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9)
137영웅의 담론(1)
“이게 어울린다요!”
“아니라요! 이게 더 어울린다요!”
“바보 아니다요? 이 가슴을 보라요!”
“가슴보다는 이 각선미부터 봐야 한다요!”
몸을 가리고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살결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듯한 천 조각에 가까운 두 의상을 놓고 툭탁거리는 두 츄리온 상인을 지켜보길 잠시, 이대로는 저 두 의상 중 하나를 입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부웅!
“으악!”
“뭐, 뭐다요?!”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검에 놀란 것일까, 옷을 부여잡은 채 엉덩방아를 찧은 그들에게 나는 ‘수호하는 자’를 든 채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이나, 허벅지 위까지 드러나는 옷 말고 다른 것은 없는지 여쭙고 싶군요.”
내가 아무리 수치심이 적은 편이라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축제의 온갖 구경꾼들의 앞에 이런 천 조각을 입고 나선다는 것은 여인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들이 내민 옷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말이다요….”
“잠깐, 이 검도 꽤 근사하지 않다요?”
“여신에게 검이 웬 말이다요.”
“전쟁의 여신이라면 꽤 어울린다요.”
“으으음. 확실히, 그럼 그쪽으로 한번 준비해 보겠다요.”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쑥덕거리길 잠시, 두 츄리온 상인이 다른 옷을 찾으러 가자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축제를 돕는 것까지는 불만이 없었다.
그것이 그분의 결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수많은 츄리온 상인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이 난장판은 너무 혼잡하고도 시끄러워, 보기만 해도 피로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많은 츄리온 상인들보다도 정작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어라어라. 전쟁의 여신이라니, 꽤 어울리시네요.”
작은 의자에 가볍게 걸터앉아 가느다란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는 여우 눈의 소녀를 나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고작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그러나 실제로는 암흑 교단의 사제장인 남발 금안의 소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나처럼 13사도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는 데다가, ‘암흑성’에 대한 단서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며, 오라버니라고 칭할 만큼 그분과 친한 소녀, 그녀를 통해서 알아봐야 할 것은 많았지만 진실에 대한 공포심과 긴장감이 내게 차마 질문을 건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사제장은 너무나 즐거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세레나 씨에 대한 얘기는 예전부터 많이 들어 왔지만, 설마 이런 미녀이실지는 몰랐네요.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놀랐답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당신의 정체를 알고 놀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듯싶은데요.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는 사제장을 나는 부담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동경하던 사람이라도 만난 듯, 싱긋 웃으며 계속 말을 걸어올 뿐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까지 겪어 오신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는 없나요? 예를 들면 어둠의 산의 요마를 퇴치한 일이라든지….”
“죄송합니다. 지금은 그다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군요.”
그 부탁을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사제장이 부담스럽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떠드는 일 자체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둠의 산의 주인, 쿠르타는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난적이었다.
천운이 따라 가까스로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1년이나 검을 놓고 지냈을 정도니까.
그렇기에 폐하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를 사제장에게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라어라. 그거 이상하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뭔가 소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요.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시라는 걸 보니, 아무래도 소녀가 잘못 짚었던 것 같네요.”
…이런.
미처 동요를 숨기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사제장이 생각보다 예리했던 것일까. 마음의 혼란을 발각당한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대로 침묵을 지킨다고 변하는 것은 없으리라는 사실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어라어라. 소녀한테 물어보실 게 있다니. 대체 뭔지 궁금하네요.”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다 받아쳐 왔던 주제에 이제 와 질문을 건네는 내 태도에도 소녀는 불쾌감을 드러내는 대신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라리 소녀가 거부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흔쾌한 대답에 오히려 갑갑함을 느끼며 나는 느끼며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크리스 사제에게 어떤 노래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제장님께서 들려주신 노래라고 하더군요.”
“네. 소녀는 노래를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비록 귀가 안 들린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크리스 사제도 노래 배우는 걸 참 좋아하고요.”
