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6)
135악당의 축제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꼬치구이를 건네받는 사제장을 보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일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다냐….
느닷없이 축제 구경을 가자는 요청에 휘말려 어찌어찌 도시 한복판에 있는 거리까지 나와서 또 저찌저찌 하다 보니 꼬치까지 사 주게 된 내 입장이 그저 어이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부탁을 거절하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하여튼, 그래서 오라버니가 몰래 떠나신 뒤에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사제장이 꼬치를 오물거리며 한 말에 나는 그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암흑 교단을 도망치듯 뛰쳐나왔을 당시 내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수석 사제라는 거북한 직위에 더불어, 서서히 불거지는 뇌물 수수 혐의에다가, 호시탐탐 날 죽이려는 야월관과 빙설관까지.
내게 있어 북부는 하루하루가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만 하는 사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장은 내 옆구리에 바짝 달라붙은 채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크리스 사제는 스승님을 찾아내라면서 매일 엉엉 울어 젖히지, 야월관은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팍팍 뿌리고 다녀서 아무나 닥치는 대로 괴롭히고 다니지. 그걸 다 수습하느라 소녀도 무척이나 고생했답니다.”
“…그랬습니까?”
휴우. 몰래 도망치길 잘했지, 나는 내심 진저리를 쳤다.
사실 그 두 자식이야말로 내가 암흑 교단을 떠나온 핵심 이유였으니까. 제자라며 걸핏하면 달려들어 뼈를 분지르거나, 실수랍시고 조미료 대신 독극물을 밥에 넣어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오가게 한 그 바보 자식도 바보 자식이었지만, 특히 야월관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그 교활하기 그지없는 놈이야말로 암흑 교단에서도 가장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장본인이었으니까.
오죽하면 나를 미끼로 써먹겠다며 빙설관 레닌 앞에 던져 버렸겠는가!
심지어 명색이 수석 사제였는데!
젠장, 내가 죄를 지으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니, 그야 기부금을 좀 빼돌리고, 여기저기서 뇌물 좀 받아먹고, 이래저래 벌인 일이야 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5번이나 살인미수를 저지르는 건 좀 과한 거 아냐? 응?
“그러니까 오라버니. 이제 그만 교단으로 돌아와 주시면 안 될까요?”
거기를 다시 돌아가라고?
절대 사양하고 싶은데.
나는 내심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숨 쉬기만 해도 폐가 얼어붙는 북부 설원에 용의 무덤을 깔고 빙설관 레닌과 맞짱 뜨거나, 갈빗대 서너 개는 분질러지는 돌진을 매일 일과처럼 해 오는 바보 자식을 받아주거나, 호시탐탐 내 목을 날릴 기회만 노리고 있는 야월관을 피해 다니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죄송하지만,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힘들 듯싶습니다.”
“어라어라. 정말 매정하게 대답하시네요, 오라버니.”
안타깝다는 듯한 말과는 달리 사제장은 실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내 손을 놓고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 매정한 대답은 정말로 할 일이 있으시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오라버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소녀가 부담스럽기 때문인가요?”
순간,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석고상처럼 굳어 버린 나를 뒤에 남겨 둔 채 사제장은 마치 숲을 뛰어다니는 새끼 여우처럼 경쾌한 걸음으로 인파 사이를 걸어 나갔다.
“아니면, 교단으로 돌아오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드시기 때문인가요?”
대략 다섯 발자국. 고작 눈 깜짝할 사이에 줄일 수 있지만, 이 복잡한 거리에서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그 길고도 짧은 거리를 마주한 채 소녀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내게, 그 아름다운 금색안을 향했다.
“오라버니. 지금 하시려는 일, 포기하실 수는 없나요?”
더없이 나지막함에도 불구하고 축제의 소란을 뚫고 선명하게 스며든 질문에도 나는 침묵을 깨지 않았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의 정체를, 과거를, 그리고 목적을 알고 있는 소녀의 말이 내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사제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암흑성을 배신한 사도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고, 복수는 이미 끝났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오라버니의 인생을 그런 곳에 허비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아. 그래. 그렇다.
아득한 과거 이 세계를 정복했던 조직인 ‘암흑성’은 이미 폐허조차 안 남기고 사라졌다.
