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45)
143마왕의 구원
지금으로부터 약 수십 년 전, 마법을 통해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다크 스톰’이라는 악의 조직이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마법의 힘을 얻기 위해 그들은 금기시되는 온갖 흑마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 악마의 힘으로 이동하는 봉인구를, 자유자재로 타인에게 이전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그 비전을 통해 마법사를 죽이고 그들의 봉인구를 강탈함으로써, 대륙에 존재하는 아흔아홉 명의 마법사 중, 반에 가까운 숫자를 얻는 위업을 이뤄 냈다.
하지만 마법이란 그 한계가 뚜렷한 힘.
마력과 주문의 한계에 부딪혀 세계 정복의 야망을 이루지 못한 ‘다크 스톰’은 그 수장이던 당대 서열 1위의 마술사인 ‘48 어둠에 숨는 자’ 엘로크가 마력 폭주를 일으킴으로써, 결국 파멸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다크 스톰’은 사라졌지만, 그 연구 자료마저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랜 후 그 비전을 얻어 낸 것이 최강의 병사를 만들어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또 다른 악의 조직, ‘데몬 소울’의 수장인 ‘38녹수를 흘리는 자’ 레벤트스였다. 생체 실험을 통해 인체 개조를 이뤄 냈지만, 돌연변이로 인한 지능과 수명 감소와 낮은 효율성 등 온갖 문제에 부딪혀 정체돼 있던 레벤트스는 ‘다크 스톰’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악마적인 발상을 해냈다. 인간의 마력에 한계가 있다면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들어 내면 된다고.
‘데몬 소울’에는 ‘다크 스톰’의 연구 자료와 돈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던 ‘골든 서클’이 붕괴하며 흘러나온 막대한 자금이 있었고, 레벤트스는 그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최강의 마법 생물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했다. 그야말로 악마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은 끝에,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봉인구를 이전시키는 비전인 ‘다크 스톰’의 비전, 인간의 심장을 개조하는 ‘데몬 소울’의 비전, 그 두 가지를 합쳐 인간의 심장에 봉인구를 이식함으로써, 무한한 마력을 부릴 수 있는 반인반마의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강의 전투 병기. 심장에 봉인구를 심음으로써 ‘악마의 피’, 즉 ‘마력’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저주받은 일족, 마족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데몬 소울’은 그 연구의 결실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마족은 한 조직이 가지기에는 너무 큰 힘이었고, 그 힘에 욕심을 낸 간부들은 다른 생체 병기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레벤트스는 기어코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그 처절한 분쟁의 결과 ‘데몬 소울’의 모든 연구 자료는 분실됐고, 실험 생물마저 죽거나 제각각 도주하고 말았다.
특히 치명적인 것은, 그 분쟁의 와중에 마족에 대한 연구 자료마저도 소실돼 버림으로써, 더는 마족을 만들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벤트스는 끝까지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아직 수십 명의 마족이 있었고, 그것만 해도 세계를 정복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힘이었으니까.
레벤트스의 실수는 하나, 스스로를 너무나 맹신한 나머지 마족의 강대한 힘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마족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완성된 대악마 둘의 봉인구를 심장에 이식받아 최강의 마력을 지니고 있던 나는 고통받는 마족들의 모습을 더 견뎌 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레벤트스를 암습하여 죽인 뒤, 마족들을 이끌고 ‘데몬 소울’을 도망 나왔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너무나 냉혹했다. 인체 실험으로 악마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우리는 흡혈 충동과 파괴 욕구에 시달려야 했고, 마족이라는 이름과 저주 아래, 결국 어디서나 쫓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여 나는 결단을 내렸다.
이 세상이 우리를 마라고 부르며 거부한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마가 되어 주겠노라고. 설령 그 때문에 세상이 고통에 신음할지라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르겠노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왕’의 힘과 이름을 앞세워, 마족들로 이뤄진 하나의 왕국을 이뤄 냈으니, 그것이 바로 ‘로드 오브 킹덤’의 탄생이었다.
“레벤트스는 어리석었지. 앙칼진 암고양이를 상대로 어설프게 목걸이를 풀어 주는 실수는 하지 말았어야지.”
가중되는 압력 속에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한 조직의 수장이기에 앞서, 아홉 마술사 중 한 명이자, 인체 개조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연구자였던 38녹수를 흘리는 자 레벤트스는 결코 어리석지만은 않았다.