“…이라는 노래도 말입니까?”
나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라는 노래가 정말로 ‘암흑성’에 대한 것이라면, 그리고 사제장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이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사제장의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예. 그 노래는 소녀가 직접 지어낸 노래지요.”
“직접… 말씀입니까?”
“그래요.”
싱긋 웃는 소녀를 나는 복잡한 얼굴로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제장은 ‘암흑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싱글거리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서는 단 한 점의 동요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내 마음을 꿰뚫어 볼 듯, 투명하게 빛나는 별빛 눈동자 앞에 나는 결국 둘러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암흑성’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시는 게 있습니까?”
“그럼요.”
“…정말입니까?”
솔직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던 만큼, 너무나도 선뜻 나온 긍정에 당황하던 내게 사제장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라어라. 소녀는 명색이 ‘암흑 교단’의 사제장이랍니다. ‘암흑성’처럼 유명한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런 뜻이었나?
나는 실망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기야 ‘암흑성’에 대한 소문은 많으니, ‘암흑 교단’의 사제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제장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물론 라바일가와 ‘암흑성’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요. 그렇죠?”
“……!”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조부님께서 ‘검의 사도’였다는 것은 극비,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둘, 나와 조부님의 비망록을 진상받은 폐하뿐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태연하게 라바일가와 암흑성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사제장의 모습이 내게 충격과 함께 확신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당신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세나드 씨가 검의 사도였다는 것 말인가요?”
역시…! 그저 단순히 찔러보는 것이 아닌, 정확하게 가문의 비밀을 지적하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 가문 최대의 급소였으니까. 그렇게 침묵하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제장은 흥얼거리듯 말을 이어 갔다.
“세나드 씨는 사실 암흑성에 어울리는 분이 아니셨어요. 세계 정복을 하기에는 너무 강직한 분이셨거든요.”
…조부님을 만나 본 걸까. 이 아이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겨우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 법한 이런 소녀가 벌써 20년도 전에 돌아가신 조부님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그리고 나의 본능적인 직감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어라어라. 묻고 싶은 게 그거셨나요? 소녀가 보기에는 좀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 거 같은데요.”
사제장의 냉정한 지적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러모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사실 지금 내게는 사제장의 정체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암흑성은 대체 어째서 무너졌던 겁니까?”
그런데도…. 나는 결국 그분에 대한 것을 물을 수 없었다. 이 소녀가 정말 그분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대답이 최악의 것이라면…. 그 뒤에 찾아들 절망감을 차마 견뎌 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런 나의 나약함을 가련하게 여기듯, 혹은 이미 예상한 질문밖에 던지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듯.
분명 어린 소녀임에도, 처녀처럼 고귀하고, 부인처럼 성숙하며, 노파처럼 현명해 보이는 눈으로 사제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암흑성이 지상 최강의 조직이라고 불리며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13사도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죠. 단순한 무력만이 아니라 마력, 재력, 권력 등등 제각각의 분야에서 세계의 정점에 가까운 위치에 있던 조직의 수장을 휘하에 두고 있었기에 지상 최강의 조직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거고요.”
그것은 분명 옳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암흑성의 모든 것이 비밀임에도 13사도라는 이름만큼은 명성을 떨쳤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토록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던 암흑성은, 결국 스스로의 힘에 의해 파멸하게 되고야 말았죠.”
스스로의 힘에 의해 파멸했다고…?
사제장의 말을 들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암흑성이 지니고 있던 가장 강대한 스스로마저 파멸시켰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암흑성의 파멸이, 단지 신의 저주라고만 알려진 것은 대체 어째서였을까. 그 해답을 찾아낸 순간, 나는 무심코 탄성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설마…!”
“맞아요. 암흑성은 바로 13사도의 배반으로 무너졌어요.”
영웅&마왕&악당 [6권]
지은이 무영자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펴낸곳 (주)코핀 커뮤니케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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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0769-55-6 [0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