고작 그런 과거의 흔적 때문에 복수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겠지. 그러니까 사제장의 말은 더없이 옳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면 그 말에 흔들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온갖 고통과 굴욕을 감수하며 평생 수많은 악의 조직을 돌아다녀 온 것은 고작 복수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게 허비할 인생 따위는 없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어라어라. 그런가요?”
“그 누구보다 당신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우뚱 고개를 기울이던 사제장은 내 말에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일견 귀엽고 순수하게만 보였지만, 나는 결코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리고 귀엽게 보인다 해도 맑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금색안은, 사제장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다섯 걸음의 간격을 둔 채 사제장과 나는 서로를 직시했다.
거리는 온갖 시끄러운 소리와 축제를 구경하는 다양한 인파와 온갖 소란이 뒤엉켜 있었지만,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사이에는 놓여 있었다.
그 짧고도 영원히 이어질 듯만 싶던 교착은 그러나 의외로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우와아아악!”
머리 위에 우렁찬 비명이 터져 나온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사제장을 끌어안았다.
워낙 작고 가벼운 몸이었던 데다가 사제장도 저항 없이 내 손길을 받아들였기에 다섯 걸음의 거리가 있었음에도 나는 늦지 않게 사제장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쿠당탕!
쯧. 이건 또 웬 주정뱅이람.
술에 취해서 창문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자로 뻗은 채 부들부들 경련하는 주정뱅이를 보며 내심 혀를 찬 나는 사제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주 괜찮은데요.”
품속에 바짝 안긴 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사제장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는 그 자그마한 몸을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하지만 사제장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양팔을 내 목에 감은 채 더욱더 품속 깊숙이 안겨들었다.
“역시, 오라버니의 품 안은 따듯하네요.”
그거야 긴장하니 열이 나서 그러는 거겠지요.
거의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던 대답을 나는 가까스로 집어넣었다.
사제장이 그런 대답을 바라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랜 과거의 기억이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깊숙이 끌어안은 채, 사제장은 나지막이 내 귓가에 속삭여 왔다.
“사실은 소녀도 알고 있어요. 소녀가 아무리 말려도 오라버니께서는 결코 멈추지 않으시리라는 것도. 설사 오라버니께서 멈춘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이건 그저 제 미련일 뿐이라는 것도.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제장이 바라는 것이 부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그저 긍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수석 사제로서가 아니라 사제장의 의남매로서도 거짓 따위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후회하지 않으세요?”
“예.”
“그걸로 만족할 수 있으세요?”
“아니오.”
내 망설임 없는 대답을 듣고 사제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정말이지, 오라버니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당이시라니까요.”
“모르셨습니까?”
“어라어라. 그럴 리가요. 오라버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리고 오라버니께서 저를 깨워 주셨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요.”
그 말과 함께 목에 감은 팔을 풀어낸 사제장을 나는 부드럽게 안아서 땅에 내려놓았고, 그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사제장은 더 이상 내게 포기를 권유하거나 과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 또한 굳이 그런 얘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먼 과거, ‘그녀’와 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나저나 좀 아쉽네요. 오라버니한테 하얀 머리는 어울리지 않는데요.”
“염색이라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어라. 소녀를 위해 남색 나인 테일 머리를 해 주시려는 건가요?”
“…아무래도 거기까진 힘들 듯싶습니다만.”
그 뒤로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그야말로 단순한 잡담에 지나지 않았다. 특별히 뭘 숨길 필요도 없고, 딱히 다른 걸 계산할 필요도 없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나누는 이야기, 그러나 내게 참 오랜만의 잡담이기도 했다.
그래, 모든 이들을 속이고 비밀을 숨기며 살 수밖에 없는 나로서도 사제장과는 마음 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에 있어, 사제장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상대였으니까.
“어라어라. 여기 반가운 게 있네요.”
“기올라로군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다리를 넘어가던 도중, 사제장이 노점에서 발견한 악기를 보며 나는 내심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올라는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고전 악기. 너무 오래됐기에 어지간한 악사도 연주법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내 경우는 예외에 속했다. 사제장이나 ‘그녀’ 때문에라도 기올라를 연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제장은 역시 이 기회를 그냥 놓치지 않았다.
