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43)
141마왕의 이변
하아….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람.
고작 반나절 전부터 준비한 것치고는 파격적으로 완벽하게 공연을 끝마쳤음에도 나는 도통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없었다. 이 새하얀 드레스가 너무너무 싫었으니까.
왜 하필 내가 겨울의 여신 역할 따위를 해야 하는 거지?
애초부터 신이라는 것 모두 마음에 안 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신을 꼽으라면 당연히 겨울의 여신인 나로서는 당장이라도 이 드레스를 불태우고 싶었다.
하지만 세레나도 잘 참고 있는 마당에 그런 짓을 할 수야 없는 일, 때문에 거북한 마음을 애써 참았지만, 공연이 끝나자마자 나는 다시 속이 뒤집히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은 저랑 같이 가실 거예요!”
“왜 당신을 따라가야 한다는 건데?”
“그야 제 스승님이시니까요!”
“크리스 사제님. 억지 부리지 마시죠.”
“싫어요! 얼마나 오랜만에 만난 스승님인데요!”
…이 바보 인간이 정말,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명색이 암흑 교단의 사제씩이나 되는 인물이 봄의 여신 드레스를 입는 것으로도 부족해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것을 보며 나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거기까지만 해도 문제는 없었다. 바보 인간의 행동은 떼쓰는 것에 지나지 않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억지였으니까.
정작 큰 문제는, 바보 인간을 달래던 세레나의 느닷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저랑 같이 가셔야 하거든요.”
그래, 그는 세레나랑 같이…. … 잠깐만, 뭐라고?
넋을 잃고 멍하니 세레나를 보길 잠시, 나는 잠시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세레나. 그 결정은 또 누구 마음대로 내린 건데?”
“아직 그분에게 허락을 구하지는 못했으니, 제 일방적인 바람이기는 하지요. 뭔가 문제가 될까요?”
하아?
스스로도 억지를 부린다는 건 아는지 세레나는 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코 말을 번복하거나 뒤바꾸지는 않았다. 그 푸른 눈동자를 통해 그녀가 반드시 그와 동행하기로 결심했음을 깨달고 나는 이성의 끈이 뚝 끊기는 것을 느끼며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한테 같이 가자고 해도 별로 문제 될 건 없겠네.”
“글쎄요. 그건 모르겠군요.”
나 또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을 느낀 듯, 세레나는 그 푸르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마주 보던 우리 사이로 잠시 존재를 잊고 있던 존재가 끼어든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스승님은 저랑 같이 가실 거라니까요!”
“…….”
“…….”
나와 세레나는 잠시 시선을 돌려 바보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렇게 떼쓸 나이는 이미 예전에 지나지 않았어?”
“그건 지금 아리스 스스로 어리다고 인정하시는 건가요?”
“저, 저랑 같이 가실 거라니까요. 네? 제 말도 좀 들어 주세요!”
어차피 바보 인간 따위는 경계할 필요 없다. 경계해야 할 적은 서로뿐이라는 판단 아래, 우리는 계속해서 신경전을 벌였다.
어쩌다가 이런 떼쓰기에 휘말려 들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사소하고 유치하더라도 그것이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 하나 양보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서로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정말 위험하고도 교활한 여우가 뒤에서 몰래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게 해 준 것은, 우리에게 무시당한 나머지 시무룩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바보 인간의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 늦으시네요.”
“…그건.”
“그렇군요.”
공연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그가 아직 안 보이는 것을 깨닫고, 세레나와 나는 미심쩍은 느낌을 받았다. 왠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놓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대기실 안에 있어야 할 다섯 명. 그중 남은 것은, 우리 셋뿐이라는 것을.
“…당신네 사제장은 어디 갔는데?”
“아까 전에 잠깐 할 일이 있다면서 나가셨는데요. 생각해 보니 돌아오실 때가 지나신 거 같은데.”
