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44)
142영웅의 이변
“우우…. 스승님이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그럼 이따 봐.”
“예. 혹시라도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끝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곤돌라에 올라타는 아리스를 향해, 나는 내심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억지를 부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억지를 부리고라도 내게는 그분과 곤돌라를 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축제용의 곤돌라는 여신 외에는 사공 한 사람밖에 타지 않는다.
더구나 퍼레이드를 위해 수로가 통제되고 다른 곤돌라와도 거리를 두고 움직이기에 곤돌라에서는 무슨 대화를 나눈다 해도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할 것이다.
즉, 그분께 사공이 되어 주신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분과 독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제장이 한발 앞서, 그분과 곤돌라를 타고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복잡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사제장이 그분과 함께 행동한 데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마음속에 복잡하게 얽혀 들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심정을 애써 숨기며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아리스와 아직도 울상을 짓고 있는 크리스 사제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곤돌라에 올라타려던 나는 문뜩 걸음을 멈췄다.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일까, 길에 쓰러져 있던 것을 그분께서 치료해서 어쩌다 데려오게 됐다는 소녀의 얼굴은 너무 창백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 파리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녀를 나약하다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 창백한 얼굴과 마르고 가녀린 몸이 의외로 단련돼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다니기에는 좀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처음 본 복장은 분명 모험가의 것. 대륙을 떠돌며 온갖 경험을 겪어 온 만큼 내게 소녀처럼 어린 모험가는 그다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의외인 것이 있다면, 그녀의 묘한 시선이었다.
무언가에 겁먹은 듯도 싶고, 어떤 것이 불안한 듯싶기도 한, 거기에 날카로운 경계심까지 뒤섞인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빛 너머에 깊숙이 잠들어 있는 한 줄기 적의가,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물론 만나자마자 적의를 보이는 이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드물지 않았다.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본 모험가라면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녀에게 느껴지는 슬픔과도 같고 분노와도 같은 그 감정은 나에게 묘한 심정을 느끼게 했다. 나를 뚫어지게 보던 소녀가 곤돌라에 올라타, 앞서 떠나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마지막으로 곤돌라에 올라타서, 상념에 잠겨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나는 오늘 그녀를 처음 본다.
물론 그 나이대에는 성장이 빠른 만큼, 어릴 때 봤다면 지금은 몰라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륙을 떠돌다 스치듯 만난 아이 중 하나라 생각하기에는, 그 시선이 너무 신경 쓰였다.
해답을 알지 못한 의문에 잠겨 있길 잠시, 나는 이내 그녀에 대한 상념을 접고 그분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그분과 독대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이토록 억지를 부렸던 것은 단순히 독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분의 곁에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기에, 이 복잡하고도 심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그렇다.
나는 단지 그분에게 위로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나약한 행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분의 과거를 캐내고, 그 결과에 따라서 그분에게 검을 겨눠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힘겹게 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1년이 지난다면, 그분이 병으로 수명을 다해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켜만 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좋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또 다른 의심.
정말 그분의 수명은 1년만 남은 것일까? 검게 썩은 피를 토해 보였던 그것이 혹시 나를 속이기 위한 연기는 아니었을까? 일부러 내게 검을 가르쳐 주셨던 이유는 데스 쉐도우를 무너트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분에게 있어, 나는… 그저 이용하기 좋은 도구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믿음과 진심을 잔혹하게 더럽히고 처절하게 능욕하는 듯한 어둡고 혼탁한 의심. 고문과도 같은 그 고통 속에서 헤매길 한참, 나를 강제로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코끝을 스친 하나의 강렬한 냄새였다.
이 냄새는…?
나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로에서 맡을 리 없는 냄새였으니까. 그런데도 이런 냄새가 난다는 것은…!
첨벙!
내가 그 사실에 긴장감을 곤두세울 때, 곤돌라의 사공이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에 당황하는 대신, 곧장 사공을 뒤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물속 깊이 잠수해 들어간 순간, 한 줄기 이글거리는 섬광이 텅 빈 곤돌라를 향해 쏘아져 왔다.
퍼엉-! 화르르륵!
역시… 기름이었나?
마치 수로 위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듯, 수면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름 냄새를 맡고 위험을 감지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곧장 사공을 따라 뛰어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닥친 위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쏴아아아―!