“이거, 잠깐 연주해 봐도 되나요?”
“어라라. 이거 연주할 줄 안다요?”
“소녀의 오라버니께서 연주할 줄 알거든요.”
“그럼 좋다요. 어차피 사 가는 사람도 없는 물건인데, 한번 연주해 보라요.”
“그렇다는데요. 오라버니?”
노점상과 협상을 끝낸 사제장의 시선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올라를 집었다. 그리고 옆에 방치돼 있던 의자에 걸터앉아 기올라의 현을 가볍게 튕겨 보았다.
디링.
흐음. 현의 상태는 별로군.
하긴, 기올라를 다룰 이도 드문 마당이니 조율까지 돼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만큼이나 상태가 온전한 것도, 츄리온 상인이 비싸게 팔아먹어 보고자 열심히 관리한 덕분이고.
그렇게 낡아 있던 만큼 보다 신경 써서 부드럽게 현의 조율을 마치고, 나는 현 위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디딩, 디리링―
그것은 오랜 추억의 음악이었다. 내 연주 솜씨는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삼류를 벗어날 정도는 아니다. 그저 듣기 껄끄럽지 않은 정도랄까.
그 어떤 기술이라도 습득할 수는 있을망정, 결코 삼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내게 주어진 한계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능숙해질망정 뛰어나질 수는 없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포기한 적은 없다. 뛰어나질 수 없는 삼류라도 좋다.
다만 지닌 것을 갈고닦는 것만으로 누구보다도 능숙해질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노력할 가치는 충분했으니까.
바로 그렇기에, 옆에 있던 사제장이 입을 여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라― 라라, 라라라라.
더없이 맑고도, 아늑하며, 아름다운 노래.
세상의 그 어떤 악기도 감히 흉내 낼 수 없고, 악사라면 악기를 부러트리고 싶어질 만한 충동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며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고 영혼마저 끌어들인다.
그래,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란 존재한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저 노랫소리에 앞에서 나 또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폭풍처럼 압도적인 그 노랫소리 속에서도 나는 악기를 놓지 않았다.
아무리 거친 폭풍 속에서도 숙련된 뱃사람은 키를 놓지 않는다.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한계임을 알면서도 일류와 삼류를 불문하고 키에 매달려 바다를 헤쳐 가는 뱃사람처럼, 다만 필사적으로 악기에 매달리며 그 노래를 이끌었다.
그래, 이것이 내가 수십 년간 빚어낸 성과. 그녀의 노래 같은 연주를 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 찬란한 노래 속에서도, 손을 멈추지 않을 능숙함만은 이룰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마지막까지 설령 세계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다만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찰나와도 같은 시간 끝에 영원과도 같은 연주가 끝났다.
짝. 짝, 짝짝짝짝짝짝―!
“와아아아!”
쯧. 괜히 시선을 끌었군.
어느새 사방을 둘러싼 채 박수를 쳐 오는 관중들을 보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내 연주만이라면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리지 않았을 텐데, 역시 사제장의 노래는 파급력이 장난이 아니군.
그때, 내 시야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우글우글 몰려 있는 관중들 한가운데 어째 낯익은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남부인 특유의 건강한 갈색 피부, 가늘고도 부드러운 느낌의 얼굴선, 거기에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에 동그란 눈까지.
워낙에 동안인 탓에 미소년에 가깝게 보이는 묘하게 중성적인 외모의 그놈을 마주 보길 잠시, 그 커다란 연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는 것을 본 순간, 나는 희망을 버렸다.
그래, 사제장이 이 서부까지 혼자 올 리가 없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왜 하필이면 이놈인데? 왜? 왜?! 차라리 야월관을 데려오지! 크흐흑.
그 순간, 놈은 천지가 떠나갈 정도로 우렁찬 고함을 터트렸다.
“스… 스승니이이이이이임―!”
고함 못지않게 맹렬히 질주해 오는 놈을 나는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희망도, 의욕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내 몸은 익숙한 상황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하나. 둘. 셋.
거의 몸에 체득되다시피 한 타이밍에 맞춰 살짝 옆으로 한 걸음을 비켜서자, 막 나를 끌어안으려던 놈은 그대로 허공을 날아 맨바닥에 다이빙해 버렸다.