바보 인간이 아무 의심도 없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 말에, 나와 세레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을뿐더러 그런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당연히 이어질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하는 바보 인간의 둔감함이 너무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들어왔다. 죽음의 여신 역을 맡고 있던 황색 단발머리에 창백한 얼굴의 여자애는 우리의 시선을 받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마치 우리에게 겁을 먹은 듯, 바짝 긴장한 그녀의 모습을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저 여자애도 그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물론 오늘에서야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된 여자애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 나름, 쓰러져 있는 걸 치료까지 해 준 것이 고마워서 은혜를 갚겠다며 쫓아온 사정까지 들은 만큼, 나로서는 경계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니까.
그렇지 않아도 골치가 아픈데 그사이에 또 한 명을 꼬셔 낸 그에게 내가 원망을 무럭무럭 피워 내고 있는 사이, 세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실례지만, 혹시 밤의 여신 역을 맡은 아이와 저희 일행분을 보지 못하셨나요?”
“…….”
누굴 말하는 건지 이해 못 한 것일까, 아니면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러서일까.
여자애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를 기묘한 눈으로 세레나를 보았을 뿐. 그 침묵을 참다못한 나는 재차 물었다.
“당신이 따라온 백발 머리의 사내랑 여우 같은 계집애 말이야. 보지 못했어?”
내 질문을 들은 뒤에야 여자애는 세레나에게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검푸른 눈동자에 담겨 있는 왠지 실망스러운, 혹은 화가 난 듯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나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아까, 같이 갔어요….”
…그냥 기분 탓일까?
그제야 우리가 찾는 것이 누군지 알아들은 듯, 고개를 푹 숙인 여자애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한 대답을 듣고 나는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이 여자애보다는, 그 여우 계집애에 대한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나와 같은 확신을 얻은 세레나와 서로 시선을 교차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당했군요.”
“…응.”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정말…!
늑대와 고양이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거북이를 방패 삼아 날름 먹잇감만 데리고 날라 버린 불여우의 행동에 나는 내심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우리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퍼레이드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고 서둘러 찾아온 츄리온 상인들에게 사제장은 먼저 떠났다는 얘기까지 들은 이상, 이제 와서 벌어진 결과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우우…. 스승님이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럼 이따 봐.”
“예. 혹시라도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홀로 버림받았다는 듯, 훌쩍거리는 크리스 사제를 뒤로한 채 우리는 각각 준비돼 있던 곤돌라에 나눠 탔다. 그리고 화려한 퍼레이드용의 배를 따라 차례대로 수로로 흩어졌다. 그렇게 수로를 따라 움직이는 곤돌라 위에서 뺨을 스치는 싸늘한 겨울바람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듯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한 거리, 그 사이에서 잔잔하게 흐르며 밤하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듯이 어둡게 물결치는 수로를 바라보며 나는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아름답기로 치자면 이보다 더욱 뛰어난 경치는 여럿 있었다.
하지만 단지 아름다움을 떠나 사람들의 활력과 웃음소리가 묻어나는, 그래서 오히려 시끄럽게까지 느껴지지만, 그것이 기분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유쾌해서 함께 어울리고만 싶어지는 묘한 마력이 이 도시에는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 화려하고도 따스한 경치 속에서 여신의 복장을 한 내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들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겨울의 여신 역할은 여전히 싫었다. 하지만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왔던 내게 이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활기찬 광경은 얼어 있던 마음 위에도, 한 줄기 따스한 불꽃을 피워 내게 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던 그 아늑한 온기는 등줄기를 스쳐 지나간 오싹한 한기에 의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무슨…?!
맑고도 투명하게 밤하늘을 비치고 있던 수면, 거기에 비치고 있는 뒤에서부터 서서히 뻗어 오는 손을 발견하고, 나는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당혹감과는 별개로 전쟁터에서 갈고닦여진 본능은, 이미 반사적으로 마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우웅!
두터운 마력 장벽을 일으키고 그대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은밀하게 손을 뻗어 오던 도중, 마력 장벽에 의해 튕겨 나듯 밀려난 사공을 얼음처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지?”
위험해 보여서 붙잡아 주려고 했다든가, 그딴 변명은 아예 들을 생각도 없었다.
그 손을 본 순간 내가 느낀 감각은 사공에게 단 한 점의 호의도 없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치잇!”
첨벙!
사공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아쉽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차 보이고는 그대로 곤돌라를 박차고 물에 뛰어들 뿐이었다.