큭…!
나는 날아든 작살을 가까스로 피해 냈다. 그리고 양손에 작살을 든 채 수중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세 명의 암습자들을 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것이 단순한 사고에 불과하다면, 일단 밖으로 나가는 데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철저한 계획에 의한 기습이다. 이 정도 수단을 마련했다면 분명 물 밖에도 여러 조치를 취해 놨을 터.
물속의 암습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내게는 밖에서 활이나 석궁을 겨누고 있기만 하더라도 치명적이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단 하나, 빨리 물속의 적들부터 없애는 것뿐이었다. 물론 장식품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해도, 갑옷까지 입고 물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은 내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 작살만을 들고 있던 암습자들은, 물고기처럼 능숙하게 나를 포위해 왔다.
하지만 나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수로의 바닥에 발을 디딘 채 똑바로 검을 치켜들었을 뿐.
그리고 그 순간부터, 소리 없는 혈투가 펼쳤다.
퉁―! 투웅!
동시에 날아든 작살을 부수고, 잘라 내며 그대로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적들을 상대로 그저 걸음을 내딛는 나의 행동은 하늘을 나는 새를 맨손으로 잡으려는 짓거리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설사 하늘을 나는 새라고 할지라도 사냥을 할 때는 지상 가까이 내려와야만 한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이야말로 늑대가 새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나를 제외한 모든 작살을 소모한 두 암습자가 앞뒤에서 작살을 내찌른 순간, 나는 바위의 힘을 일으켜 폭발적으로 바닥을 걷어차며 앞으로 솟구쳤다. 내 돌격에 암습자는 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바위조차 깨부수는 힘을 추진력으로 바꿔,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나를 피해 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진 순간부터, 암습자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걱!
단 일검에 목이 베어진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암습자의 머리가 천천히 물속에 떨어지는 가운데, 검을 휘두르던 힘을 이용해 그대로 물속에서 몸을 뒤집으며 나는 두 발로 암살자의 시체를 걷어찼다.
발끝에서 뼈가 조각조각 부러지고 내장이 터져 나가는 감촉이 전해져 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암습자의 시체를 발판 삼아 뒤에서 다가오던 암습자를 향해, 다시 한번 몸을 쏘아 냈을 뿐.
푸욱!
단 일검, 그것만으로 암습자의 심장을 꿰뚫고 나는 마지막 남은 암습자에게 시선을 향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받은 마지막 암습자는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작살만을 쏘아 내고 물속 저편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작살을 간단히 받아 내기는 했지만, 내 상황 또한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단지 암습자를 쫓기 힘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교대하듯이 수중 저편으로부터 다가오는 세 명의 다른 암습자의 모습과 조금씩 벅차 오기 시작한 호흡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역시… 차륜전이 목적이었나?
수면을 불로 덮어 호흡할 기회를 차단하고 교대로 습격하며 물속에 움직임을 묶는다.
그것은 분명 어지간한 일류 검사는 물론 절정의 경지를 이룬 검자라도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오산이 있다면 두 가지.
하나는 내가 과거 대륙 동부를 여행할 때, 해적 토벌을 통해 물에서 치를 수 있는 온갖 수중전을 다 경험해 봤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나는 지상 최강의 검술인 ‘홍염의 불꽃’의 계승자라는 것이었다.
쿠웅!
암습자들이 수중 저편에서부터 다가오는 사이, 수로를 이루는 벽까지 물러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번개처럼 수면을 향해 쏘아져 나가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물은 무거운 중압감으로 내 사지를 묶어 왔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부담감마저 흡수하며 빙글 회전해 내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검, ‘홍염의 불꽃’ 제10식 ‘홍염의 바람’의 압도적인 파괴력을 수면을 향해 쏟아 냈다.
촤아아아악―!!
뼈가 욱신거리며 근육이 저릿해져 온다. 한계까지 단련된 몸이 뒤틀려 올 정도로 압도적이다 못해 끔찍한 부하는 ‘수호하는 자’ 안에 응축되고 증폭되어 폭발하듯 물 밖으로 터져 나갔다.