그가 휘하의 마법사들과 함께 완성해 낸 비전, ‘봉마의 사슬’은 우리 마족의 심장의 봉인구에 반응하여 마력을 억제한다.
그것은 주문의 숫자나 강약과 상관없이 봉인구 자체에 작용하는 비전이기에 일단 펼쳐진 ‘봉마의 사슬’ 앞에서는 어떤 마족도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 순종하는 척 레벤트스의 방심을 끌어내 봉마의 사슬을 푼 틈을 타 암습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데몬 소울’의 전투 병기로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마법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봉마의 사슬’은 레벤트스가 만들어 낸 완벽한 것이었다. 마력이 흩어지고, 피가 느려지며, 의식이 흐려진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하기 힘든 완벽하게 탈력에 가까운 상태로 나는 한쪽 무릎을 땅에 꿇었다.
아무리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내가 마족인 이상, 봉마의 사슬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큭큭큭. 결국 마왕이라는 것도 이 정도인가.”
적검자의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나는 눈꼬리를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모든 마력이 산산이 흩어진 이상, 나는 무력한 10살배기 계집애에 지나지 않았다. 묵묵히 적검자를 쏘아보던 나의 귀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질질.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거친 마찰음. 그것을 따라 옆을 돌아본 순간,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는 마른 체격의 복면인의 손이 움켜쥐고 아름다운 금빛 실타래가, 그리고 본래의 순결함을 잃고 붉은 선혈로 한가득 물든 은빛 드레스가 마치 죽은 듯이 힘없이 늘어진 가는 사지가, 내게 경악을 선사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녀가 저렇게 무력하게 끌려올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믿음은 걸음을 멈춘 복면인이 그 금빛 머리채를 쥐어뜯듯이 번쩍 들어 올림에 따라 산산이 깨져 나가고야 말았다. 그 아름다운 금발 밑으로 드러난 아름다우며 익숙한 하나의 얼굴이 설마설마하던 나의 마음에 최종 선고를 내려 주고 있었으니까.
세…레나?
천검자라고 불리는 세레나가 일개 무력한 처녀처럼 머리채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온 믿지 못한 현실을 나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천검자라는 계집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거늘, 고작 암습 하나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하다니…. 결국 내 상대가 될 만한 건 그자뿐인가.”
오히려 아쉽다는 듯, 적검자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세레나의 턱을 들어 올린 뒤, 의식을 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싸늘한 비웃음을 던졌다.
“검 실력이야 어찌 됐든, 얼굴은 제법 반반하군.”
순간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자는 세레나를 곱게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온갖 수치를 강요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목숨마저 반드시 빼앗으리라는 사실을 그 음험한 음성을 통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 돼. 그건… 그것만은 안 돼!
나 혼자만이라면 괜찮다. 하지만 그녀가, 세레나가 그런 짓을 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설사,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결의를 굳힌 나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목을 타고 넘어와 마력으로 화해 심장으로 흘러들어 오는 느끼며 마지막 남은 진력을 쥐어짜 내, 봉마의 사슬에 제압된 봉인구를 일깨워냈다.
그것은 물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과 같은, 혹은 불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려는 것처럼 무모하기 그지없는 시도였다.
봉마의 사슬은 봉인구에 봉인된 악마를 또 한 번 봉인하는, 2중의 봉인과도 같은 수법. ‘다크 스톰’의 수장 엘로크의 연구를 바탕으로 ’데몬 소울‘의 수장 레벤트스가 완성해 낸 그야말로 비전 중 비전으로, 그 앞에는 어떤 마력도 소용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포기한다는 것은 세레나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의 가족을, 나의 영웅을, 나의 친구를, 내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단 두 명의 상대 중 하나를, 나의 마음을, 나의 영혼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나의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설령 이 목숨이 끊기더라도, 이 영혼이 부서지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그녀를 구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
움직여라, 마의 힘이여.
깨어나라, 악마의 피여.
한계가 있다면 한계를 넘어서라.
현실이 있다면 현실을 초월해라.
순리가 있다면 순리를 거역해라.
나는 운명을 거스르는 자, 존재 자체가 이치를 거스르는 자, 모든 마의 지배자, 81주문을 지배하는 마왕이다!