흔들리는 곤돌라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미처 사공을 저지 못 한 나는 몸을 굳혔다.
단순히 싸늘한 겨울바람의 한기와는 달리, 얼음 조각으로 등을 훑어 내리는 듯한 느낌. 전쟁터 한복판에서나 느껴 본 적 있는 그 오싹한 감각에 따라,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주문을 영창했다.
“세이너스여, 그대의 바람으로 나를 감싸 올리라!”
휘우웅―!
주변의 이목조차 무시하고 부유 주문을 영창해 바람으로 내 몸을 띄워 올린 순간, 흔들리던 곤돌라가 벌컥 뒤집혀 버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물에 빠졌을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허공이라고 안전하기만 한 장소는 아니었다.
투두둥!
수로 주변 건물의 지붕에서 쏟아진 화살이 마력 장벽에 우수수 튕겨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따위 화살로 흔들릴 만큼, 마력 장벽은 약하지 않다. 하지만 화살이 날아든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철저한 계획된 습격인 증거였다.
더구나 습격자들의 ‘준비’는, 내 예상 이상으로 철저했다.
파앗!
투망까지…?!
투창에 묶인 채 펼쳐져 날아온 쇠 그물에 마력 장벽째로 붙잡히고만 나는 내심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단지 어부들이 쓰는 어망이 아닌 전쟁터에서나 쓰이는 전투용 투망이라니…!
이자들, 전쟁이라도 치를 셈인가?
바람의 칼날을 불러내 그물을 끊어 내며 나는 한쪽 지붕을 향해 전력을 다해 날아갔다. 아무리 나라도 부유 주문에 마력 장벽까지 유지하며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투망을 막는 것은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마법이란 순간적인 폭발력을 지닌 힘, 장기전보다는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고 적을 끌어들여서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마법사의 전투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넓은 건물의 옥상에서 내려선 채 나는 마력 장벽을 더욱 두텁게 쌓아 올렸다.
여기라면 상대도 일방적으로 숨어서 화살을 쏘지만은 못할 터.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것이 내가 상황을 뒤엎을 기회였다.
하지만 적들의 공격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지?
이대로 포위망을 유지한 채 장기전으로 몰고 가려는 건가?
적들의 속셈을 파악하는 한편, 각 경우에 대한 대응책을 짜내기 위해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던 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기습적인 공격 대신, 계단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고 있는 한 중년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등에 한 자루 검을 짊어진 채,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중년인의 모습은 결코 우연히 나타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런 지붕 위에 나타났다는 데서부터 우연과는 거리가 까마득히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중년인이 토해 낸 말은 그런 나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오랜만이로군. 마왕!”
오랜만…이라고?
맹수처럼 흰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는 중년인을 보며 나는 무심코 얼굴을 굳혔다. 내 정체를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레닌에게 발각됐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고 황제도 나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에도 만난 적 있다는 듯한 그 태도가, 그리고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나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당신… 누구지?”
“큭! 크하하핫. 그래, 내가 누군지 몰라보는 것도 아니겠지.”
무엇이 그리도 웃긴 것일까, 미칠 듯한 폭소를 터트리고 중년인은 등에 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긴장감을 곤두세웠지만, 중년인은 공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듯, 천천히 검을 뽑아 들 뿐이었다.
하지만 중년인의 검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피 웅덩이에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불길한 핏빛 광채로 번뜩이고 있는 검.
과거에 두 눈 똑똑히 본 기억이 있는, 그리고 절대 착각할 수 없는 그 핏빛 검이 내게 충격을 주고 있었다.
“‘핏빛 달의 비명’!”
본래 27대 명검 중 하위권에 있었으나, 신화시대 이래 최강의 검사라는 광검자에 의해 천 명의 피를 머금고 저주를 품게 됨으로써, 그 전까지의 순위를 뒤집고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게 된 절세의 흉검.
그리고 광검자의 사후, 광풍의 혈전에서 살아남은 여섯 생존자의 손에 들어감으로써 그들이 지닌 호칭의 근원이 되었던 상징.
“그렇다면 당신은, 설마…?”
“그렇다! 마왕이여. 나야말로 광풍의 혈전 최후의 생존자.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적월의 기사’다!”
