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41)
139악당의 담론
…대체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다냐.
여관에서 짐을 싸매며 나는 묵직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츄리온 상인들에게 여신 역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들었을 때, 나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절하려고 했다.
당장 짐 싸 들고 도망쳐도 부족한 처지에 대놓고 축제에 참가해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완전히 ‘나 잡아갑쇼―’라고 해 대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으니까.
“좋아요.”
문제는, 사제장의 그 한 마디였다.
축제라면 세끼 밥보다 더 좋아하는 사제장이다. 그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만큼,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에는 그저 묵직한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께서도 도와주실 거예요. 그렇죠?”
…아니, 별로 그럴 생각 없는데 말입니다.
내심으로는 무조건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사제장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그 후환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게 빤했으니까. 아무리 먼 뒤의 적이 걱정된다고 해서 당장 코앞의 아군을 적으로 돌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그 뒤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왠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보는 계집애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이 싱글거리는 사제장과 바보 자식과 함께 츄리온 상인들을 따라간 후, 나는 곧장 여관방으로 돌아와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챙겨 놓았다.
이제 종적을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행사가 끝나는 즉시 배를 타고 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계획은, 시작부터 크나큰 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배? 없다요.”
“축제 기간에는 무리다요.”
“축제가 끝난 뒤라면 자리가 나겠지만, 그 전에는 힘들겠소.”
…이런 망할.
하나같이 축제 구경을 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절대 불가를 외치는 놈들을 보며, 나는 그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나라도 축제 후 돌아갈 여행객을 노리지, 지금 떠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덕분에 축제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츄리오넬에 발이 묶이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육지와 땅을 오가는 짧은 배편이야 있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시 육로로 돌아가느니 며칠 기다리더라도 배로 이동하는 게 나았다. 가다가 졸도하는 짓은 한 번으로 족했으니까.
에라, 나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야말로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항구를 벗어나가게 몇 군데 돌아다녔다.
이참에 보약이나 좀 지어 먹을까….
여행용 식량이나 기름 등을 보충한 뒤, 남아 있는 여유 자금과 시간 등등을 고려하며 인적 드문 지름길로 약재상으로 향하던 중, 문뜩 옆에 있던 외딴 골목에서 흘러나온 음침한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흐흐흐. 이제 그만 포기하라요.”
“그렇다요. 더 이상은 도망칠 길이 없다요.”
…뭐냐. 이 대사와 말투의 괴리감은?
웃기지도 않는 츄리온 민족 특유의 방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분위기에 무심코 골목길 사이로 고개를 내밀기 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자고로 숙련된 악당이란 결코 위험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법!
이런 낯선 일에 끼어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설령 참견하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살인멸구를 원하는 놈들이 있다면 몰래 보고 있기만 해도 사건 사고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튀자!
그렇게 즉각적으로 결심을 굳히고 나는 골목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기 위한 그야말로 애처로운 노력이었다.
“헉?! 이, 이 아가씨가 왜 이런다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라요!”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요! 전 재산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요!”
“으음… 뭔가 지병이 있나 보다요. 일단 약술사에게 데려가 보자요.”
“알겠다요. 서두르자요.”
난 상관없다. 난 상관없다. 난 상관없다.
뒤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란에, 나는 걷는 속도를 배가시켰다.
뛰어가면 도망치는 걸로 오해받고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릴 수 있다.
어디까지나 뛰지 말고, 전력을 다해 걷는 거다!
“거, 거기. 여기 좀 도와 달라요!”
어허.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귀가 잘 안 들리네.
“급한 환자가 있는데 우리 둘이서 옮기기는 무리다요. 제발 손 좀 거들어 달라요!”
어이구, 허리야. 이 나이가 되니 역시 뭘 짊어지고 다니기에도 무리라니까.
“도와만 주면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요!”
…호오?
츄리온 상인들의 필사적인 외침을 한 귀로 흘리던 나는 일순간 걸음을 멈췄다.