검력이 실린 물줄기는 수면을 뒤덮은 화염을 관통하며, 커다란 물기둥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폭포가 거꾸로 치솟는 물기둥, 그 안에 몸을 실음으로써, 나는 그렇게 불로 뒤덮여 있던 수면을 넘어 지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암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피비빙!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화살 세례는 무척이나 위협적이었지만, 미리 그 기습을 예상하고 있던 만큼 나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채재쟁!
홍련의 분화에 따라 흩뿌려진 칼날의 잔영이 화살을 우수수 튕겨 내는 가운데, 나는 길가에 있던 노점상 뒤로 몸을 숨기고, 한차례 숨을 골랐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 건가?
‘홍염의 불꽃’은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를 통합하여 만들어진 최강의 검술, 그 공격력은 분명 전무후무한 수준이다.
압도적인 공격력을 얻기 위해 방어를 어느 정도 포기했다는 것은 나도 부정할 수 없는 약점이었다.
최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와 같다 하지만 그것도 검과 검을 겨루는 근접전의 경우, 검 자체가 닿지 않는 이런 원거리에서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화살을 제대로 된 갑옷도 없이 일방적으로 막아 내는 것은, 나로서도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조직이지?
이 위급한 상황에도 나는 한 줄기 의문을 잊지 않았다.
수로를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고, 물속에서 차륜전을 벌이고, 이렇게 화살로 거리전을 벌여 오는 것까지.
지금까지 숱한 악당을 상대해 왔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나에 대해 분석하고 기습을 걸어오는 적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문뜩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
이런 미친…! 미처 보지 못했던 노점상의 구석, 그곳에는 원래 노점상의 주인이었을 한 상인의 시체 한 구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리를 살핀 끝에 여신제를 구경하던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은 채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검을 우드득 움켜쥐었다.
나 하나를 잡으려고 이런 짓을 했다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오싹한 한기가 내 척추를 지나갔다.
그래, 단지 나 하나를 노리려고. 이런 난리를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이 내가 아닌 다른 것, 혹은 다른 누군가라면…?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위급할수록 흥분은 금물, 최대한 냉정하게, 최대한 차갑게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만 했다.
시작은 궁수들부터. 나는 노점상의 장판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낸 후, 그것을 한 손에 받쳐 들고, 이미 확인해 둔 위치를 따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피비빙!
칼날과 같이 빠르고도 정확하기 그지없는 능히 일류라 할 만한 사격을 급조한 방패로 받아 내며 나는 미리 봐 뒀던 그늘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으슥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붉은 투구와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암습자를 향해,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우선 한 명…!
촤악!
단숨에 적 베어 내려던 나는, 그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베어 낸 것은 암습자가 던진 활뿐, 정작 목표했던 상대는 땅으로 몸을 굴려 목을 노린 내 검을 피해 냈기 때문이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내 쾌검을 이토록 간단히 피해 낸 대처 능력은, 그리고 거침없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은, 내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용병. 그것도 일류급…!
단순한 검사나 기사들과는 달리 용병은 싸움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물러나자마자 손도끼를 집어 던지며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는 용병의 행동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도끼를 홍광의 염화로 받아 내 용병에게 도로 튕겨 냈을 뿐.
퍼억!
“큭…!”
되돌아온 도끼에 어깨를 맞은 충격으로 용병은 튕기듯 땅에 나뒹굴었지만, 그토록 큰 부상을 입었는데도 곧장 일어나 결국 다른 건물에 숨어들었다. 나는 그런 용병을 뒤쫓아 가려 했지만 절묘한 타이밍으로 날아든 화살을 피하기 위해 옆에 있던 건물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몸을 숨긴 채, 나는 좀 전에 확인한 사실을 되새겨 보았다.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투 방식, 수중전부터 궁술, 도끼술까지, 온갖 병기를 가리지 않는 전술.
그리고 이 능숙한 합격술에, 붉은 투구를 쓴 용병들이라면…?
설마… ‘피의 용병대’?
내가 태어나기도 전, 모든 용병들 중에서도 최강으로 불리던 용병대.
전장에서의 집단 전투에서는 기사단마저 능가한 것으로 이름 높던 그들은, 40년 전 사라졌다.
아니, 피의 용병대만 아니라 당시 정예라 불리던 천 명의 용병이 한꺼번에 죽음을 맞이했다.