나에 의해 쓰러졌던 적월의 육 기사. 그중에서도 내가 미처 죽이지 못했던 마지막 기사를 자처하는 중년인을 나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대륙 제일의 용병으로 꼽히던 적월의 육 기사는 어느 왕국의 의뢰를 받고 전장을 나섰다.
그들은 휘하의 용병단을 미끼로 삼아 나와 ‘로드 오브 킹덤’의 병력을 분리했고, 인해전술을 바탕으로 내 마력을 소진한 뒤, 여섯이 함께 나를 합공해 왔다. 비록 나이가 들어 노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절정에 근접한 일류 검사였다.
더구나 한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오며 숱한 전투 경험을 쌓아 온 그들 여섯의 합격은 설사 검자라 해도 위협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무엇보다 마력 장벽조차도 종잇장처럼 베어 낼 수 있는 흉검, ‘핏빛 달의 비명’ 때문에 나는 몇 차례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고, 긴 혈투 끝에 가까스로 그들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단 한 명, ‘핏빛 달의 비명’을 지니고 있던 한 명의 기사만큼은 놓치고야 말았다.
‘핏빛 달의 비명’이 지닌 마력이 내 마법에 담긴 위력을 반감시켰기에, 거기에 과도한 마력의 소진과 부상, 무엇보다 각성으로 이성을 잃었던 탓에 쓰러진 기사의 피를 탐하는 데 바빴던 탓이다.
그렇게 내 앞에서 도망친 이후, 마지막 적월의 기사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세비트를 풀어서조차 그 흔적을 찾지 못했기에 나는 그가 마법에 당한 후유증으로 인해 외딴곳에서 홀로 죽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 마지막 적월의 기사를 자처하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40년 전 광풍의 혈전을 겪고 살아남은 만큼, 적월의 기사의 나이는 60이 넘은 지 오래,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들의 합공을 받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중년인의 말을 단순한 헛소리라 치부할 수 없었다.
중년인이 적월의 기사와 닮아서만은 아니었다. 그 광기 어린 눈빛이, 그 짐승처럼 사나운 미소가, 그 눈에 어려 있는 깊은 한과 증오가 내 기억 속의 적월의 기사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으니까.
“…당신,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큭큭큭, 모든 게 네 덕분이지. 마왕.”
내 덕분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망연히 서 있는 나를 향해 적월의 기사는 즐겁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너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후, 나는 정처 없이 어둠을 헤맸다. 그 고통, 그 고독, 그 공포, 그 절망. 모든 것이 나의 정신을 좀먹었고, 나를 미치게 했다. 오직 ‘핏빛 달의 비명’만을 움켜쥔 채 악몽과 지옥 속을 헤매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끝없는 광기의 나락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그’…라고?
적월의 기사의 말속에서 언급된 그 호칭에 나는 문뜩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라는 호칭을 언급할 때, 적월의 기사의 눈을 스쳐 지나간 신의 대하는 것과 같은 경외와 악마를 언급하는 듯한 공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친 폭풍의 광검자에게조차 살아남았고, 나의 손에서조차 벗어난 적월의 기사에게, 저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 그것만 해도 내게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말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절대적인 악의 힘을 나눠 주었다.”
순간 나는 숨을 죽였다.
절대적인 악의 힘, 대체 무엇을 설명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그저 광인의 헛소리와도 같은 소리였지만, 이토록 젊어진 적월의 기사의 모습은, 그리고 황제에게서 들었던 그 이야기는 나에게 무심코 하나의 기보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눠 받음으로써 나의 노쇠해졌던 육신은 젊음을 되찾았고, 허물어 가던 정신은 활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너무나 거대하고도 강대한 악 속에서, 나는 마침내 광기를 넘어 심마를 깨우쳤다. 아니, 심마를 마침내 정복하여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적월의 기사의 말에 나는 신음을 삼켰다. 나는 검에 대해 자세하게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적월의 기사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만큼,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너에게 감사한다, 마왕이여. 비록 적월의 육 기사를 파멸시켰을지언정, 나를 적검자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 너에게 말이다! 아하하하하핫!”
