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8)
136마왕의 담론
상황이 정리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노점상을 하던 츄리온 상인이 느닷없이 꺼낸 여신제에 여신 역을 해 달라는 제안에 나와 세레나는 거절하려고 했다. 지금 우리의 처지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야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우리의 결정은 단 한 마디 말에 그대로 뒤엎어졌다.
“좋아요.”
…너, 암흑 교단의 사제장이 그래도 되는 거야?
그 시원한 대답을 듣고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나라에서는 무지막지한 현상금까지 걸려 있는 암흑 교단의 사제장이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축제 행사에 직접 나서리라는 것은 상상 밖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어처구니없는 일은 따로 있었다.
“오라버니께서도 도와주실 거예요. 그렇죠?”
그렇기는 뭐가 그렇다는 거야?!
여우 계집애의 말에 나는 내심 발끈했다. 아무리 여우 계집애가 암흑 교단의 사제장이고 그와 뭔가 관계가 있다고 해도 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도와줄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잠깐, 코드! 내 믿음을 이렇게 배신해도 되는 거야? 응?
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같이 삼대 사제라 불리기는 해도 사제장은 엄연한 교단의 수좌, 아무리 그가 수석 사제라도 그 말을 거부하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논리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당연히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는 여우 계집애의 모습은, 나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하지만 그가 이미 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우리만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세레나와 함께 행사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여기 고급 속옷 가져왔다요.”
“무대에서 옷 벗을 일 있다요?!”
“좋은 몸매는 속옷에부터 나오는 법이다요.”
“때려치우고 장식품부터 챙겨 오라요!”
…난장판이 따로 없네.
여신제에 참가하겠다는 승낙을 함과 동시에 중앙 청사로 끌려오다시피 한 후, 복장부터 장식품과 화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준비로 정신없는 츄리온 상인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무리 간단한 축제라도, 준비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츄리오넬처럼 큰 도시의 축제가 하루아침에 뚝딱 준비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나머지 준비는 미리부터 해 둔 데다가, 돈이 넘치는 츄리온 상인들이 아니었다면 진즉 여신제를 때려치워야 했을 것이다.
“으음. 이 옷은 어떻게 입는 건지 모르겠네요.”
츄리온 상인들을 바라보던 중, 나는 낯익은 음성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옷 하나를 든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크리스 사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게 여자라고?
귀엽고 활기찬 느낌의 얼굴은 확실히 묘하게 중성적이기는 하다.
더구나 길게 뻗은 팔다리와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나름 유연한 체형을 보자면 그 사실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그렇지만 단 하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저 가슴으로?
축제용 의상으로 갈아입기 위해 우리는 간단한 셔츠만을 입고 있었고, 그렇기에 굴곡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크리스 사제의 반반한 가슴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나는, 무심코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줄기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나 정도는 평균인 거구나.
응, 그래. 나보다 작은 사람도 얼마든 있는걸. 내 동년배나 10대의 소녀들까지 포함해서 나보다 작은 여자는 처음이라는 건 무시했다.
0과 1 사이에는 하늘과 땅, 가능과 불가능, 진실과 거짓만큼의 차이가 있는 법이었으니까.
뭐, 가슴 따위… 별로 상관없지만.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 냉정하게 판단하면서도 왠지 입가에 맺히는 웃음을 막기 위해 애써 생각을 전환한 나는 바보 인간에게 물었다.
“당신, 그의 제자라고 했지?”
“네? 켈트 스승님 말씀인가요?”
…이 바보는 자기 스승 이름도 모르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뜬 바보 인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던 나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그는 ‘프리 나이츠’의 수장이자 쌍검자의 후예, ‘암흑 교단’에서 활동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으니까.
“당신은 어떻게 그의 제자가 된 거야?”
특별히 그의 과거를 캘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가벼운 호기심이었을 뿐,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음, 글쎄요. 성인식 날 첫날밤을 같이 보내고 나니까, 스승님이 저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셨어요.”
흐응. 그렇구나. 성인식 날 첫날밤을 같이….
“…뭘 같이 보내?”
“첫날밤이요. 성인식 때는 덕망 높은 분을 초청해서 도움을 받는 게 저희 교단의 전통이거든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대답하는 바보 인간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좀 전에 내가 들은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성인식까지 치른 어른이라고? 이 바보가?
물론 얼핏 보면 청년 같기도 하지만, 그래 봐야 청년티가 나는 소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이 바보 인간의 외모였다.
이런 얼굴을 가지고도 성인이라는 것이 나로서는 뜻밖일 뿐이었다.
하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던 만큼, 나는 바보 인간의 말을 선선히 받아넘겼다. 성인식 첫날밤에 무슨 도움을 받는다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이런 바보에게 묻는 건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그렇게 침묵을 지키는 내게, 바보 인간은 자랑하듯 신나게 말을 이어 갔다.
“스승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좀 무뚝뚝해 보이시기는 하지만 사실은 병자가 있다고 하면 설원을 가로질러서라도 찾아가실 정도로 자상하신 데다, 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나서시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교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을 존경하고 있었어요.”
흐응. 그가 그랬구나. 크리스의 자랑에 나는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에 대한 칭찬을 듣고 있다니,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졌지만 나와 세레나 말고도 그의 박학다식하고도 자애로운 면을 알고 있는 이가 또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만의 보물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도중 바보 인간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몇몇 나쁜 사제님들이 스승님께서 뇌물을 받았다느니, 겨울 신전에 교단을 팔아넘겼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웠어요. 그래서 스승님도 어쩔 수 없이 북부를 떠나오신 거고요.”
“그래?”