마침 보약 지어 먹을 돈이 아슬아슬하던 참이고, 어차피 약술사나 한번 찾아가려던 중이다. 이왕 가는 바에 누구 한 명 짊어지고 가는 것쯤이야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니….
불분명한 위험도와 확실한 보상, 그 사이에서 갈등하던 끝에, 나는 츄리온 상인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옮겨만 주면 되오?”
“그, 그렇다요.”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요. 이대로 저 아가씨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라요!”
흐음, 흐음. 그래. 환자를 옮기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두 상인의 대답을 듣고 고민하길 잠시, 계산을 끝낸 나는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내일 곧바로 츄리오넬을 떠날 수 있는 배편과 100첼을 주겠다면 도와주겠소.”
“우에에엑?!”
“마, 말도 안 된다요!!”
터무니없는 폭리를 요구하는 나의 만행. 두 츄리온 상인은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지만 나는 결코 말을 물리지 않았다.
“급한 환자라면 일분일초가 위급한 상태일 텐데,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가 환자가 죽게 되는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 않소?”
“그건….”
“으으으….”
돈을 위해서라면 영혼까지 판다는 츄리온 민족, 하지만 사실 그 율법은 상당히 엄격하다. 사기에 가까운 장사는 괜찮아도 범죄에 가까운 사기는 안 된다거나 특히 인명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법 못지않게 철저한 규제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츄리오넬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면? 남은 평생 장사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위험에 비하면 고작 배편 하나에 100첼쯤이야 푼돈이지. 암, 그렇고말고.
당장 내게 100첼을 주고 도움을 받을지, 아니면 약술사를 직접 불러오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두 츄리온 상인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조, 좋다요. 대신 환자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요.”
“그리고 무사해야 한다요.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1첼도 없다요.”
“좋소.”
으흐흐흐. 이게 웬 횡재냐.
배편을 이렇게 쉽게 구한 데다, 뜻밖의 부수입까지 얻은 것에 희희낙락하며 두 상인과 함께 외딴 골목길로 돌아온 나는 안쪽의 상황을 보고 내심 혀를 찼다. 한쪽 벽이 가로막혀 있는 막다른 길, 그 끝에 기대듯 쓰러져 있는 한 인물의 모습이 나에게 혀를 차게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아, 아니. 우린 그저 아르바이트를 좀 제의하려고 했을 뿐이다요.”
“상인회에서 눈에 띄는 미인이 있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데려오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어쩔 수 없었다요.”
…결국 그놈의 여신제냐?
하여튼 별문제를 다 일으키는 그놈의 축제에 내심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나는 일단 환자의 후드를 벗겨 보았다.
흐음. 확실히 얼굴은 제법 반반하군. 나이는 대략 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내리 감긴 채 파르르 떨리고 있는 긴 속눈썹, 단정하게 정리돼 있는 갈색 단발머리, 병색이 완연한 얼굴과 심약해 보이는 인상, 가늘다 못해 유약해 보이는 얼굴선, 거기에 키에 비해 마른 체구까지, 약골 계집의 외모는 분명히 여신제에 여신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후드를 벗긴 것은 고작 미모나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뭘 하고 있다요? 빨리 옮겨 달라요!”
뒤에서 소리치는 두 츄리온 상인을 무시하며 나는 약골 계집의 손목을 가볍게 쥐어 봤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200첼을 준다면 이 자리에서 환자를 치료해 주겠소. 어떻소?”
“엑? 당신 약술사다요?”
츄리온 상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비록 삼류기는 해도 약술사로 행세할 수 있을 정도의 의술은 익히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00첼은 너무하다요!”
“이대로 무리하게 환자를 옮기거나 시간을 끌면 환자의 상태가 언제 급변할지 모르오. 그래도 그냥 옮겨도 되겠소?”
“그, 그건….”
협박이나 다름없는 내 말에 두 츄리온 상인은 어떻게든 값을 깎으려 했다. 하지만 ‘악마의 황금률’을 습득하고 있는 데다,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내게는,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하여 울상을 짓는 두 상인을 상대로 폭리에 가까운 이득을 얻어 낸 후, 나는 희희낙락한 심정을 애써 숨기며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표정으로 짐에서 꺼낸 약을 약골 계집에게 먹였다.