오직 단 하나의, 미친 폭풍에 휩쓸려서 말이다.
천 명의 용병이 죽은 광풍의 혈전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여섯 명뿐이고, 그들은 대륙의 공적을 물리친 업적으로 용병으로서는 예외적으로 기사의 칭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바로, 적월의 육 기사라는 칭호를…!
내가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어디선가부터 쩌렁쩌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천검자!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지 않으면 이 계집을 죽여 버리겠다!”
이런…!
한 용병이 인질로 잡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소녀를 보며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도중에 저항을 했기 때문인지, 몸 곳곳에 박힌 화살로 인해 회색의 드레스가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소녀는 의식을 잃은 듯, 축 몸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구할 수 있을까?
이대로 나가 봤자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결과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상대가 움직일 기회조차 주지 않고 단숨에 상황을 처리하는 것뿐이다.
결심을 굳힌 나는 곧장 앞으로 뛰쳐나갔다. 비록 그림자 이동술을 배우지 못했지만, 바위의 힘으로 폭발하듯 땅을 박참으로써, 순간적으로 적들과의 거리를 좁히며 나는 용병이 채 움직이기 전에 ‘홍염의 불꽃’ 제1식, ‘홍색의 섬화’를 펼쳐 냈다.
촤악!
“큭, 이년이…!”
용병이 소녀의 목을 베어 내기 직전, 나는 간발의 차로 단검을 쥔 손목을 베어 냈다. 그리고 그대로 용병의 목으로 검을 뻗었다.
하지만 용병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곧장 자신이 쥐고 있던 소녀를 내게 밀쳐 내며, 몸을 뒤로 빼낸 것이다.
이런…!
그 민첩한 대응에 내심 혀를 차며 내가 소녀의 몸을 받아 낸 찰나, 사방에서 다시 화살이 쏘아져 나왔다. 혼자의 몸이라면 모를까, 소녀를 보호하며 화살을 막아 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일단 소녀를 끌어안은 채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푸욱!
“……!”
마악 발에 힘을 주기 직전, 몸을 비집고 들어온 싸늘한 감촉에 나는 반사적으로 소녀를 밀쳐 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 자루 단검이 내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든 뒤였다.
본능적으로 급소를 피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상처로부터 퍼져 나오는 저릿한 감각은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중독됐나…!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힘을 잃고 쓰러지려는 몸을 땅에 박아 넣은 검으로 가까스로 지탱해 내며 드레스 자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새하얀 허벅지에 찬 검대에서 방금 뽑은 단검을 틀어쥐고 있는 차가운 눈의 소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데스 쉐도우의 암살자였나?”
정신이 점차 몽롱해지는 가운데, 나는 그녀에게 느낀 기묘함의 원인을 깨달았다. 그 단련된 육체를 봤을 때부터 미리 짐작하고 경계해야 했거늘, 어린 나이와 병약한 외모 때문에 그만 방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나를 공격해 오지 않았다. 다만 심연과도 같은 검푸른 눈동자에, 싸늘한 냉기를 담아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나를… 기억 못 하나…?”
“…무슨 소리지?”
그 말에 나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익히 알고 있다는 듯한 그 태도를, 그리고 그 시선에 담겨 있는 처절한 분노와 증오와 원한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녀가 데스 쉐도우의 암살자라면 나를 증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증오는 단지 그것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짙었고, 그 한과 슬픔, 고독과 절망은 이상하게 낯설고도 익숙했다.
“우리를 잊어버렸나… 7호?”
더없이 작고도 가느다란, 그러나 깊고도 진득한 원한으로 넘쳐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원한 때문만이 아니다.
깊고도 싸늘한 흑청색 눈동자와 7호라는 호칭. 그것이 겹쳐지며, 10년 전 어둠 속에 묻어 버렸던 과거 속에서 떠오른 하나의 기억이 나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데스 쉐도우가 궤멸하는 와중에 증발하듯이 사라졌던 일백 명의 훈련생. 그중에도 나와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던 한 훈련생의 윤곽이, 소녀의 얼굴 위로 겹쳐지고 있었다.
“…23호?”
나와 함께 데스 쉐도우의 훈련생이었던 그녀를 나는 다만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