촤라라라락―!!
흐음, 잘 미끄러지는구먼.
절망감이 워낙 지나치다 보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희귀한 경험 속에서 나는 맨땅에 얼굴부터 처박은 채, 철퍼덕 나자빠져 주르륵 미끄러진 바보 자식을 담담히 내려다보았다.
둘도 없을 멍청이이자 귀머거리이고, 덜렁이, 암흑 교단에서 내가 제자로 삼았던 수련 사제, 장점이라고는 튼튼한 몸밖에는 없는 바보를.
“…너무해요, 스승님. 오랜만인데 안아 주지도 않으시고.”
내가 미쳤냐?
멧돼지랑 박치기를 해도 날려 버릴 수 있을 네놈을 받아 주게.
그렇게 심하게 나자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리기는커녕 찰과상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헤헤 웃는 놈을 보며 나는 내심 한탄했다.
몸 튼튼한 거야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럴 때 뇌진탕 정도는 걸려 주면 안 되겠냐? 응?
“…크리스.”
바보에 귀머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독순술 하나만큼은 제대로 익힌 놈은 내가 입을 열자마자 착실하게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입 다물고 앉아 있기만 하면 그냥 예쁘장한 미소년으로만 보이는, 하지만 입을 열거나 행동에 들어가면 즉시 움직이는 재앙이 되는 바보 자식에게 나는 켈트 사제로서 차분히 주의를 주었다.
“여자애가 그렇게 함부로 뛰어다니는 게 아니다.”
“예, 스승님!”
내 예상대로, 놈은 싱글싱글 활기 넘치는 미소와 함께 우렁차게 답했다. 그래봤자 대답만 잘할 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릴 게 뻔했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바보 자식의 천적이 있었다.
“어라어라. 크리스 사제 눈에 오라버니는 보이고 소녀는 보이지 않으시는 건가요?”
“에? 사제장님은 언제 오셨어요?”
“…정말 안 보이셨나요? 이거 섭섭하네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제야 사제장의 존재를 깨달은 듯,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던 바보 자식은 내게 애타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 구원을 아주 깔쌈하게 무시했다. 사제장으로부터 바보 자식을 구해 줄 이유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그, 그게 스승님을 만나 뵌 게 너무 기뻐서….”
“더구나 소녀를 두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군것질이나 하다가 또 길을 잃어버리다니. 정말 어쩌자고 그러시는 건가요?”
“우우. 하지만 꼬치가 너무 맛있어 보였는걸요.”
“변명은 죄악이라는 걸 알고 있겠죠? 나중에 각오하세요.”
“…네에.”
싱긋 웃고 있는 사제장,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이는 바보 자식.
암흑 교단에 머물고 있던 시절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 모습에 내심 혀를 차던 나는 덕분에 다음 순간 혀를 콱 깨물어 버릴 뻔했다.
“코드, 괜찮아?”
“몸은 이제 나아지신 겁니까?”
켁! 아주 줄줄이 나타나는구나.
늬들이 무슨 줄줄이 꼬치냐?
갑자기 나타난 녀석과 계집애의 모습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나라도 감당하기 힘든 사고뭉치들이 이렇게 줄줄이 나타났으니 자칫 뭔가 하나 문제라도 생겼다가는 츄리오넬이 통째로 날아갈 판이다.
젠장, 일단 자리부터 피해야겠군.
아무래도 주변의 이목을 너무 끈 만큼, 나는 일단 기올라를 츄리온 상인에게 내밀었다.
“잘 썼소.”
하지만 츄리온 상인은 기올라를 받지 않았다. 대신 멍하니 내 앞에 있는 사제장과 바보 자식과 녀석과 계집애를 돌아볼 뿐이었다.
뭐냐? 설마 기올라 사용료를 내라거나, 일단 연주했으니 사라고 억지를 부릴 셈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악마의 황금률’을 사용할 준비를 갖춘 채, 나는 츄리온 상인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츄리온 상인이 내놓은 말은 내 예상을 아득하게 초월한 것이었다.
“저기, 혹시 아르바이트 좀 해 볼 생각 없다요?”
…뭔 바가 어쨌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