“이제 곧 정신을 차릴 거요.”
“…끝이다요?”
“고작 약 하나로?”
두 츄리온 상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빈혈을 치료하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200첼이라는 수입에 내가 만족스럽게 웃고, 두 츄리온 상인이 어째 존경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운데 한 줄기 가느다란 신음이 들려왔다.
“으음….”
흐음. 생각보다 약효가 빨리 도는군.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몸을 뒤척이는 약골 계집을 나는 힐끔 살폈다.
이제 와서 또다시 쓰러지기라도 했다가는 200첼이 날아갈 수도 있는 만큼, 조금은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약골 계집의 눈꺼풀이 열리며 심연과도 같은 검푸른 눈동자가 드러난 순간.
촤아악!
나는 목이 날아갈 뻔했다.
…엥?
나풀거리는 옷자락을 망연히 보길 잠시,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한 자루 단검을 쥔 채 창백한 얼굴로 손을 바들바들 떠는 약골 계집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좀 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지 않았다면 지금 잘린 것은 옷자락이 아니라, 내 모가지였으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죽을 뻔했다 이건가?
허. 어허허허허허.
“흐엑?”
“뭐, 뭔 일이다요?”
뒤늦게서야 상황을 깨달은 듯, 상인들의 호들갑을 한 귀로 흘리길 잠시, 허탈한 심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겨우겨우 눈에 초점을 되찾고 약골 계집을 바라보았다.
좌우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당장 도망치려는 듯 벽에 바짝 붙어 있는 몸.
그리고 빈혈기로 인해 창백한 안색 위로 겁먹은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얼굴까지. 그 모든 것을 찬찬히 살펴본 끝에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해칠 생각은 없으니 진정하시오.”
흠칫!
겁먹은 토끼에게 말을 거는 기분이랄까. 단검만이 생명줄이라는 듯 꼬옥 움켜쥔 채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약골 계집은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힐끔힐끔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나의 뒤, 특히 두 츄리온 상인에게 이르러 특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다짜고짜 쫓아오는 두 남자를 피해 골목길에 몰렸다가 빈혈로 졸도까지 했으니, 이렇게 겁먹고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환자가 불안해하고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겠소?”
“아, 알았다요.”
“뒷일을 부탁하겠다요.”
자기들이 잘못한 걸 알기는 아는지 허겁지겁 물러난 츄리온 상인들을 뒤로하고, 약골 계집과 단둘이 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두 상인이 물러난 것을 안심한 듯하지만, 여전히 단검을 움켜쥐고 있는 약골 계집의 모습이, 나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것도 그냥 평범한 여행자는 아니다. 밑에 가죽 갑옷을 받쳐 입고 있는 데다, 아무리 겁먹은 상태라지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검을 휘두른 것만 해도 어지간히 혹독한 단련을 거친 검사나,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용병이나 가능한 일이다.
아마 십중팔구는 녀석과 같은 어느 검가의 후예라든가, 칼잡이 모험가쯤 될 터. 그것을 짐작했기에 나는 힘으로 제압하는 대신, 말로 상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방금 쓰러졌던 일은 기억나시오?”
…끄덕.
후우. 다행이군.
잠시 망설이던 약골 계집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일단 대화할 의지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시키든 말든, 일단은 상대와 대화와 통해야 가능한 일이니까.
“평소부터 빈혈이 있었던 데다가, 피로가 덧쌓여서 잠깐 의식을 잃고 있었을 뿐이오. 특별히 손대거나 한 것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소.”
내가 차분하게 상태를 설명해 주자.
약골 계집은 골목 바깥쪽과 나를 번갈아 보며 한참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내 말을 믿을지 말지, 나를 제치고 도망쳐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모습에 나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겁이 많아서 그런가?
아니, 이건 겁이 많다기보다는 그냥 소심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가고 싶다면 그냥 가 봐도 좋소.”