나는 무심코 눈을 치켜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 존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시기와 질투도 따르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물며 그곳이 악신을 모시는 사교인 암흑 교단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런 누명을 뒤집어쓴 채, 쓸쓸히 교단을 떠나야 했을 그의 심정이 나를 더없이 화나고도 안타깝게 만들었다.
“스승님께서 말없이 교단을 떠나신 이후에 슬퍼한 사람이 많았어요. 저도 그렇고, 사제장님도 그렇고, 야월관님도요.”
“야월관이라면… 암흑의 사제 전사 크레니아를 말하는 거야?”
뜻밖의 말을 들은 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근 몇 년간 빙설관 레닌을 상대로 홀로 맞서 싸워 온 암흑 교단의 사제 전사. 야월관의 능력은, 모든 신관 전사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으로 이름 높다. 사제장의 정치력과 야월관의 무력이 없었다면 암흑 교단이 지금처럼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으리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나 또한 두 번이나 빙설관 레닌과 싸워 본 입장으로서 야월관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 괴물 같은 지상 최강의 인간을 상대로 비록 이기지는 못할망정 박빙을 이루며 교단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야월관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으니까.
“성격이 조금 까칠하셔서 잘 드러내시지는 않지만, 야월관님도 스승님을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그래?”
성격이 좀 까칠하다고?
내가 들은 소문의 반의반만 사실이라도, 야월관은 그렇게 평가할 만한 인물이 아닐 텐데…? 인간 말종이라든가, 성격 파탄자라든가, 미친 살인마라든가, 능구렁이가 백 마리쯤 들어 있는 계략가라든가, 암흑 교단에는 빙설관보다 야월관을 더 무서워하는 이들이 많다든가 등등.
야월관의 성품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본 만큼 미심쩍은 심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게, 바보 인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얼마나 좋아하냐 하면… 스승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시는걸요.”
…뭐?
그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멍하니 바보 인간을 보던 나는 순간 흠칫했다. 뭔가 황홀한 듯 허공을 보는 연녹색 눈동자. 너무 무방비하게만 보이는 몽롱한 눈빛 너머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섬뜩한 무언가가 나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했다.
뭐지, 이 느낌은? 전장에서도 몇 번 겪어 본 적 없는, 거의 빙설관 레닌을 상대할 때나 느껴봤던 그런 오싹함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그런 나의 반응이 무색하게도 바보 인간은 대체 무슨 일 있냐는 듯, 무방비하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냥 착각인가?
착각이라기에는 너무 섬뜩하던 느낌에 홀로 갈팡질팡하길 잠시, 나는 결국 뭔가 잘못 느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영 찜찜한 느낌 속에 입을 열었다.
“죽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말이겠지?”
“헤에? 뭔가 다른 건가요?”
전혀 차이점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바보 인간을 보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농담이라면 모르겠는데 진심으로 차이를 모르겠다는 듯한 그 태도가 너무나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좋아한다고 죽이고 싶어 하지는 않잖아.”
“하지만 야월관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스승님을 좋아한다고.”
“그래?”
혹시 이 바보가 뭘 잘못 기억한 건 아닐지 의심하던 나는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가 들은 야월관의 성격이면 좋아한다고 상대를 죽여 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남을 일이었으니까.
…뭐어, 나도 그 심정을 전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고.
조금은 부끄러운 옛날 일을 떠올리고 미묘한 심정으로 침묵을 지키는 사이 바보 인간은 대화에 흥미를 붙인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스승님을 무지무지 보고 싶었어요. 스승님이 돌아오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게 매일매일 설원에 나가서 기다리기까지 한걸요.”
“…….”
…그러고도 안 죽었단 말이야?
바보 인간의 경이로운 내구력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비록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아는 북부 설원은 아무리 옷을 두껍게 입는다 해도 견뎌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숨 한 번만 잘못 쉬면 폐가 얼어붙는 그곳에 매일 나간다는 건 앓아눕기는커녕, 영원히 잠들 만한 자살행위인 것이다.
이 바보, 정말 인간은 맞는 걸까?
혹시 ‘데몬 소울’이 만든 인조인간인 건 아니고?
“뭐, 하지만 역시 가장 스승님을 기다린 건 역사 사제장님이셨어요. 두 분은 유독 사이가 좋으셨거든요.”
의심의 눈초리로 바보 인간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이야기였으니까.
“대체 두 사람은 무슨 사인데?”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두 분이 이미 십수 년도 전부터 서로 알고 계시던, 의남매 사이라는 것뿐이에요.”
의남매…인가?
나와 세레나와도 같은, 그러나 수준이 다른 가족으로서의 깊이에 나는 씁쓸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작 몇 개월의 시간을 함께한 나와는 달리, 이미 십수 년의 시간을 함께했다면 그토록 친숙하고도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것도 너무나 당연….
“…십수 년?”
“예. 제가 처음 교단에 입문해서 사제장님을 뵈었을 때부터 워낙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고 노래를 부르셨으니까요. 사실 좀 더 오래된 관계이신 것 같기도 하지만….”
바보 인간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고작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잠깐만. 그렇다면 대체 그 여우 계집애 나이가 어떻게 된다는 건데?”
“네?”
바보 인간의 말대로라면 설령 그를 만난 게 갓난아기 때라도 사제장의 나이는 최소 열 살 이상이다.
그 꼬마의 나이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어… 저어. 그, 그러니까 마치 십 년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수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신 사이라고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네?”
…아니,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려고 애쓰는 바보 인간의 모습은 내 의심을 더욱더 부추겼다.
사제장의 나이가 겉보기 그대로라면 굳이 이렇게 변명까지 해 가며 숨길 필요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저,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내가 더 이상 캐물으면 더 감추지 못할 것 같아서인지, 딸랑 셔츠 한 장에 반바지만을 입은 채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바보 인간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굳은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