랑 함께 있는 게 불편하신가요?”
“제가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끄으응. 아예 독심술을 쓰는구나.
분명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정확히 속셈을 읽어오는 사제장의 눈치에 나는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 허세와 심리전이 생명줄 자체, 그런 점에서 ‘황동의 왕좌’는 물론 ‘악마의 황금률’조차도 안 통한다는 점에서 사제장은 황제나 빙설관보다 어려운 상대였다.
물론, 내가 사제장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숙련된 악당이란 결코 자신의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 법!
나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체온이나 호흡에서부터 미세 진동, 동공의 수축 상태, 심지어 심장 박동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조절하며 나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고 사제장을 직시했다.
자, 와라!
내 숙련된 악당의 명예를 걸고,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부동심을 보여 주고야 말겠다.
“그럼, 잠시 소녀와 데이트 좀 해 주실 수 있겠네요.”
…무에?
단 2초.
그것이 내 숙련된 악당으로서의 명예가 활활 불타 잿더미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