더 이상 말이 안 통하겠다 싶자, 나는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약골 계집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치료야 거의 끝났으니, 그냥 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 주된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비켜났음에도 약골 계집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의심과 혼란이 뒤섞인 눈으로 한참 동안 나를 보다가 입을 열 뿐이었다.
“…이 …요?”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
약골 계집이 한참의 머뭇거림 끝에 토해 낸 우물거림이나 다름없는 말소리를 듣고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워낙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이건 겁이 많은 게 아니라 성격 자체가 내성적이라 그런 거로군. 이 정도면 거의 대인기피증 수준이다.
그런데도 단검은 꽉 쥐고 있는 게 기막혔지만.
어쨌든 그 단검 때문에라도 나는 쉽사리 그녀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겁이 많은 성격일수록,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다시 한번 말해 주겠소?”
“당신이… 나를 도와준… 건가요…?
그야말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 말을 들은 나는 내심 혀를 찼다. 고작 그런 걸 물어보려고 시간을 끌다니, 한마디 따지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았지만, 아예 상대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던 만큼, 대충 대답해 주었다.
“그렇소.”
“…왜, 나를 도와준… 거죠?”
그야 돈을 받았으니까 그렇지.
간단히 대답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꿨다. 이토록 겁먹고도 흥분해 있는 상태의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약골 계집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발작적으로 칼을 휘둘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대는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도와줄 수 있었소. 단지 그뿐이오.”
“…단지, 그게… 전부인가요?”
“그 외에 다른 게 필요하오?”
약골 계집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지만 나는 얼굴에 철면을 두드려 붙인 채 한 점의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숙련된 악당은 그 어떤 연기라도 완벽하게 펼칠 수 있어야 하는 법! 그리고 황동의 왕좌를 습득하고 있는 내게 철면피를 유지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 나를 의미 모를 눈으로 보다가 약골 계집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이어 왔다.
“당신은… 아무에게나, 그런 친절을… 베푸나요?”
내가 정신이 나갔냐, 돈도 안 받고 공짜로 아무나 치료해 주게?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약골 계집의 행동에 슬슬 짜증을 느낀 나는 단호하게 그 말을 끊었다.
“그렇지는 않소.”
“…그럼 …만약 내가 또 위험에 처한다면… 당신은 구해 줄… 건가요?”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물론이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미쳤다고 자선사업이나 하겠냐?
내심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약골 계집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오지랖 넓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선량하지만은 않은 작자를 흉내 낼 필요가 있었으니까.
“의식이 다시 혼미해지면 이 약을 드시오. 가까운 데 신관이 있다면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지만, 아니라면 적어도 며칠간은 요양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하는 편이 좋소.”
이제는 어느 정도 경계가 풀린 듯, 단검을 살짝 내려 든 약골 계집에게 나는 약이 든 주머니를 천천히 내밀었다. 물론 단검을 휘두를 경우 곧장 피해 낼 수 있는 준비를 단단하게 해 놓은 상태로 말이다. 망설이듯 나와 약 주머니를 돌아보길 한참, 약골 계집이 결국 약을 받아 들자 나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어차피 또다시 쓰러질 거 같지도 않고 칼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팔팔해진 것을 두 상인도 똑똑히 목격한 만큼, 치료비를 뜯어내는 데는 문제 없었으니까.
아니, 솔직히 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그냥 도망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었다. 어쨌든 돈도 벌었겠다, 이대로 보약이나 지어 먹고 돌아가면 끝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소?”
물러나려는 나의 움직임에 맞춰 자리에 일어나 뒤를 따라오던 약골 계집은 내 질문에 우뚝 멈춰 선 채 뭔가를 머뭇거렸다. 그것도 아직 단검을 쥔 채 말이다. 그 단검 때문에라도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다음 순간 떨떠름해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 …워요.”
아니, 그건 보통 단검으로 상대를 겨누면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떨떠름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심정이었지만 나는 일단 겉으로나마 침착한 태도를 지켰다. 뭐, 어쨌든 내가 치료해 준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약골 계집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치명적인 황당함으로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 당신을 따라가도… 될까요?”
…뭐라고라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