그가 가르쳐 주었던 마도로 이르는 깨달음과 81주문을 통해 얻은 마법의 힘, 그리고 흑마법을 통해 얻은 악마의 사념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르짖은 순간,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목으로부터 한 줄기 울림이 토해져 나왔다.
우우웅―!
검은 팔찌의 형상으로 팔목에 감겨 있던 ‘용의 그림자’의 눈이 붉게 빛나며 쩌억 벌려진 입으로부터 포효와도 같은 기묘한 울림이 토해져 나온다. 그제야 이변을 깨달은 적검자가 안색을 뒤바꾸며 나를 돌아본 순간….
두근.
악마가 깨어나며 내지른 처절한 포효와도 같이 더없이 선명하고도 뚜렷하게 들려오는 심장의 울림을 들으며, 나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빌어먹을! 당장 막아앗!”
파바밧!
적검자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십수 개의 화살이 날아왔지만, 이미 마력 장벽을 일으킨 내게 있어 화살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마법사들, 뭘 하고 있나! 어서 다시 봉인해!”
적검자가 ‘핏빛 달의 비명’을 뽑아 들고 빛살과 같은 속도로 달려드는 가운데, 나는 최대한 마력 장벽을 확장하며 서둘러 남은 모든 마력을 끌어모았다.
사실 봉마의 사슬을 펼치는 마법사들과 ‘핏빛 달의 비명’을 든 적검자를 함께 상대할 수 있는 자신감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주문 하나를 외울 시간 정도라면 충분히 벌 수 있었다.
“위대한 폭풍의 지배자 세이너스여.”
파강!
마력 장벽이 종잇장처럼 잘려 나가는 가운데, 또 다른 마력 장벽을 일으켜 세운다.
굳이 검을 막아 내지 않고 적검자를 상대로 직접 마력 장벽을 밀어붙이는 마술사조차 꿈도 꾸지 못할 정교한 마력의 제어로 시간을 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크레도스에서 뿜어져 나온 한 줄기 바람.”
파바바밧!
내 전략을 단숨에 눈치챈 듯, 적검자는 감히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복잡 화려한 검술로 마력 장벽을 부수어 왔다.
그에 대한 내 대처는 하나, 양파처럼 겹겹이 마력 장벽을 둘러싸는 마술사라도 마력 고갈로 허덕일 무식한 방어법. 하지만 그 막대한 마력 소모를 감수한 덕분에 나는 가까스로 마지막 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세계의 허파에서 토해져 나온 용의 숨결이라.”
영창을 따라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마력이 팔을 타고 칠흑 팔찌에 흘러 들어간 순간, 살짝 벌어진 용의 입으로부터 하나의 자그마한 구슬이 튀어나왔다.
적검자의 옆을 스쳐, 그대로 허공을 날아간 바람의 구슬을 복면인은 급히 피해 냈다. 하지만 내가 노린 것은 복면인이 아니었다.
휘우우웅!
땅에 쓰러져 있던 세레나.
그 몸에 바람의 구슬이 닿았다 싶은 순간, 짙푸른 원구형의 장막이 세레나의 몸을 감싸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복면인은 급히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맹렬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원구형의 장막은, 간단히 단검을 튕겨 냈다.
갑작스럽게 바람에 휘말린 충격 때문일까.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흐릿하게 눈을 뜬 세레나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을 훑다가 마침내 내게 고정되었다.
처음에는 혼란이, 다음에는 당혹감이, 그러고는 마침내 상황을 깨달은 듯, 세레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입을 열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웃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만족감으로, 기쁨과 안도를 담아 더없이 편안하고도 밝은 미소로. 그렇게 나는 바람의 원구에 휩싸인 채, 하늘로 사라지는 세레나를 지켜보았다.
퍼억!
“윽…!”
마력 장벽이 흩어진 틈을 타, 단숨에 파고들어 온 적검자의 검 손잡이에 명치를 두들겨 맞고, 나는 거센 기침을 토해 내며 땅에 나뒹굴었다.
“제기랄! 어서 쫓아라. 당장!”
“쿨럭, 쿨럭쿨럭!”
과도한 마력의 부하로 생긴 후유증으로 검게 썩은 피를 기침을 통해 쏟아 내면서도 나는 오히려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적검자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코드, 세레나를 부탁해….