스스로를 적검자라 칭하는 중년인, 나는 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설마 마지막 적월의 기사가 사라진 데에 그런 배경이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가 정말 《악의 서》의 힘을 얻어 심마지경을 극복하고 적검자가 되었다면 황제가 말한 것처럼 《악의 서》가 실존하며 그 안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더구나 이미 누군가 《악의 서》를 소유하고 그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충격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단지 한 줄기 의문이, 의심이, 그리고 경계심과 당혹감이 빈자리를 채웠을 뿐.
“그래서… 날 찾아온 건가? 과거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로드 오브 킹덤’이 건재할 때는 세력 때문에 감히 복수를 못 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내가 살아남았음을 알고 복수하기 위해 찾아왔다면 납득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질문에, 적검자는 그저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큭, 큭큭큭. 아니, 아니. 말하지 않았나. 과거의 일에 대해서라면 오히려 감사를 하고 있다고. 고작 복수 따위를 위해 이렇게 네 앞에 나타날 정도로, 나는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야.”
히죽 웃어 보이는 적검자를 보며 나는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거짓말을 하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난리까지 만들며 나를 공격해 온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럼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응? 그야 당연하지 않나.”
터무니없이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 히죽 웃어 보인 적검자는 입꼬리를 비틀며 살벌한 미소를 머금었다.
“필요하니까.”
“…고작 그것 때문에 츄리오넬에서 이런 난리를 피웠다고?”
“물론. 우리 같은 악당에게 그 이상의 이유 따위가, 존재할 것 같으냐?”
이자… 제정신인가?
스스로 악당을 자처하며 태연하게 웃어 보이는 적검자를 보며 나는 내심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 나와 싸웠을 때까지만 해도 이자에게는 기사라 불릴 만한 위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적검자에게 남은 것은 일그러진 욕망과 광기, 그리고 깊고도 짙은 악의뿐이었다. 이것은 심마지경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악의 서》의 힘을 나눠 받은 덕분일까?
“알겠나? 나 같은 악당은 말이지, 필요 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 법이란 말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이야기를 늘어놔서 시간을 끄는 것처럼 말이지!”
넋을 잃고 적검자를 바라보던 중, 나는 문뜩 온몸의 긴장감을 곤두세웠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사방에서부터 폭발하듯 터져 나온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력… 마법사까지 있었던 건가?!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퍼지는 마력을 감지하고 나서야 다른 지붕 위에서 주문을 외우며 각각의 봉인구로부터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마법사들을 발견한 나는 신음을 흘렸다.
적검자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경계를 소홀히 한 실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혼탁하고 음습한 마력이, 그리고 각각의 마력이 연계되어 나를 중심으로 지붕 위에 새겨 넣는 거대한 마법진이, 내게 충격을 느끼게 했다.
이 혼탁한 마력이나, 마법진의 사용은 마법에서도 금기시된 흑마법의 방법.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흑마법이 내게 너무나 낯익고, 그 이상으로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봉마의 사슬!”
마법진 안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은 사슬의 형상을 한 마력 덩어리에 의해 주변에 두르고 있던 마력 장벽이 뭉개지고, 심지어 마력마저 속박된 것을 느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마력과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마족에게 마력 자체를 봉쇄하는 봉마의 사슬은 그야말로 천적이자 상극의 흑마법이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데몬 소울의 수장이었던 ‘38녹수를 흘리는 자’ 레벤트스가 죽은 이후, 봉마의 사슬은 완전히 실전되었다.
아니, 내 손으로 철저하게 절전했다. 그런데도 완벽하게 재현된 봉마의 사슬을, 그리고 옛날에 모두 죽어 사라진 다크 스톰의 마법사들의 모습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그리 놀라나. 내가 설마 아무런 준비도 없이 너를 상대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했나? 72주문의 마왕. 아니….”
마법진의 압력과 흩어지는 마력 속에 부르르 몸을 떠는 나를 향해 적검자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겁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아리트리스 D. S. 과거에 사멸한 악의 조직 ‘데몬 소울(Demon Soul)’이 ‘다크 스톰(Dark Storm)’의 유산을 이어 완성해 낸 궁극의 생체 병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